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바리다스의 휴일
조금 전 호텔에 다녀온 바리다스는 시찰 겸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몇 주 전 매입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 레스토랑의 이름은 ‘세이브’로 수도에서 맛있기로 소문 난 곳 중 하나였다.
바리다스가 레스토랑을 구입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혹시나 예린과 밖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심지어 그는 비슷한 이유로 장난감 가게를 포함한 몇 가지 가게를 더 구입했다.
예린이 안다면 경악할 일이었다.
아무튼 바리다스는 이 레스토랑의 주인이었고 그랬기에 그는 마음대로 이곳을 사용할 수 있었다.
종업원들과 세이브의 이 층을 정리하던 바리다스는 순간적으로 든 불안한 느낌에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왜인지 불청객이 끼어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아래층에서 황제의 문양이 새겨진 편지를 든 기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황제 폐하의 전언입니다.”
“그래.”
적혀 있을 내용이야 뻔했기에,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그의 편지를 받아들었다.
/우리 가족 자리도 마련해 두도록.(이탤릭체)/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편지의 내용에 바리다스는 망설임 없이 편지를 구겨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편지를 전한 기사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리다스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편지가 잘 타는 것을 확인하며 만족스럽게 웃은 바리다스는 하나의 테이블을 더 준비하도록 지시하며 입을 열었다.
“의자는 세 개만 더 가져와.”
그의 지휘 아래,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바뀌었고 바리다스가 대부분의 준비를 마친 그 순간, 아래층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다른 불청객인가.
모처럼 가족들끼리 휴일을 보내려 했건만 오늘은 왜 이리, 손님이 많이들 오는지.
바리다스는 아무리 그래봐야, 아킬레스보다 덜 거슬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리다스는 원래 목적대로 레스토랑의 이 층을 통째로 사용하기로 했고 원래 예약했던 사람들에게는 예약금의 다섯 배와 다음번 예약 때에는 좋은 자리와 우선권을 주기로 약속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으니, 반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이브의 일 층에서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갑자기 예약을 취소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벽을 내리치는 위협적인 행동과 거대한 목소리에, 며칠 전 종업원으로 취업한 테튼은 몸을 움츠렸다.
그는 벌써부터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계속된 테튼의 사과에도 남자의 호통은 끝날 줄 몰랐다.
화가 잔뜩 나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바리다스는 자신 때문에 사과하고 있는 테튼에게 미안하다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남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바리다스는 공작이라는 권력자이기 이전에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과의 신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행동은 권력을 이용해 손님과의 약속을 깬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는 그 점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일 층에 한 자리를 더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바리다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남자는 점점 선을 넘기 시작했다.
“멍청하고 무능한 놈 같으니라고, 너 내가 누군지는 알아?”
“죄송합니다.”
계속된 테튼의 사과에도 남자의 언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렇게 테튼이 죄송하다는 말을 스무 번쯤 했을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됐고, 주인 나오라 해.”
그의 말에 테튼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다.
차라리 진상 고객를 하루 종일 상대하고 말지, 사장님을 부르라고? 그 공작님을?
절대 못 해.
바리다스는 특유의 무뚝뚝함과 싸늘한 표정 그리고 기계 같은 일 처리 능력 때문인지 수도에서는 까칠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진상이 무서워 봐야, 해고와 화난 상사보다 무섭겠는가.
입술을 짓씹은 테튼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건 정말로 힘들 것….”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이어나갈 수 없었다.
화를 이겨내지 못한 남자가 주먹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높게 올라간 남자의 손이 그에게 떨어지려는 순간, 바리다스가 그의 손을 잡아챘다.
“이건 또 뭔….”
이번에는 그가 말을 끝까지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 제국에서 차일드 가의 붉은 눈을 모르는 귀족은 없었으니까.
바리다스의 정체를 파악한 그는 바로 자세를 고치고 경례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님 펠리슨 자작가의 차남 위런입니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깍듯한 인사에 바리다스는 잡고 있던 위런의 팔을 놓아주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바리다스는 지금 꽤나 화가 난 상태였다.
처음에는 그가 손님이고 이쪽의 잘못도 있으니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그의 행동은 선을 넘었다.
위런은 바리다스의 직원에게 폭언을 퍼부은 것뿐만 아니라 손찌검까지 하려 했다.
이제 위런은 더 이상 바리다스의 손님이 아니었다.
“자기소개는 됐고, 나는 왜 찾았나?”
바리다스의 말에 위런의 작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는 공작의 기역 자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위런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공작님이 레스토랑의 주인이십니까?”
“그렇지.”
바리다스의 말에 위런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갔다.
이런 거물을 건들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오늘 기분이 안 좋았을 뿐이었고 그때 마침 세이브의 예약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펠리슨은 자작 가문치고 풍족했기에 그에게 보상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위런에게는 화풀이할 대상이 생겼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바리다스가 세이브를 매입하기 전 주인은 힘없는 평민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위런은 자신의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평민이 귀족에게 덤빌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터인데 말이다.
위런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차가운 눈을 피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하필이면 왜 레스토랑이 팔렸으며, 새로운 주인은 공작이고 그가 진상을 부린 오늘 레스토랑에 와 있었을까.
위런은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그는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앞에 있는 것은 공작이었고 저는 작위도 받지 못하는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했다.
허리를 숙인 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위런의 말에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뭐라고 더 해봐야, 그가 반성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리다스는 아직도 덜덜 떨고 있는 테튼의 팔을 붙잡아 위런의 앞에 세웠다.
“사과는 내 직원에게 하는 것이 맞지 않나?”
바리다스의 말에 위런의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공작이라 하더라도, 평민에게 사과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좀….”
그렇다고 바리다스에게 대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의 태도에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펠리슨 자작에게 연락하도록 하지.”
“아뇨, 제가 죄송합니다!”
바리다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런은 허리 숙여 테튼에게 사죄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본 바리다스는 테튼을 향해 눈짓했다.
곧 눈짓의 의미를 파악한 테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 괜찮습니다.”
테튼이 그의 사과를 받은 것을 확인한 바리다스는 턱을 까딱였다.
“가 봐.”
그의 말에 위런은 쏜살같이 레스토랑을 빠져나갔고 테튼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건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귀족에게 받은 사과였다
새로 오신 사장님, 무서운 분인 줄 알았는데 좋은 분이셨구나.
테튼이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를 바라본 그때,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아직 저 눈은 무서웠다.
그가 바리다스의 눈을 피해 시선을 아래로 내린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이런 귀족들이 온다면 손님으로 취급하지 말도록”
바리다스의 말에 테튼은 감격했다.
좋고 멋진 분이셨구나!
“네,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품 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었다.
“고생했네, 오늘은 일찍 퇴근하도록.”
금화를 작은 주머니에 담아, 테튼에게 내민 바리다스는 이번에는 주방으로 들어갔고 그는 바리다스와 자신의 손에 들린 금화 주머니를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틀어막았다.
엄마, 나 취업 개 잘했어….
그래, 진상이 무슨 대수인가.
칼퇴에 보너스까지 주는 상사가 있는데.
테튼은 차마 바로 퇴근하지 못하고 다른 종업원들을 도와 일 층을 정리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주방으로 들어간 바리다스는 위생 점검을 마친 뒤 주방장과 함께 저녁 메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킬레스가 좋아하지 않는 생선 요리와 토마토 샐러드까지 추가하는 것으로 메뉴 선정을 마쳤다.
시계를 바라보자, 딱 네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식사 시간까지는 조금 더 많이 남았군.
바리다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침 근처에 있을 장난감 가게까지 들리려고 했다.
“지시한 시간에 맞춰 준비해 두도록.”
바리다스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연 순간.
익숙한 흰 머리와 푸른 눈동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라스!”
완벽한 타이밍에 놀란 것도 잠시, 바리다스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은 예린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제가 데리러 왔어요.”
그녀의 말에 바리다스는 환하게 웃으며 예린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둘은 손을 잡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고 그 모습은 마침 창틀을 닦고 있던 테튼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바리다스를 보며 생각했다.
저런 얼굴도 하실 줄 아는 분이셨구나.
처음이었다, 표정 하나로 사람의 분위기가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테튼은 그렇게 창문을 닦던 것도 잊은 채, 멀어져가는 바리다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