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겨울
이른 아침. 나는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으음.”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바리다스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가 깨지 않게, 커튼을 쳐 준 뒤 조금 떨어진 창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낙엽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남아있는 나무가 보였다.
이제 진짜 겨울이구나.
냉기가 담긴 쌀쌀한 바람이 느껴졌다.
창틀에 기댄 채 창밖을 내다보던 그때, 언제 온 것인지 바리다스가 숄을 덮어 주었다.
“날이 춥습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하지만 바리다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창문을 반쯤 닫아 버렸다.
“찬바람, 너무 쐬지 마요.”
엄마 같은 잔소리에, 웃음이 지어졌다.
“알았어요.”
내가 그의 말에 대답한 순간이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을 내다보자 다섯 아이가 함께 강아지를 산책시켜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이좋게 손을 잡고 웃으며 정원을 뛰어다니는 그들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마침 그린이 시선을 위로 올렸고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형님, 형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린은 우리에게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소리쳤고 그의 외침에 다른 아이들도 우리를 돌아보았다.
“형수님!!!”
“형님!”
“오라버니!!”
우리를 부른 아이들은 크게 소리치며 인사했고 나와 바리다스는 손을 흔드는 것으로 그들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마친, 아이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아이들이 사라진 자리를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때 바리다스가 창문을 닫아버리고 나를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오늘은 저녁때나 들어올 것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날이구나.
수도의 귀족 중 백작 이상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매달 둘째 주 목요일마다 정기적으로 황실에 모여 회의를 했다.
그런데 저녁때나 돌아온다니, 아무래도 이번 회의는 꽤나 중요한 문제로 논의를 하는 듯했다.
“알겠어요.”
내 대답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들어 내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긴 입맞춤은 내가 숨이 달려 그를 밀어낼 때까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한참을 시달려 얼굴이 붉어진 내가 자신을 노려보자 웃음을 터트린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들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그의 말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이렇게 굴어 놓고 기다리라는 말을 내가 들을 거 같아?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지만 자존심 상 곧이곧대로 알겠다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상황 보고요.”
그 말에 바리다스는 내 시선을 따라와 눈을 마주했다.
“올 때, 맥주랑 치킨 사 올게요.”
!
맥주와 치킨이라면 자는 걸 깨워도 괜찮았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바리다스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빨리 와요, 자기.”
내 행동에 바리다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맥주랑 치킨이면 자존심 값으로 나쁘지 않았으니까.
이게 얼마만의 치맥이야.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네, 빨리 올게요.”
그렇게 준비를 마친 바리다스를 배웅해준 뒤, 나는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며칠 전부터 크림슨에게 장부를 쓰는 법과 재정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 밖에도 델아트와 차일드 가에 대한 역사들과 저택 관리 등… 여러 가지를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세계의 지식수준이 내가 가진 것보다 낮다는 것이었다.
마법과 신이 존재하기 때문인지, 이곳의 의료기술과 과학기술은 크게 발전하지 않았고 수학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 내가 장부를 관리하겠다 말했을 때, 크림슨은 내게 덧셈과 뺄셈을 가르치려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수학을 말이다.
이 세계에서 수학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그에게 덧셈과 뺄셈은 물론 나누기와 곱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 그는 감탄까지 했다.
애초에 수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지도 않은 데다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또한 적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지구의 공대생이 이 세계에 오게 된다면 세기의 천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공대생도 필요 없어. 공부 잘하는 고삼 선에서 정리 가능해.
나는 문과여서 다 까먹었지만, 너희들은 미적분이나 상대성이론 설명할 수 있을 거 아냐.
그거 여기서 설명하고 증명하면 너희가 아이슈타인이고 피타고라스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위에 놓인 장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내가 크림슨이 낸 난이도 높은 수학 문제들을 풀고 얻어낸 것이었다.
정말 끔찍한 수준의 문제들이었다.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려 2+2×2였으니 말이다.
두뇌를 풀가동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답을 8이라 쓸 뻔했다.
아무튼 내가 힘겹게 손에 넣은 장부를 피려고 한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드미트르 씨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크림슨이 장부를 작성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는데 왜 드미트르 씨가 온 거지?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내 인사에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한 드미트르 씨는 입을 열었다.
“집사님께서 급한 일정이 있어, 오늘은 제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와, 드미트르 씨 장부도 볼 줄 아시는구나.
이제는 슬슬 그의 능력이 무서워졌다.
성력과 마나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고 검술도 뛰어나며 지식도 많고 애들도 잘 돌보는데 수학까지 잘한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드미트르 씨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가르쳐 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정말 진심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마님을 가르쳐 드릴 수 있다니 오히려 영광입니다.”
아니에요… 제가 더 영광이죠. 진심으로요.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장부를 들었다.
그 순간, 툭 소리를 내며 장부 안에서 은색의 열쇠가 떨어졌다.
이건 뭐지?
크림슨에게 열쇠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쪽 창고의 열쇠군요.”
“서쪽 창고요?”
“네, 가문 사람들의 초상화와 장물들을 모아둔 곳일 겁니다.”
초상화라는 말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바리다스의 어린 시절 초상화도 있지 않을까?
“같이 가 주시면 안 되나요?”
내 질문에 크림슨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의 긍정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그렇게 우리는 장부를 읽는 것을 미루고 서쪽 창고로 향했다.
창고는 조금 동떨어진 장소에 있었는데 왜인지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림슨에게 받은 열쇠를 넣고 돌리자 낡은 문이 삐걱거리다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무래도 창고는 리모델링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낡은 외관과는 다르게 안쪽은 상당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도 공작가 저택의 일부라는 건가.
나는 먼지 하나 없는 창고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벽면에는 초상화들과 여러 가지 그림들이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도자기나 대리석 석상과 같은 여러 장식품이 놓여 있었다.
바리다스의 초상화를 찾기 위해 벽면을 둘러보고 있던 나는 하나의 초상화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초상화에는 두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쌍둥이로 보이는 둘은 꼭 닮아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의 눈은 붉은색이 아니었다.
차일드 가 사람들의 눈은 모두 붉은색 아니었나?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벽면에 걸린 초상화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초상화 중, 붉은 눈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단 세 명뿐이었다.
차일드 가의 모두가 붉은색의 눈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았다.
나중에 크림슨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시선을 옮겼다.
초상화들은 이게 전부인가?
주위를 둘러보던 내 눈에 흰 천에 덮여 반쯤 모습을 드러낸 액자들이 들어왔다.
그곳으로 향한 나는 고민 없이 천을 걷어냈다.
내 예상대로 초상화들을 모아둔 것이 맞는지, 붉은 눈을 가진 어린아이가 보였다.
그리고 다음 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여기에는 가주들의 어린 시절을 담은 초상화를 모아둔 것 같았다.
그럼, 바리다스의 초상화도 있지 않을까?
눈을 반짝인 나는 초상화들을 넘기며 바리다스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초상화들을 보며 확신하게 되었다.
차일드 가라고 해서 모두가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른 가문 사람의 어린 시절을 그린 초상화를 차일드 가에서 보관하고 있을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초상화를 빠르게 넘기며 바리다스를 찾던 그때.
나는 한 소년의 초상화를 보고 멈추고 말았다.
갈색 머리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그려져 있는 초상화였는데 그림 속 소년이 드미트르 씨를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닮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초상화의 소년은 드미트르 씨가 확실했다.
그런데, 드미트르 씨의 초상화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무언가 보면 안 되는 것을 보고 만 것 같았다.
나는 차마 드미트르 씨에게 물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초상화를 바라봤다.
나 이거 어떻게 해야 해?
바리다스는 분명 드미트르 씨를 내게 어머니의 먼 친척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드미트르씨의 초상화가 이 곳에 있는 이상 답은 하나뿐 아닌가.
그는 차일드 가의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비밀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바리다스의 어린 시절을 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일단, 생각을 좀 정리하고 둘에게 이야기해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초상화를 넘기려 하는 순간, 나는 손을 삐끗하고 말았다.
타다다닥!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던 초상화들이 도미노처럼 넘어지고 말았고 그 때문에 다른 곳을 둘러보고 있던 드미트르 씨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빠르게 그의 초상화를 가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언제나 평온을 유지하던 드미트르씨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