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가족 나들이
바리다스는 아무래도 나를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를 소파에 앉힌 그는 차를 가져온 뒤 내 옆에 걸터앉았다.
“오늘 많이 바빠요?”
“아뇨, 여유 있습니다.”
그래, 여유 있어 보이긴 했다. 그러니 지금 이러고 있겠지.
나는 내 허리를 붙잡은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럼 점심때, 다 같이 나들이 갈래요?”
내 질문에 바리다스는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서류들을 바라봤다. 그는 잠시 해야 할 일을 가늠하는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가 풀었다.
“그래요.”
긍정의 대답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바리다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작게 웃음을 터트린 바리다스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그대로 나를 안아 들었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옆에 있는 나와 그의 침실이었다.
아니, 대낮부터?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바리다스는 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작게 미소 지었다.
장담컨대, 지금 내 얼굴은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바리다스는 내게 이불을 덮어준 뒤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내 이마에 입을 맞춘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별로 못 주무셨잖아요, 더 자요.”
…아니, 별로 못 자긴 했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상한 생각 한 거, 들키진 않았겠지?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자 다행히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의 말대로 잠을 못 자 피곤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침대에 몸을 뉜 순간 바리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대하시는 건, 오늘 밤에.”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바리다스가 밖으로 나갔고 나는 이불 속으로 붉어진 얼굴을 묻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 * *
오늘 입은 옷은 조금 수수한 느낌이 드는 푸른색의 원피스와 흰 카디건이었다.
드레스를 안 입는 것도 오랜만이네.
평소보다 가벼운 치마가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는 묶어 드릴까요?”
“응, 그렇게 해줘.”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로나는 머리를 아래로 땋아 준 뒤 흰색 모자를 씌워 주었다.
그리고 원피스와 같은 색상의 구두를 신는 것으로 나는 준비를 마쳤다.
“고생했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쌍둥이를 제외한 모두가 도착해 있었다.
렌은 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고 토마는 드미트르 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자스민을 안고 있는 바리다스도 오늘은 연미복이나 정장이 아닌 흰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심지어 앞쪽의 단추를 두 개나 풀고 있어, 평소의 깔끔한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느껴졌다.
그리고 단추 풀지 마!
풀린 두 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형수님, 예뻐요!”
그때 바리다스의 품에서 뛰어내린 자스민이 내게 달려왔다.
자스민은 레이스가 달린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지를 마지막으로 입어본 게 언제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빙의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근데, 자스민. 나 지금 너희 오빠 단추 채워줘야 해.
“오늘도 귀엽구나, 민.”
자스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빠르게 대답을 마친 나는 빠르게 달려갔다.
“잘 주무셨어요?”
그러자 바리다스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아니, 이 사람이? 그렇게 가 버리고 잘 잤냐는 말이 나와?
물론 잘 잤지만!
옷은 이게 또 뭐야, 애들 보는데. 누가 이렇게 입으래!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은 나는 풀려있는 단추를 노려볼 뿐이었다.
“…더 풀까요?”
하지만 바리다스는 그런 내 시선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뇨!!!”
깜짝 놀란 나는 바로 소리쳤고 커다란 목소리에 정원에 나와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봤고 바리다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대기하고 있던 시종 중 한 명이 질문했고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얼굴을 붉혔다.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쥐구멍이요.
지금 내게는 그 무엇보다 쥐구멍이 간절했다.
그때, 킥킥거리던 바리다스가 웃음을 멈추고 내 앞에 섰다.
“잠글까요?”
알면서 물어보는 그가 오늘따라 더 얄미웠다.
살짝 바리다스를 노려본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바리다스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셔츠 위로 올려놓았다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그 말, 진짜 위험한 거 알아요?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아니, 제가 다 풀면 어떡하려고요?”
“안 그러실 거 아는데.”
바리다스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옷깃과 단추를 붙잡았다.
남의 단추를 채워주는 것 처음도 아닌데 왜 이리 손이 떨리는지.
게다가 바리다스의 단춧구멍이 작은 탓에, 더 힘들었다.
“낙엽 다 지겠어요.”
장난스러운 말에 괜히 오기가 생겼다.
“기다려 봐요.”
그렇게 나는 오랜 사투 끝에 그의 단추를 모두 채울 수 있었다.
내가 강하게 잡은 탓에 셔츠가 좀 구겨지긴 했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
“다 했어요!”
만족스럽게 웃으며 바리다스를 올려다보자,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요.”
바리다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내게 살짝 입 맞추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다행히 아이들은 보지 못한 듯했으나 사용인들은 애써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또 민망함은 나만의 몫이었다.
“이, 이건 왜?”
그의 입술에 묻은 내 립스틱 때문에 당황스러워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어 입술을 닦아주자 고분고분하게 허리를 숙이며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칭찬 도장, 황제 폐하께서 당신에게 배웠다고 하던데.”
아니, 그건 내가 가르쳐 준 게 맞기는 한데. 이렇게 알려 주지는 않았다고!
그리고 누가 도장을 입술로 찍어!
내가 바리다스에게 무어라 따지려 한 그 순간, 덜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레몬과 그린이 달려 나왔다.
“형수님, 오빠! 나 어때?”
밑단에 레이스가 달린 화사한 노란색 원피스에 앞치마를 두른 레몬이 신이 나 달려왔고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때문에 다 기다리고 계시는 건 안 보여?”
“헉, 우리 늦었어?”
“그래, 너 때문에 나도.”
딱 맞춰 등장한 두 아이 때문에 나는 뭐라고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한숨을 내쉰 나는 그들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괜찮아, 그렇게 안 늦었어.”
“그래, 이제 출발하자꾸나.”
능청스럽게 두 아이의 손을 잡아주는 바리다스를 한번 쏘아본 뒤, 출발한다는 말에 내게 달려온 자스민을 안아주었다.
오늘은 강아지들도 함께 가기에, 세 대의 마차를 준비했다.
드미트르씨와 토마, 그린이 먼저 마차에 올랐고 뒤이어 레몬과 렌, 강아지들이 마차에 탔다.
그리고 마지막 마차에는 나와 바리다스 자스민이 마차에 올랐다.
내게서 자스민을 받아 든 그는 그녀를 먼저 앉혀준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내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마차에 올라탔다.
근데 왜, 앞에 안 앉고 내 옆에 앉는 거지.
마차가 큰 편이었기에 좁지는 않았지만 혼자 앉아있는 자스민 때문에 눈치가 보였다.
“혼자 앉아도 괜찮아?”
내 질문에 자스민은 뭘 그런 걸 묻냐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혼부분데, 내가 이해해 줘야지.”
너 레몬한테 배웠지. 아니, 입맛이 비슷하면 성격도 닮아가나?
“고맙구나, 민.”
“응, 알아!”
뭐가 고마운데!
바리다스를 노려보자 그는 미소지으며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내가 자스민을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열었다.
“난 못 봤어.”
“…….”
민망함에 고개가 저절로 내려갔다.
“리리안 언니가 이런 건 모른 척해 주는 거랬어.”
“잘 배웠구나.”
“나도 안다니까.”
뿌듯하게 말하는 자스민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바리다스는 날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나도 이젠 몰라.
그렇게 나는 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바리다스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차에서 내린 자스민은 바로 레몬에게 달려가 입을 열었다.
“언니들이 가르쳐 준 대로 했어!”
“잘했어!!”
둘의 모습에 나는 얼굴을 붉혔고 그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말을 타고 먼저 도착해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바리다스 앞에 멈춰서 경례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호위하도록.”
그의 말에 기사들은 순식간에 흩어졌고 그 자리에는 커다란 바구니만이 남아있었다.
기사들한테 들게 해도 되는… 건가?
조금 의문이 들긴 했으나 바리다스는 별생각이 없는 것인지 바구니 안에서 돗자리를 꺼내 피기 시작했다.
“앉아요.”
그리고 그 위에 앉은 바리다스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킨 순간 토마와 렌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형님, 저랑 대련하죠.”
“형수님, 저랑 산책해요.”
그리고 렌의 말에 옆에 있던 자스민도 거들었다.
“나도 갈래, 나도!”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지금 벗어나지 않으면 내 얼굴도 단풍처럼 붉게 물들 것 같았다.
빠르게 바리다스의 곁에서 벗어난 나는 한 손에는 자스민의 손을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는 렌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혹여나 바리다스에게 붙잡히기라도 할까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모습에 바리다스는 웃음을 터트렸고 토마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두 분 싸우신 건 아니죠?”
토마의 질문에 바리다스는 미소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설마, 그럴 리가.”
싸웠으면, 여기서 너랑 이러고 못 있지.
바리다스의 그런 생각을 모르는 토마는 웃으며 그에게 목검을 내밀 뿐이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그러렴.”
그렇게 둘은 토마가 지칠 때까지 검을 주고받았고 온몸에 땀방울이 맺힌 토마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답답한 것인지 셔츠의 단추를 몇 개쯤 풀고 자신의 형을 바라봤다.
바리다스 또한 땀이 좀 흐르고 있긴 했으나 자신에 비해 멀쩡한 모습이었다.
“형님은 덥지 않습니까?”
더울 텐데도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채 셔츠를 풀지 않는 그의 모습에 토마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바리다스는 제 위치를 잘 유지하고 있는 단추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풀어 줄 사람이 따로 있어서.”
의미심장한 말에 토마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