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겨울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저 사진 속 아이는 누가 봐도 드미트르 씨였다. 그와 한 번 마주한, 리리안과 레이안도 그림 속 사람이 드미트르 씨인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닮아 있었으니까.
나는 재빨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앗, 실수로 넘어뜨려 버렸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거짓말을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옮겨 드미트르 씨의 눈치를 봤지만 그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아마 그도 내가 초상화 속 인물을 알아봤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못했고 창고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까?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잘 넘어갈 수 있을까?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들로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리다스와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길 원했다. 그리고 드미트르 씨는 그들에게 상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봐온 드미트르 씨는 그랬다. 가문과 바리다스와 아이들에게 해를 입힐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와 아이들을 아껴주고 돌봐주던 말과 행동이 거짓일 리도 없었다.
그러니 나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드미트르 씨를 믿어 보기로 했다.
시선을 돌리자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드미트르 씨의 모습이 보였다.
“저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요.”
내 말에 드미트르 씨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전부터 그와 바리다스의 분위기가 닮았다는 생각은 종종 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얼굴도 조금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제가 끼어들 수 없는 두 사람의 일이에요.”
바리다스에게 무언갈 숨겨야 한다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함부로 말할 수 있거나 쉽게 끼어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이 일로 드미트르 씨와 바리다스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예,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미트르 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창고 밖으로 나왔다. 더 있다가는 생각만 복잡해질 것 같아서였다.
근데, 이렇게 되면 드미트르 씨가 촌수로 나보다 더 높은 거 아닌가…? 그런데 나 지금까지 씨라는 호칭을 사용해서 불렀잖아.
그러면 앞으로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 * *
피오라가 떠난 방 안. 드미트르는 누군가의 초상화를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창밖으로 단풍이 모두 떨어진,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그날에는 당신이 좋아하던 낙엽이 가득했었는데 이제는 당신도, 낙엽도 남지 않았습니다.’
드미트르는 슬픈 표정으로,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벌써 삼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지만, 그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 * *
녹음이 짙은 여름날이었다. 정말 지독할 정도로 맑고 화창했던, 그런 날.
일곱 살의 드미트르는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마주했다. 그는 드미트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매서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이게 내 아이라고?”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와 비웃음, 드미트르는 아직도 그때의 아버지가 자신을 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드미트르는 그의 아버지가 하룻밤 불장난으로 얻게 된 자식이었다. 이미 아내와 자식이 있던 공작은 그런 드미트르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
붉은 눈도 없는 데다가, 출신도 불분명한 평민의 자식이라니.
“예, 공작님의 자식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모두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차일드 가의 문양이 그려진 반지를 꺼내어 보였다.
하지만 공작은 그 정도 증거로는 드미트르가 자신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결국 그는 신전으로 끌려가 피를 내어 친자 감별까지 받은 뒤에야 공작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드미트르의 어머니는 이 일을 함구하고 양육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많은 돈을 받아 갔다. 홀로 남겨진 드미트르는 자연히 차일드 가의 일원이 되었다.
물론, 이 중에서 드미트르의 의사가 반영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드미트르의 예상과는 달리, 공작 저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하인들도 그를 여느 귀족 도련님처럼 예의 바르게 대했고, 그를 못살게 굴거나 차별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공작부인 덕분이었다.
그녀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공작부인은 드미트르를 가엾게 여겼고 그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녀의 아들은 이미 직계 장자로서 차기 공작으로 인정받은 상태였으니 드미트르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은 것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베풀 수 있는 친절이었다.
공작부인의 배려로 인해 그녀의 아들 또한 드미트르를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친형제처럼 대해 주었다. 그가 바로 바리다스의 아버지이자, 전대 공작인 벤티스였다.
드미트르는 처음으로 벤티스를 봤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는 달리, 벤티스는 누가 봐도 공작을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안녕, 네가 내 동생이구나. 앞으로 잘 부탁해!”
첫 만남에, 벤티스는 자신감에 찬 두 눈으로 드미트르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드미트르는 그의 모든 면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면서도 벤티스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는 주제를 아는 사람이었다. 공작부인과 그 아들이 아무리 자신을 가족처럼 대우해 준다고 해서, 자신이 진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그것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벽이었기에 드미트르는 현실에 순응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형제가 되었다.
벤티스 또한 드미트르와 마찬가지로 검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물론 드미트르에게 미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둘이 대련을 하게 된다면 이기는 것은 언제나 벤티스였다.
드미트르는 자신의 위치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실수로라도 벤티스를 이기는 날에,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그래서 그는 실력을 숨기고 언제나 적당히 검을 휘둘렀다.
실력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걸 배워도 드미트르는 언제나 벤티스보다 못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그의 노력 덕분에 두 사람은 사이좋은 형제로 지낼 수 있었다.
드미트르가 공작가에서 지내게 된 지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우연히 형의 약혼자와 마주쳤다.
그동안 공작가 사람들을 제외하면 드미트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외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키게 된 것이다.
“안녕, 네가 벤티스의 동생이구나, 나는 테리스라고 해.”
그녀의 이름은 테리스 헬리아덴, 후에 차일드 공작부인이자 바리다스의 어머니가 되는 여자였다.
테리스와 처음 마주한 순간 드미트르는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형의 약혼자에게 사생아인 자신이 들켜 버렸으니 혼이 날 것이라는 생각과 테리스가 정말로 아름답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테리스는 이미 벤티스에게 그의 존재를 들은 상태였다.
그녀는 벤티스와 마찬가지로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환한 미소 그리고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하는 스스럼 없는 태도, 순진한 아홉 살 소년은 곧바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만.
테리스는 그의 존재를 비밀로 해 주겠다 약속했고 그렇게 세 사람은 사이좋은 형제이자 친구가 되어갔다.
그들 모두, 어리고 순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다정한 이복형과 아름다운 친구, 상냥한 계모까지, 보수적인 귀족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드미트르의 삶은 그가 사생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락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삼 년째가 되었다.
그동안 세 사람 사이에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얌전할 수밖에 없었던 드미트르와 다르게 벤티스와 테리스는 늘 사고를 치고 다녔고 자주 다투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드미트르는 두 사람이 저지른 사고를 들키기 전에 정리하거나, 싸움을 중재하는 역할이 되어 있었다.
드미트르는 테리스가 벤티스와 싸운 날에는 정원의 가장 큰 나무 아래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랬기에 그는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었다.
테리스가 벤티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녀는 벤티스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드미트르 역시 테리스를 좋아했으나 애초에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마음임을 알았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려 노력했다.
테리스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드미트르에게 언제나, 꽃보다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름답다는 이유로 벤티스의 곁에 있는 화초가 아니라 기댈 수 있는 그의 그늘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 테리스는 특히 단풍나무를 좋아했다.
그녀는 드미트르에게 단풍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늘의 노을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테리스가 단풍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풍의 붉은색이 벤티스의 눈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드미트르는 단풍을 싫어할 수 없었다.
단풍으로 가득 찬 정원을 볼 때의 테리스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으니까.
이대로라면 테리스와 벤티스는 결혼하게 될 것이었고 그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테리스는 분명 행복해질 것이었다.
자신의 형과 그녀는 너무나도 잘 어울렸고 그는 두 사람 모두를 사랑했다.
그러니까,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드미트르는 만족할 수 있었다.
정말로 어리고 순진했기에 가능했던, 생각이었다.
다시 또 시간은 흘러갔다.
드미트르가 열일곱이 되던, 그가 공작가에 오게 된 지 십 년째가 되던 날.
공작의 다른 사생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