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가을 나들이
나는 멍하니 그의 반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막 사용해도 돼요?”
“안 될 것도 없죠.”
당당한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고 나는 팔을 들어 그를 밀어내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라고 있는 가보가 아닐 텐데요.”
하지만 바리다스는 굴하지 않았다.
밀어내는 손을 붙잡고 잔디 위에 걸터앉아 버린 그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그러겠죠.”
요즘 들어 왜 이리 뻔뻔해졌는지.
한숨을 내쉰 나는 팔을 벌렸다.
어차피 얼마 안 지나 끌어안을 텐데, 차라리 허락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리 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일으킨 바리다스는 옆에 앉아 날 끌어안았다.
요즘 들어 왜 이러는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틀어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놀려줄까 고민하던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붙잡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바리다스가 눈을 감았다.
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안 해줄 건데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눈을 뜬 순간, 나는 그에게 입을 맞췄다.
“거짓말이었어요.”
살짝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떼자 웃고 있는 바리다스의 얼굴이 보였다.
내 나름대로 복수를 한 것이지만 오히려 그 좋은 일만 해준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묻은 내 립스틱이 신경 쓰였다.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문질렀다. 이내 티가 안 날 정도로 연해진 것을 확인한 내가 손을 떼어낸 순간,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화장하지 마요. 안 해도 예쁘고, 립스틱은…”
처음으로 바리다스가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의 귓가는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내가 시선을 따라가자,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너무 써요.”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커피도 그러더니, 쓴 거 진짜 못 먹네.
“고려해볼게요.”
그때 내 머릿속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시선을 돌려 아이들과 드미트르 씨가 있는 곳을 바라보자, 사이좋게 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단풍 구경하면서 쉬라고 모셔 온 건데 이렇게 또 드미트르 씨에게 아이들을 맡긴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드미트르 씨에게 다가갔다.
“애들은 이제 제가 놀아줄 테니, 편하게 쉬고 계세요.”
내 말에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이 되었으나, 드미트르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 이상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아니에요, 저희끼리 놀 수 있어요.”
“맞아요, 기사분들도 계시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의젓한 토마와 렌의 말에 드미트르 씨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드미트르 씨는 천사가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에게서 어떻게 저리 빛이 난단 말인가.
하지만 그에게 계속 아이들을 맡길 순 없었다.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기에 그가 편히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지 마시고 쉬고 계세요.”
하지만 드미트르 씨는 완강했다.
“정말 괜찮으니, 두 분은 데이트라도 하고 오시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사양하지 않지.”
드미트르 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바리다스는 나를 안아 들었다.
아니, 그걸 이렇게 바로 알겠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예의상 거절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버둥거리며 드미트르 씨를 바라봤다.
“아니 저도 같이…”
하지만 바리다스는 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달리기 시작했기에 아마도 내 말은 드미트르 씨에게 닿지 못했을 것이다.
* * *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드미트르는 아이들을 돌아봤다.
그러자 조금 시무룩해진 표정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 힘들면 쉬어도 괜찮아요.”
레몬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했다.
“네, 저희끼리 놀고 있을게요.”
그린도 의젓하게 말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스민은 아직 어렸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스민은 드미트르의 옷깃을 잡았다.
“난 할아버지랑 놀고 싶은데.”
아이들 또한 그 말에 속으로 동의했지만, 차마 겉으로는 말하지는 못했다.
귀여운 자스민의 모습에 드미트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가씨와 도련님들께서 이렇게 의젓하신데, 힘들 리 있겠습니까.”
이 말은 진심이었다.
드미트르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가 지내던 작은 마을에는 보육원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기부도 자주 하는 편이었고 시간이 있는 날에는 보육원에 방문해 아이들과 놀아주고는 했다.
그랬기에 드미트르는 차일드 가의 아이들 정도면 매우 얌전한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련님을 닮았지.
바리다스를 떠올리며 미소지은 드미트르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정말 많이 닮았구나.
아주 잠깐이지만 드미트르의 눈이 슬퍼졌다.
“할아버지!”
하지만 그의 생각은 오래갈 수 없었다.
렌과 자스민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예.”
그의 대답에 조르르 달려온 레몬은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처럼 손을 포개고 있었다.
“이거 뭔지 알아요?”
두 아이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손바닥을 펼쳤고 그 위에는 검은색의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잡은 것은 바로 사슴벌레였다.
“뭐야 이게!”
사슴벌레를 본 그린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고, 렌 또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표정을 굳혔다.
그에 비해 벌레에 익숙한 토마는 눈을 크게 뜨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건 나도 처음 보는데?”
꽤나 멋진 사슴벌레의 외형이 토마의 마음에도 드는 듯했다.
“그치, 완전 신기하게 생겼어!”
토마와 두 아이는 흥미롭게 사슴벌레에 생김새를 관찰하는 듯했으나, 렌과 그린은 그에게 시선조차 두지 못했다.
레몬에게서 사슴벌레를 받아 든 드미트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슴벌레라고 합니다.”
사슴이라는 말에 레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슴? 사슴은 동물 아니에요?”
“사슴의 뿔과 생김새가 비슷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레몬은 사슴의 그림을 본 적이 있기에,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그에 비에 자스민은 사슴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사슴이 이렇게 생겼어?”
자스민이 입을 열었고 레몬은 고개를 저으며 팔을 벌렸다.
“아니, 사슴은 이렇게 크대!”
그러자 자스민의 눈이 반짝거렸다.
“언니는 직접 본 적 있어?”
“동물 사전에 나와 있어, 집 가면 보여줄게.”
“웅!”
그때 토마가 드미트르에게서 사슴벌레를 받아가며 입을 열었다.
“제가 놓아주고 올게요.”
토마는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는 렌과 그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그를 따라 레몬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쪽에 있었을 거야.”
두 사람이 사슴벌레와 함께 사라진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린과 렌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해를 끼치는 생물은 아닙니다.”
드미트르의 말에도 두 사람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냥 사슴벌레가 무섭거나,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리리가 그린에게 다가와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린이 리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리리는 그의 발치에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또 다른 사슴벌레였다.
그 모습에 그린은 빠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리리는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사슴벌레를 물고 달려왔다.
그때 사슴벌레를 놓아주고 돌아온 레몬이 도망치는 그린을 대신해 리리에게서 사슴벌레를 받아들었다.
“잘했어.”
그제야 리리에게 다가온 그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잡아 오면 안 된다고 해야지.”
하지만 레몬은 고개를 저으며 리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리리는 기분 좋은 듯 레몬에게 애교를 부렸다.
“리리 나름대로 선물일 텐데, 받아 줘야지.”
그린은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표정을 굳힌 그린은 무릎을 굽혀 리리에게 시선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었다.
“몰라줘서 미안해.”
그런 둘의 귀여운 모습에 드미트르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착한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라라가 목줄을 물고 드미트르에게 다가왔다.
산책을 시켜달라는 것처럼 그의 앞에 목줄을 내려놓은 라라는 그의 앞에 앉았다.
“멍!”
그런 라라의 모습에 드미트르가 몸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 렌이 선수를 쳤다.
라라의 목줄을 들고 일어난 렌은 드미트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산책은 제가 시킬 테니, 쉬고 계세요.”
렌의 말에 드미트르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인데, 뭘요.”
그때 토마도 루이를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
둘을 따라 한 명의 기사가 움직였고 레몬과 그린은 근처를 뛰어다니며 리리와 놀기 시작했다.
그들에 비해 아직 어린 자스민은 드미트르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드미트르는 뛰어노는 두 아이를 바라보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쿨럭이던 그가 손수건을 바라보자 피가 묻어나왔다.
방금까지 분명 괜찮았는데, 심장이 욱신거리고 조여 오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구나. 드미트르는 시선을 옮겨 떨어지고 있는 낙엽을 바라봤다.
이번 겨울을 넘길 수 있을런지.
그 순간, 기침 소리에 깨어난 것인지 눈을 뜬 자스민이 드미트르를 바라봤다.
“할아버지 어디 아파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드미트르는 외투를 벗어 자스민에게 덮어 주었다.
“아닙니다, 더 주무세요.”
드미트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자스민은 눈을 감았다.
다시 잠든 자스민을 바라보는 드미트르의 눈빛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