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당신의 역할
“할아버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드미트르는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먼발치에서 달려오며 손을 흔드는 자스민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안녕하세요!!”
꽤 먼 거리를 쏜살같이 달려온 자스민을 드미트르가 안아 든 그 순간, 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 뛰면 안 된다고 했지!”
헉헉거리며 뒤를 쫓아오던 렌은 자스민을 안고 있는 드미트르를 마주한 뒤에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드미트르의 질문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선생님.”
그녀의 말에 드미트르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쉰 드미트르는 입을 열었다.
“그런 호칭은 제게 과분합니다.”
왜, 렌이 드미트르를 선생님이라 부르게 되었나.
그건 몇 주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몇 달 전 수도에는 하나의 유행이 돌았는데, 바로 연회장에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는 작은 무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때는 마침 차일드 가의 저택을 수리하고 있던 기간과 맞아 떨어졌기에 바리다스는 연회장에 무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무대 위에 배치할 피아노의 제작 또한 맡겼으나 예약이 밀려 몇 주 전에야 저택에 도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오랜 기다림 속에 도착한 피아노는 운명처럼 렌과 마주하게 되었다.
연회장에 배치되는 만큼이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본체와, 그보다 더 아름다운 건반의 울림에 렌은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렇게 렌은 매일같이 연회장으로 달려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난관은 다름 아닌, 하나의 곡이었는데.
레트맨의 <네가 없는 날>이라는 제목의 곡은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정도의 극강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곡이었지만 피아노를 독학한 렌으로서는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렌은 일주일 넘는 시간 동안 그 곡에 매진했지만 늘 같은 부분에서 틀리고 말았다.
그렇게 렌이 점점 지쳐가던 어느 날, 연회장 근처를 지나가던 드미트르는 우연히 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붉어진 눈가의 렌을 본 드미트르는 그 자리를 지나칠 수 없었다.
망설이던 그는 노크를 하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드미트르의 부름에 렌은 눈가를 문질렀다.
악보 하나를 연주하지 못했다고 울먹이는 모습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별일 아니에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그 정도로 드미트르를 속일 순 없었다.
렌이 걱정된 드미트르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렌은 쉽사리 연주를 할 수 없었다.
완벽하지 못한 연주를 남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침묵이 내려앉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드미트르였다.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한 곡 들려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해 주신다면, 감사히 듣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그렇게 의자에 앉은 드미트르는 악보도 보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연주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렌은 알 수 있었다
드미트르가 훌륭한 연주 실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그의 연주가 끝이 났고 드미트르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실례가 아니라면, 답주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렌은 답주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겠어요.”
“영광입니다.”
대답과는 달리 렌은 섣불리 건반에 손을 올릴 수 없었다.
드미트르의 연주는 완벽했다.
그런 연주에 대답하기 위해선, 자신도 완벽한 곡을 연주해야 했다.
고민하던 렌은 네가 없는 날의 악보를 넘기고 다른 곡을 찾으려고 한 순간, 드미트르가 악보를 붙잡았다.
깜짝 놀란 렌이 그를 올려다보자, 드미트르가 입을 열었다.
“이 곡으로 부탁드립니다.”
드미트르의 말에 렌은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건반 위에 올리고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렌이 항상 틀리는 그 부분을 연주하기 시작한 순간, 드미트르가 옆에 놓여 있던 바이올린을 잡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드미트르의 주도에 렌은 홀린 듯 그의 연주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렌은 그를 따라 처음으로 한 번도 틀리지 않은 채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연주가 끝이 났고 멍하니 앉아 있는 렌을 바라보며 드미트르는 입을 열었다.
“혼자서 이 정도의 연주를 하시다니, 아가씨는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좋은 선생을 구한다면 음악사에 한 획을 그으실 겁니다.”
하지만 지금 렌에게 그의 칭찬은 들리지 않았다.
렌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역시, 연주하는 건 좋았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성공하게 되면 정말로 행복했으니 말이다.
렌은 드미트르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의 시도 끝에, 그녀는 다시 한번 완벽하게 연주를 마쳤다.
그런 렌의 모습을 드미트르가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때.
렌이 드미트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웃음은 드미트르가 지금까지 봤던 렌의 미소 중, 가장 밝았다.
“제 연주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런 렌의 모습에 드미트르는 뿌듯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선생님!”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부르는 렌의 모습에 드미트르는 할 말을 잃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드미트르는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과분한 자리입니다.”
“아뇨,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좋은 선생이 있다면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게 저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좋은 선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렌은 드미트르를 자신의 선생님으로 만들겠다 결심한 뒤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렌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충분히 좋은 선생님이세요.”
“공작님께 부탁드린다면 저보다 더 훌륭한 선생님을 구해줄 텐데요.”
“전 선생님에게 배우고 싶어요.”
그렇게 한참을 말다툼하던 드미트르는 렌의 고집을 꺾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내렸다.
그가 이렇게 렌의 부탁을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드미트르의 하루는 렌의 부탁을 들어 준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이 없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에게 친절했고 서재는 그가 좋아하는 책들로 가득했으며 정원은 산책하기 적당했다.
충분히 가르쳐 줄 수 있었다. 다만, 그는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한 가지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의 곁을 떠나야 하기에.
그래서 자신이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아이들이 이런 늙은 노인네에게 관심이 있을 리 없으니, 자신이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그에게 먼저 다가갔고 결국 드미트르는 그들에게 곁을 내주고 말았다.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와 다름없었다.
자신이 여기서 아이들에게 더 정을 준다면, 그들의 곁에서 자신이 사라졌을 때의 충격은 더 클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드미트르는 렌의 부탁을 거부할 수 없었다.
도련님을 꼭 닮았군.
한숨을 내쉰 드미트르는 결국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라면….”
드미트르의 말에 렌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졌고, 결국 그는 하나의 손가락을 더 들었다.
그제야 렌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드미트르는 렌의 첫 번째, 음악 선생님이 되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아래, 자스민은 드미트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고 그 옆에서는 렌이 그의 지도를 받으며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피아노에 이어 바이올린까지 배우기 시작한 렌은 짧은 시간 만에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오늘도 어렵기로 손꼽히는 곡을 완벽하게 연주한 렌은 뿌듯하게 미소 지으며 드미트르를 바라봤다.
“고생하셨어요.”
“아닙니다.”
그렇게 렌에게는 너무 빠르고 드미트르에게는 조금 길었던 두 시간이 지나갔다.
렌과 헤어진 드미트르는 이제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는, 검술만 한 것이 없었다.
최근 바리다스는 토마에게 약속한 대로, 실내에 연무장을 만들어 주었지만 드미트르가 향한 곳은 그냥 연무장이었다.
한 가지는 그가 답답한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훈련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스승님!!”
그의 검술 제자 되시겠다.
자신을 부르는 토마의 목소리에 연무장에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드미트르는 휘두르던 검을 내려놓고 토마에게 다가갔다.
“그런 호칭은 저에게 너무 과분합니다.”
이 말도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드미트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토마는 종종 드미트르와 대련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드미트르는 그의 자세를 잡아 주거나, 검을 잡는 법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검술 몇 가지를 알려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토마는 렌이 드미트르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을 들은 뒤로, 그를 스승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저희 형님과 저에게 검을 가르쳐 주신 분인데, 어찌 스승으로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드미트르는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토마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시선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토마는 그를 바라보며 검을 들었다.
“대련, 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오늘도 드미트르는 토마에게 붙잡혀 다섯 번 정도 대련을 해 주었다.
대련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대련 또한 드미트르가 좋아하는 일이었고 가만히 허수아비를 때리거나 허공을 찌르는 것 보다 실력 향상의 도움이 된다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토마가 지친 틈을 타 연무장을 벗어난 드미트르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렌과 토마의 저런 열정적인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근데 왜 대체, 저에게 그러시는 겁니까.
스승님이든, 선생님이든 둘 모두 자신에게 너무 부담스러운 호칭이었고 그는 둘에게 자신의 의미를 크게 남기고 싶지 않았다.
동내 할아버지와, 가르침을 준 선생님의 차이는 매우 크니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드미트르는 한숨을 내쉬고 망설임 없이 서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