105. 드미트르
드미트르 씨가 수도로 온 뒤, 이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날씨는 점점 추워졌고 정원의 나무들은 앙상해져 갔다.
차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던 그때, 문이 열리고 쌍둥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희랑 산책 가요!”
그들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리리와 루이가 보이지 않았다.
“산책이라면 강아지들도 데려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내 말에 두 아이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누나랑 민이 계속 놀아주는 바람에, 셋 다 잠들어 버렸어요.”
“저희 둘만 가면 외롭단 말이에요.”
귀여운 두 사람의 말에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
내 허락이 떨어지자, 쌍둥이는 내 양손을 하나씩 붙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과 정원으로 나가자, 시들기 시작한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한 레몬은 아쉬운 표정을 지은 반면 그린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겨울이네요.”
“그러게.”
“난 겨울 싫어.”
레몬은 아이들 중 정원을 돌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레몬을 바라보며 저택 한구석에 있는 온실을 가리켰다.
저택을 수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텅 비어있는 공간이었다.
“꽃은 온실에서 기르면 되지.”
내 말에 레몬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약초 같은 거 말구 꽃만 심어도 돼요?”
“그럼.”
하지만 약초를 안 심는다는 말에 그린의 표정이 굳어갔다.
아무래도 그린은 약초를 직접 보고 싶은 것 같았다.
요즘 그린이 약초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조금은 심는 편이 좋겠다.”
내 말에 그린의 표정 또한 풀어졌다.
애 키우기 힘들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쌍둥이와의 산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정원의 끝에 도달한 그때 하늘에서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위를 돌려다 보자, 어느새 드리운 먹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쌍둥이의 손을 잡은 채 방향을 돌렸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내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강해진 빗줄기 때문에 나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로 몸을 피했다.
나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는 저택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델아트도 그렇고, 왜 이리 정원을 크게 만드는 거야.
나 혼자라면 몰라도 아이들까지 데리고 저택까지 달려가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수건을 꺼내 레몬과 그린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누군가 데리러 오겠지. 사용인들이 한둘인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나는 두 아이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둘 모두 많이 젖은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니?”
“네, 전 괜찮은데.”
그린은 그렇게 말하며 힐끗 레몬을 바라보았다.
레몬 역시 괜찮아 보이는 듯했으나, 비에 젖어 추운 것인지 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느낀 것인지 레몬은 우리를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괜찮… 에취!”
그 뒤로도 괜찮다는 말과 함께 재채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레몬은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안 갠차나여….”
상황이 상황이었지만, 귀여운 레몬의 모습에 우리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추워하는 레몬을 위해 그린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둘러 주었고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아 주었다.
“금방 사용인들이 데리러 올 거야.”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사용인들은 오지 않았다.
비는 그치기는커녕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고 말이다.
이대로라면 셋 다 감기에 걸리겠어. 차라리 내가 저택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오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순간, 물이 튀기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멀지 않은 나무 뒤, 검은 우산을 쓰고 있는 드미트르 씨가 나타났다.
“드미트르 씨!”
내 부름에 우리가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본 그의 눈이 커졌다.
빠르게 우리 쪽으로 달려온 그는 우산을 우리 쪽으로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드미트르 씨의 눈에는 내가 괜찮지 않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레몬을 안아 든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얼굴이 창백하십니다, 돌아가시죠.”
드미트르 씨의 말에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을 바라봤다.
검은색의 우산은 아무리 봐도 세 명이 동시에 쓰기에는 비좁았다.
“저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 레몬과 그린부터 데려다주세요.”
드미트르씨는 내 말에 망설이는 듯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레몬을 안고 있는 반대쪽 팔을 그린에게 내밀었다.
“제가 기다릴 테니, 형수님부터 돌아가세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으니, 먼저 가렴.”
그린은 여기서 더 실랑이를 벌여봤자, 시간만 길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그린은 드미트르 씨의 손을 잡았다.
“금방 올게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춥다.
몸이 점점 으슬으슬 떨려오기 시작해 나는 팔로 몸을 끌어안았다.
겉옷이라도 받아 둘 걸 그랬나. 비련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이게 뭐야.
중학생 때 이후로 이렇게 비를 맞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근데, 이거 산성비는 아니겠지?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며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그때,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드미트르 씨가 사람을 불러 줬구나.
그런데, 말까지 타고 오는 건 조금 오바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선을 위로 옮기자, 걱정스러운 빛을 띠고 있는 붉은색의 눈이 보였다.
“라스.”
일이 있어 밖으로 외출했던 바리다스가 타이밍 좋게 도착한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작게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겉옷을 벗어 내게 덮어 주었다.
“왜 비를 맞고 있어요.”
내 모습에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머리를 닦아주었다.
“어쩌다 보니….”
내 말에 손수건을 쥔 바리다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머리의 물기를 모두 털어준 바리다스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말을 바라봤다.
“우산을 가져올 걸 그랬네요.”
잠시만, 근데 나 왜 기다리고 있었지? 그냥 걸어서 가도 되는 거였잖아.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나는 입을 열었다.
“그냥 가도 괜찮아요.”
“안 돼요, 감기 걸려요.”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자기도 비 맞고 왔으면서.”
뾰로통하게 말하자 작게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나를 안아 들더니 말 위에 태워주었다.
그리고 내 자세를 잡아준 뒤, 그도 말 위로 올라탔다.
“그래요, 그냥 빠르게 가죠.”
순식간이었다.
걸어서 십 분 이상이 걸리는 거리를 우리는 일 이 분 만에 도착했다.
말이 이렇게 빠르구나.
다만 문제는, 안 그래도 추운 날씨에 바람까지 맞아 온몸이 으슬으슬해졌다는 것이었다.
이거, 내일 무조건 감기 걸린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수건을 든 시녀들이 저택 안에서 우르르 달려 나왔다.
“죄송합니다!”
그들은 내게 일제히 사과하며 수건을 내밀었다.
아니, 우산 안 가져간 건 난데?
“괜찮아요.”
나는 조금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며 시녀들이 내민 수건을 받아들었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샤워를 마치고 벽난로 앞에서 젖은 몸을 말리고 있는 그린과 레몬 그리고 토마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토마 너는 왜?
그때 레몬이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연무장에서 허수아비 때리고 있는 거 잡아 왔어!”
아니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내가 무어라 잔소리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토마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니까.”
나는 그제야 바리다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리다스를 바라보자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토마에게 무어라 잔소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래, 검에 대해서는 바리다스가 더 잘 아니까. 알아서 설득하겠지.
그때 바리다스의 입이 열렸다.
“조만간, 연무장을 실내에도 만들어주마.”
…그게 맞아요?
하지만 토마는 그의 선물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
그걸 만들어주기 전에, 비 맞으면서 훈련하지 말라는 말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지금 이렇게 말하기엔, 토마의 기분이 너무 좋아 보였다.
그래… 실내에 연무장이 생기면 비 맞으면서 훈련할 일도 없을 테니까. 알아서 하겠지.
나도 그냥 샤워나 해야겠다.
너무 많은 비를 맞아서인지 아까부터 찝찝했다.
욕실로 발걸음을 옮기자, 미리 준비를 해둔 것인지 따뜻한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가 보였다.
물 안으로 들어가자, 찝찝했던 기분과 추웠던 몸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역시 따뜻한 게 최고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을 욕조 안에서 뭉그적거렸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나와 마찬가지로 보송보송해진 바리다스의 모습이 보였다.
“몸은 괜찮아요?”
“네.”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창밖을 내다보자, 아까보다는 빗줄기가 약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밤까지는 그치지 않을 것 같네요.”
바리다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그쳐야 할 텐데.”
그때 바리다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일도 밖에 나가나 보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를 바라본 그때, 타이밍 좋게 그도 나를 바라봤다.
깜짝 놀라 시선을 피하는 나를 보며 씩 웃은 그는 입을 열었다.
“내일, 같이 갈 곳이 있어요.”
나랑 가는 거였어?
내 동요에 작게 미소지은 바리다스는 덧붙였다.
“둘이서요.”
요망한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정말로 비가 그쳐야 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