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바리다스의 휴일
바리다스에게는 요즘 들어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사업이 잘 안 되거나, 정치적인 일이 아니라 굉장히 개인적인 고민 말이다.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책상에 앉아 있던 바리다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지루하군.”
그의 고민은 바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연이은 사업의 대박과 범접할 수 없는 가문의 위치, 우호적인 황실과의 관계. 공작으로서의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해버렸다.
그리고 그 덕인지, 갑작스럽게 오늘 하루 바리다스에게 휴가가 주어졌다.
언제나 바쁘게 살아오던 바리다스는 이 갑작스러운 여유가 매우 어색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예린과 아이들의 부제 때문일 것이었다. 바리다스는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들과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예린은 오늘도 유아를 만나러 갔고 쌍둥이와 자스민은 황실에 토마와 렌은 드미트르와 함께 있었다.
그랬기에 바리다스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잠겼다.
사람들은 평소에 쉴 때, 무슨 일들을 하지?
바리다스에게는 흔한 취미 하나 없었다. 독서나 훈련은 일과의 일부였고 산책도 마찬가지였다. 걷는 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예린이나 아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크림슨이 바리다스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크림슨.
바리다스 곁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며 그의 보좌관이자, 집사를 맡을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저 말은 크림슨도 바리다스 못지않게 바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크림슨이 오늘 바리다스를 찾아온 이유는 바로 오늘 업무도 일찍 끝난 김에, 일찍 퇴근해도 되냐는 질문을 하기 위함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은 크림슨은 입을 열었다.
말하는 거다. ‘공작님, 오늘은 먼저 퇴근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말이다.
크림슨, 그의 나이 43세. 늙어 보이는 외형에 비해 중년의 나이인 그는 자유시간이 간절한 유부남이었다.
“공작님.”
“크림슨.”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둘의 타이밍이 맞아떨어졌고 크림슨은 그의 부하직원이었다.
“먼저 말씀하시죠.”
크림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자네는 보통 쉴 때, 무슨 일을 하지?”
그걸 왜 묻는 거지?
크림슨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리다스의 말은 자신이 퇴근을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크림슨은 입을 열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크림슨은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대답이라 생각했으나 절대 그렇지 못했다.
예린과 아이들이 자리를 비운 지금, 가족이라니.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했고 다행히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던 크림슨은 그제야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 바리다스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요즘은 친구들과 술을 마십니다.”
다시, 아니 아까보다 분위기가 더 얼어붙었고 크림슨은 뒤늦게 떠올렸다.
아, 맞다. 공작님 친구 안 계시지.
아무래도 자신의 퇴근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며 크림슨이 좌절하고 있던 그때,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가 봐.”
그의 말에 크림슨은 귀를 의심했다.
“네?”
“퇴근하라고.”
바리다스의 말에 크림슨은 속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방 밖으로 나가며 크림슨은 생각했다.
아니, 아내랑 아이들이 없으면 좋아할 일 아닌가?
남편 15년 차이자, 아빠 13년 차. 네 남매를 둔 크림슨으로서는 바리다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뭐 대수인가. 칼퇴근 시켜주는 상사가 최고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크림슨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된 바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만히 쉬는 건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일이 없다면 찾아서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차일드 가는 수도에서 호텔과 레스토랑을 포함한 몇 개의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오후에는 시찰을 다니고 저녁에는 예린과 드미트르,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토마와 렌은 드미트르가 데려올 것이고 황궁과 신전에 저녁에 데리러 간다는 편지를 써뒀으니 문제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말에 올라탄 바리다스는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 시각 황궁.
황궁으로 배송되는 우편물은 모두 엄중한 조사를 받으며 황제는 합법적으로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바리다스의 편지가, 아이들에게 가기 전 아킬레스의 손에 들어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5시에, 황궁으로 데리러 가마. 같이 저녁을 먹자꾸나.(이탤릭체)/
그 편지를 읽으며 작게 웃음을 터트린 아킬레스는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불러 그에게 바리다스의 편지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편지는 쌍둥이 공녀에게, 그리고 황후와 황태자, 황녀에게 저녁을 나가서 먹자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나가려면 기사들도 대기시키고 레스토랑도 임대해야 하니, 할 일이 참 많아.
리스는 알려나, 내가 자신을 이렇게 위한다는 사실을.
바리다스가 안다면 정색하고 아니라고 할 말이었다.
수상하게 웃는 황제를 뒤로한 채, 시종은 편지를 들고 아필레와 아이들이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뛰어노는 아이들과 아필레 그리고 몇 명의 귀부인들이 세팅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있었다.
오늘 황궁에는 레몬과 그린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 자제들까지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시종이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던 그때.
“들어가시기 곤란한 상황이라면, 제가 대신 전해 드릴까요?”
예린이 황궁에 도착했다.
* * *
오늘 나는 신전에 길게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건 바로 이 학부모 모임에 나도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아와의 선약이 있기에 조금 늦게라도 참석하겠다 밝힌 나는 타이밍 안 좋게도 바리다스의 편지와 엇갈리게 된 것이었다.
차일드 가문의 문양과 나를 바라보던 시종은 내가 누군지 눈치챘는지 나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는 차일드 가의 두 분에게,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와 두 전하께 나가서 식사를 하자는 말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시종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90도로 인사한 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무슨 편지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원으로 들어갔다.
내가 도착하자 모두 내게 가벼운 인사를 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빈 아필레의 옆자리에 앉았다.
“요즘 들어 얼굴 보기가 힘들군.”
그러자 아필레가 조금 서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유아를 만나러 다니느라 황궁에 방문하는 빈도수가 줄긴 했다.
황궁과 신전은 묘한 대립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 이루고 있어야만 했다.
원래 정치라는 것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기만 하면 틀어지는 법이었고 아킬레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황실과 의도적으로 대립 구도를 만들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실과 신전이 사이가 안 좋다 생각했다.
사실 둘의 사이는 꽤나 좋았지만 말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나는 슬그머니 아필레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신전에 가느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필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왜 신전에 가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전에 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기도와 치료.
내 말실수 때문에 아필레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성녀님을 뵈러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슬그머니 아필레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아필레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렇군, 성녀는 좋은 사람이야. 나중에 셋이서 차라도 마시지.”
그녀의 말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왔고 그 때문에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편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라 편지를 주워든 나는 그제야 시종의 말을 대신 전해주기로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필레, 폐하께서 오늘 저녁을 아이들과 함께 밖에서 먹자고 전해달라 하셨어요.”
내 말에 아필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싫지는 않은 것인지 아필레는 시종 한 명을 불러 아킬레스에게 긍정의 답을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 아이들도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내가 온 지 몰랐던 것인지 나와 눈이 마주친 쌍둥이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달려왔다.
웃으며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레몬은 웃으며 새로 사귄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린은 딱히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인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 행동이 그린답긴 했으나, 조금 걱정이 되었다.
“참 그러고 보니, 너희에게 편지가 왔어.”
내 말에 쌍둥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편지의 수신인을 알아차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봉투를 열고 편지를 모두 읽은 레몬은 입을 열었다.
“형수님, 오라버니가 저녁 다 같이 나가서 먹재.”
그녀의 말에 옆에서 리리안 그리고 레이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아필레와 내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만날 것 같네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