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신전
“안녕하세요, 공작부인.”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고 내게 인사를 건넸지만, 나에게는 대답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 그리고 동양적인 외모.
제우스와 같은 신관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너무나 익숙했다.
대체, 왜….
그리움으로 인해 가슴이 아려왔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감정을 추스른 내가 인사에 대답하려는 순간, 그녀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저는 필레스님을 모시는 성녀 유아라고 해요.”
한국어를 사용해서 말이다.
손이 미친 듯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그녀에게서 느껴진 익숙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붙잡아 진정시킨 뒤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저는….”
내 이름을 바리다스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제 왜 바리다스가 그녀를 나와 만나게 해 주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속으로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이제는 낯설어진 내 나라의 언어로.
“예린이라고 해요.”
내 말이 끝나자, 유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떨리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반가워요, 예린.”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 말을 다시 들을 수 있을 줄 몰랐는데….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보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더 컸다.
나는 한참 동안 유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유아는 울고 있는 나에게 차를 가져다주었고 옆에서 가만히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덕분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눈물을 닦아내고 나자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울었다는 사실이 민망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머뭇거리자 유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삼 년 전, 저는 스물여섯에 처음으로 서울에 직장을 갖게 되었어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열심히 일했어요. 일하는 게 정말 즐거웠거든요. 얼마 가지 못했지만.”
사회 초년생으로 열심히 일만 하던 그녀는 퇴근길에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서 신녀 유아로써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모든 걸 부정했다고 했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과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것, 그리고 신이라는 존재까지.
그리고 부분을 말할 때, 유아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하나 좋았던 점을 꼽자면 젊어졌다는 사실 정도라고.
유아는 이 세계로 떨어졌을 때, 스물여섯 살의 모습이 아니라 스무 살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살기 위해 성녀 유아로써 악착같이 적응해 나갔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이 났고,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유아는 나처럼 빙의자였다. 그런데 왜 원작을 알지 못하는 거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유아가 입을 열었다.
“예린의 이야기도 해 줄 수 있을까요?”
놀라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는 전생에 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내 말에 유아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녀가 원작을 읽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책 속에서 저는 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끝내 사형을 당할 운명이었지만, 다행히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에 빙의했어요. 다시 죽고 싶지 않았기에 책이 정한 내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한 번의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세계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내 말에 유아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내 진짜 고민은 지금부터였다.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제가 읽은 책에서 다른 사람과 이어져요.”
나는 지금 이 질문을 왜 하고 있을까? 지금 여기서 유아가 바리다스와 헤어져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없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알고 싶었다. 과연 책에서 나온 것처럼, 바리다스와 레리아는 운명이었을까?
유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민에 잠긴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유아는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그 책이 무엇인지 잠시 고민하느라.”
“아니에요.”
아무래도 유아는 내가 말한 책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두 권의 책을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하나는 푸른색, 다른 하나는 노란색의 표지였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책을 펴 내게 내밀었다.
“읽어보세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노란 책의 페이지를 모두 읽은 나는 파란색 책의 페이지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권의 책 모두, 처음 시작은 비슷했으나 사소한 선택으로 결과가 달라졌으니 말이다.
내가 책을 모두 읽은 것을 확인한 유아는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책은 수많은 미래 중 하나를 적은 걸 거예요. 미래는 한 갈래가 아닌 여러 갈래로 나뉘어요. 그리고 그 책은 그런 미래 중 하나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죠.”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두 권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제목과 저자가 적혀 있지 않은 책은, 표지 색이 다르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가 모시는 신인 필레스님은 가을뿐만이 아니라, 기록과 시간의 신이기도 해요. 그분은 한 번씩 이야기를 기록해, 다른 세계로 흘려보내곤 하죠.”
그제야 나는 유아가 하려는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제가 읽은 것이 그런 이야기 중 하나라는 건가요?”
내 말에 긍정하듯 유아는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네. 그러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어요. 그것들은 원래 일어날 일이 아니라 수만 가지 미래 중 하나였을 뿐이니, 당신은 누군가의 운명을 빼앗은 것이 아니에요.”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서.
마음 한구석을 누르던 죄책감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 사실을 느낀, 내 양쪽 눈에 눈물이 고여왔다.
“…고마워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아는 등을 토닥이는 것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대사제님께서 급한 일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유아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고 입에서는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번에는 저를 만나러 와 주세요.”
그 말이 왜인지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러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내 대답에 유아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혹시… 업무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으로 보는 그녀의 의외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에 유아는 내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종이에 적힌 글씨는, 바로 한국어였다.
“그게 성서인데… 제발 번역 좀… 도와주세요.”
순간적으로 그녀에게서 야근하는 회사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녀가 너무 힘들어 보이기도 했고 번역하는 일 정도라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도와드릴게요.”
내 말에 유아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빛이 들어왔다.
그 빛 아래, 아래 유아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다음에는 전생 얘기도 같이 나눠요.”
“좋아요.”
그렇게 우리는 함께 방에서 나왔다.
방 앞에는 바리다스와 제우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가시죠, 성녀님.”
제우스는 바로 유아를 데려가려 했고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나와 함께 있을 때의 소녀 같은 모습은 사라진 채, 유아는 다시 우아한 성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헤어지기 전 나는 유아와 내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내게 윙크하며 손가락 하트를 날려 보냈다.
그 모습은 정말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나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손가락 하트를 보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친한 고향 친구가 생긴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야기는 잘하고 왔어요?”
그때 들려 온 바리다스의 목소리에 나는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에게는 정말로 고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네, 정말로 고마워요.”
감사 인사를 하며 시선을 들자 나 못지않게 환하게 웃는 바리다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행이네요.”
나 못지않게 행복해 보이는 바리다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정말로, 날 사랑하고 있구나.
그래, 이제는 말 할 수 있었다.
바리다스의 품에서 벗어난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지난번에 제가 하려던 말, 기억해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표정이 조금 오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는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난번에 이 세계를 책으로 읽었다는 건 말씀드렸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당신의 인연을 괴롭히는 악역이었고, 당신은 남자 주인공이었어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눈치 빠른 그라면 어림잡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그렇게 표정을 구긴 채,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책 속의 연인이 누구든 주인공이 누구든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하지만 바리다스는 말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다.
내가 그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네, 저도 그래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책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이제는 상관없어요.”
그래. 이건 내 인생이었다.
아필레와 두 소녀와의 우정도, 아이들의 애정도 바리다스와의 사랑도 전부 내가 만든 내 것이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니까요.”
나는 아직도 오묘한 표정의 바리다스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저의 두 번째 주인공이 되어 주시겠어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장담컨대, 그 미소는 내가 살면서 본 미소 중 가장 아름다웠고 또 사랑스러웠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마 내가 다시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당신의 두 번째 주인공이 되었으니까.
따사로운 햇볕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포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