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가을 나들이
이른 아침, 나는 라라와 루이, 리리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눈이 일찍 떠져 개들을 데리고 정원에 나온 것이었다.
날씨는 좋았고 적당히 부는 바람은 춥지 않고 선선했다.
정원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를 지나가던 그때 개들이 동시에 목줄을 잡아당기며 짖기 시작했다.
“멍! 멍멍!”
갑작스러운 그들의 행동에 당황한 나는 목줄을 잡아당겼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또 그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개들이 향한 곳은 바로 나무의 바로 뒤쪽이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에는 조금 쓸쓸해 보이는 표정의 드미트르 씨가 앉아 있었다.
개들은 바로 그에게 달려가 주위를 돌며 애교를 부렸고 드미트르 씨도 미소를 지으며 강아지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뒤늦게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조금 머쓱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님.”
나는 작게 웃으며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걸터앉았다.
하늘을 바라보자 오늘따라 높고 맑은 가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네, 오늘따라 날씨가 좋네요.”
하지만 변덕스러운 강아지들은 이번에도 목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이건 이제 다시 산책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강아지들의 재촉에 다시 몸을 일으킨 내가 드미트르 씨에게 인사를 하려던 순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드미트르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닙니다, 마침 저도 산책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드미트르 씨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서 라라와 루이의 목줄을 받아 갔다.
항상 그에게는 도움만 받는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드미트르 씨를 바라보자, 주머니에 꽂혀 있는 단풍나무 잎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단풍을 보고 계셨지.
“드미트르 씨는 단풍을 좋아하시나 봐요.”
내 말에 드미트르 씨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그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나는 똑똑히 보고 말았다.
“네, 좋아합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저 표정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드미트르 씨는 아무래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의 말에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저도 좋아해요.”
그렇게 나는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답을 내놓을 수 있었고 드미트르 씨의 ‘그렇군요.’라는 대답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신이 난 강아지들의 울음소리와 나와 드미트르 씨의 발걸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때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던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오늘은 내가 드미트르 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시간이 있으시다면 점심때, 다 함께 단풍 구경을 가지 않을래요?”
나는 전생에서 단풍 구경을 싫어하는 어르신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드미트르 씨는 단풍도 좋아한다 했으니, 아마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잠시 망설이던 드미트르 씨가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대답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찾아뵐게요!”
지금부터 준비하려면 할 것이 많았다.
도시락도 싸야 했고 아이들과 바리다스의 의사도 물어야 했다.
그렇게 강아지들을 데리고 위층으로 향하던 나는 마침 내려오던 렌 그리고 자스민과 마주쳤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 형수님.”
렌은 쌩쌩해 보였으나, 자스민은 방금 일어난 것인지 하품을 하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구나, 너희들은 잘 잤니?”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렌은 내게서 리리의 목줄을 받아 가며 입을 열었다.
“형수님은 식사하셨나요?”
아무래도 렌과 자스민은 식당으로 가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이지.”
“그럼 저희랑 같이 먹을래요?”
그때, 잠이 좀 깬 것인지 자스민이 내 팔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긍정의 대답에, 렌은 내 반대쪽 팔을 붙잡았고 자스민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운이 좋게도 바리다스를 제외한 아이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 형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이들은 차례로 내게 인사를 건넸고 그들 중 레몬은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왔다.
바로 자스민에게 향한 레몬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오늘 크림 파스타 진짜 맛있어.”
레몬의 말에 자스민은 침을 삼켰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레몬의 옆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나, 언니 거 나눠 줘.”
귀여운 자스민의 말에 레몬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두 소녀는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고 렌은 둘의 모습에 조금 서운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렌과 그린은 담백한 요리를 좋아하는 반면, 토마와 레몬, 자스민은 조금 느끼하고 기름진 요리를 좋아했으니 말이다.
이건 취향의 문제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연어 스테이크 먹을까?”
연어 스테이크, 그건 렌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였다.
내 말에 작게 미소를 지은 렌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좋아요.”
역시, 아직 애라니까.
귀여운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렇게 나와 렌이 자리에 앉은 순간, 토마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그는 이미 식사를 마친 듯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리고 토마는 언제나처럼 연무장으로 가기 위해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보내 줄 수 없었다.
드미트르 씨와 한 약속이 있기도 했고 나도 아이들과 다 함께 단풍 구경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토마!”
내 부름에 토마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네?”
“오늘은 연무장 대신, 다 같이 소풍을 가지 않겠니?”
내 말에 토마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이어 사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저는 좋아요.”
긍정의 대답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몬과 자스민이 소리쳤다.
“우리 소풍 가요?!”
“나도 갈래!!”
그리고 두 아이의 행동 때문에 식탁이 덜컹거리며 컵이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다행히도 옆에 있던 렌이 놀라운 순발력으로 손을 뻗어 컵을 붙잡았다.
컵이 깨지지 않은 것에 내가 안도한 그 순간, 렌은 자스민에게 시선을 옮겼다.
“조심해야지, 민.”
렌의 말에 자스민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그녀의 사과에 한숨을 내쉰 렌은 자스민의 옷에 묻은 주스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컵이 떨어질 때, 튄 모양이었다.
렌이 냅킨을 찾아 헤매자 보다 못한 그린이 손수건을 꺼내 자스민에게 다가갔다.
“이리 와.”
동생을 챙기는 훈훈한 둘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그린은 자스민의 옷을 모두 닦아준 뒤, 토마와 꼭 닮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갈게요.”
이렇게 보면 정말 형제라니까.
토마와 그린은 성향과 외모 모두 많이 닮지 않았지만 딱 하나, 웃음만큼은 정말 닮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그린은 언제 웃었냐는 듯,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바리다스가 어렸을 때도 둘과 닮았으려나?
어린 그에게 좋은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금 궁금하긴 했다.
델아트에 있는 저택에 가면 초상화라도 찾아볼까.
어린 시절의 바리다스라니, 상상만 해도 귀여울 것 같았다.
내가 바리다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상상하고 있던 그때, 식사를 마친 레몬이 내게 다가왔다.
“근데 형수님, 어디로 갈 거예요?”
그리고 레몬의 질문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게. 어디로 가지?
잘 생각해 보니, 나는 단풍을 구경하러 갈 만한 장소를 몰랐다.
하지만 기대가 잔뜩 담긴 레몬의 눈빛은 내게 모른다는 대답을 허락하지 않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근처 공원은 어떠니?”
그 순간,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향했다.
반짝거리는 그들의 눈빛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원이 별로인가?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레몬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나 공원 가보고 싶었어!”
너희 설마 공원도 처음이니?
번화가나 시내도 내가 처음 데려간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별생각 없이 꺼낸 공원이라는 말에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내 양심을 찌를 뿐이었다.
“나도!”
“공원에는 커다란 동상들과 분수가 있다고 들었어.”
자스민이야 그렇다 치지만, 이런 일에 관심이 없는 그린마저도 공원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 어떤 커다란 동상이나 분수도 너희가 제집 드나들 듯 가는 황궁에 있는 것보다 작아.
하지만 나는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장소는 공원으로 결정이 나는 듯했다.
식사를 마친 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입을 열었다.
“그러면 모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열두 시에 일 층에서 만나자.”
“네!”
아이들은 합창하듯 대답했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제 나도 할 일을 해볼까.
나는 며칠 전 기차를 타고 수도로 올라온 로나와 레나를 불렀다.
“로나는 점심을 나가서 먹을 예정이니, 주방장에게 샌드위치와 과일 우유 그리고 간식을 담아달라고 전해줘 커다란 돗자리도 필요해. 그리고 레나는 내 옷을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수도의 저택에 빠르게 적응한 두 소녀는 여전히 일 처리가 빠릿빠릿하고 정확했다.
두 소녀가 없을 때도 다른 시녀들이 있었기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부터 함께 해서인지 내게는 로나와 레나가 가장 편한 존재였다.
나를 위해 수도까지 따라와 준 두 소녀의 월급을 올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바리다스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무실 앞에 서자, 문을 열지 않았음에도 은은한 민트향과 커피향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 사실이 왜인지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며 노크를 하자 바리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이 시간대에 그를 찾아올 만한 사람은 크림슨뿐이기에 그는 별다른 질문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층 더 강해진 민트와 커피의 향이 느껴졌다.
역시 바리다스는 나를 크림슨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그의 질문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서요.”
그제야 바리다스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서류를 내려놓고 내게 다가온 그는 내 이마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