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겨울
사생아들이 그렇게 몰려온 이유는 다름 아닌 드미트르의 존재 때문이었다.
공작가에서 붉은 눈이 아닌 사생아를 받아줬다는 소문이 난 것이었다.
공작가의 사용인들과 공작가를 오갔던 귀족들을 생각하면 십 년 동안이나 비밀을 유지한 게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 소문으로 인해,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공작가에는 자신이 공작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문제는 그들 중, 진짜 사생아 또한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붉은 눈을 가진 사생아를 마주했을 때, 공작부인은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기 위해 사용된 천문학적인 비용과, 가짜에 대한 처벌.
수많은 가짜 사생아들 사이에서 공작부인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고 그녀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없애야 한다 생각했다.
그래, 드미트르 말이다. 저 사생아들이 당당하게 공작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드미트르의 존재 때문이었으니까.
공작부인은 드미트르를 애틋하게 여겼지만 다른 뾰족한 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드미트르를 신전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신전에 들어가게 된다면 외부의 모든 것들과 차단되고 귀족의 경우 성씨를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며 가지고 있던 이름 또한 바뀌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드미트르로 살 수 없다는 말이었다.
선택권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고 모두가 잠든 새벽, 드미트르는 도망치듯 신전으로 떠나게 되었다. 아무도 그를 배웅하지 않았으며 그도 마지막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마차 안, 어두운 길을 바라보며 드미트르는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의 이름은 더 이상 드미트르가 아니게 되었고 수년을 써 온 차일드라는 성씨 또한 사라졌다.
아니, 애초에 차일드라는 성이 그의 것이었던 적이 있기는 할까.
뭐, 이제는 상관없었다.
강제로 오게 된 것임에도 드미트르는 신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신관의 기본인 금욕에는 익숙했으며, 성서를 외우거나 새벽 기도와 예배 또한 어렵지 않게 해내었다.
이 년의 수습 기간을 거치고 드미트르는 성기사라는 직위와 함께 남들보다 빠르게 정식 신관이 되었다.
신전에서 그의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주었던 것은 바로 검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뛰어난 잠재력과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스스로를 억압해오던 것이기에 자유로워진 드미트르의 실력은 빠르게 늘어갔다.
그는 신전의 성기사 중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력 또한 나쁘지 않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신전에서는 고위 신관만 사용할 수 있는 성씨와 함께 더 높은 직위를 내리려 했으나, 드미트르는 거부했다.
직위를 받게 된다면 정말로 차일드 가에 돌아갈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테리스와 벤티스,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너무도 그리웠지만 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
드미트르는 계속해서 외부와 단절한 채, 신관으로서 살아갔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드미트르는 성력과 마나 모두를 다룰 수 있는 기사가 되었다.
드미트르와 같은 능력을 가진 기사는 역사에 세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그는 기사단장이 되기에도 충분했으며 더 나아가 대사제나 교황까지 노려볼 수 있었다. 드미트르 본인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수익 대부분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것으로 사용했으며 휴일에는 신전 근처의 고아원으로 봉사를 나가거나, 기도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권력도 지위도 돈도, 그 무엇도 드미트르를 붙잡지 못했다.
그러던 그는 몇 년 만에 신전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크레센트 제국의 서쪽의 국경 지역에서 폭주한 레드 드래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드래곤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사상자가 늘어났다.
황제 또한 서쪽으로 기사단을 파견했으나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인 드래곤에게 평범한 검이 들 리 만무했고 두 개의 기사단을 잃은 황제는 드래곤을 토벌하기 위해 각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를 서쪽으로 보내라 명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차일드 가의 그런 기사는 벤티스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벤티스는 가주 후계였고 공작부인은 생사가 오가는 전쟁에 벤티스를 보낼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드미트르를 찾아갔다.
각 가문에서 한 명씩 서쪽으로 향해야 하는데, 테리스가 임신을 해 벤티스는 참전할 수 없으니 그를 대신해 드래곤을 토벌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번에 드래곤을 토벌하고 무사히 돌아온다면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 주겠다고 말하며.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는데도 드미트르에게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드미트르는 벤티스와 테리스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신관복을 벗고 차일드 가의 기사가 되어 서쪽으로 향했다.
신관은 살육을 저지를 수 없는 존재였다.
만약 살육을 저지르게 된다면, 모든 성력을 빼앗기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
드미트르는 지금까지 쌓아온 신관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아시드 왕국의 함정이었다. 서쪽에 도착한 크레센트의 군단과 드미트르는 마흔 시간 만에 드래곤을 물리쳤지만, 이후 매복해 있던 아시드 왕국의 병사들이 그들을 포위한 것이다.
지쳐 있던 크레센트의 기사와 병사들은 순식간에 정리당했고 어느새, 드미트르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아시드 왕국에서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바로 드미트르의 존재였다.
소드 마스터인 그의 신체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었으며 상처를 입는다 하더라도 성력으로 바로 치료할 수 있었다.
무력만으로도 한 나라의 군대와 비슷한 수준을 지닌 그가 체력은 닳지 않고 독까지 통하지 않으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막막했을 것이었다.
드미트르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아시드 왕국의 병사들은 모두 쓰러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미트르는 모든 병사를 무찌르고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드미트르가 병사들을 몰살하자, 아시드 왕국은 전쟁을 선포했다.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미트르의 몸에서는 성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관의 몸으로 살육을 저지른 대가였다.
드미트르는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받아들이려 했으나, 더 큰 문제는 뒤에 찾아왔다.
성력이 사라짐으로써 그의 몸은 치유력을 잃었고 마나 과남용에 대한 부작용이 생긴 것이었다.
거의 백 시간 동안 마나를 사용한 전투를 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드미트르는 더 이상 마나를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는 계속 전쟁터에 남았다. 평범한 기사가 되어 전쟁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렇게 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눈이 쏟아지던 겨울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전쟁은 끝이 났고 드미트르는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황제에게까지 불려가, 공을 인정받게 된 그는 립튼이라는 성과 함께 백작의 지위, 훈장을 수여 받게 되었다.
그리고 드미트르는 황제에게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황제는 그의 부탁을 들어 주었고 그렇게 드미트르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마침내 드미트르는 벤티스와 테리스가 있는 델아트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길 바라며.
그러나 그가 델아트에 도착해 가장 먼저 접한 것은 테리스의 사망 소식이었다.
그보다 허무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언제나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오던 드미트르는 처음으로 절망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드미트르는 그 말을 애써 부정하며, 벤티스를 찾아갔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형은 그의 생각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상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는 아버지와 같은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어서 와라, 내 동생.”
그렇게 말하는 벤티스는 분명 웃고 있었음에도 눈은 차갑게 얼어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정말로 테리스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 드미트르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드미트르가 기다리고 있던 형은 이제 없었으니까.
“…누님은 어디 있습니까?”
그의 질문에 벤티스는 혀를 낮게 찼다. 그런 걸 왜 묻냐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불치병을 앓다가, 몇 주 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열었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이다.
“그런 이야기는 됐고, 오랜만에 식사나 함께 하자꾸나.”
대화의 주제를 바꾸며 발걸음을 옮기는 벤티스는 분명 눈앞에 있었음에도 신전에 있었을 때보다 멀게 느껴졌다.
테리스도, 기억하던 형도 이제 없었다. 드미트르는 도망치듯 공작가에서 뛰쳐나왔다.
두 사람을 위해 헌신했던 칠 년이 부정당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장 슬픈 것은 테리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벤티스를 원망하기에는 자신 또한 다를 게 없다고 느껴졌다. 그 또한, 테리스를 두고 떠나지 않았는가. 어떤 이유가 있었던지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눈이 쌓이기 시작한 나뭇가지를 보며 드미트르는 눈물을 흘렸다.
전쟁 영웅이 다 무슨 필요인가, 정작 소중했던 사람은 한 명도 지키지 못했는데.
삶의 의미를 잃은 드미트르는 훈장과 직위, 모든 것을 반납하고 시골에 작은 성을 받았다.
그렇게 혼자 조용히 살다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몇 십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들의 수신인은 모두 테리스였다. 드미트르가 떠난 뒤, 테리스가 신전에 보낸 편지들이 뒤늦게 전해진 것이었다.
계절의 변화가 없는 신전에 머무는 그를 위한 말린 꽃들과 함께. 테리스는 답장도 오지 않는 편지를 계속해서 써 보냈다.
편지를 펼치자, 유려하고 우아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한 글자, 한 문장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드미트르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 나갔고, 어느새 편지는 두 장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드미트르가 편지를 펼치자, 말린 분홍색의 장미와 단풍잎이 함께 떨어졌다.
안녕, 드미트르.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어제 벤티스와 결혼식을 마쳤어.
예정된 일이었지만 막상 끝나고 나니 정말 오묘한 기분이 들어.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내가 단풍을 좋아하는 이유는.
벤티스의 눈과 닮았기 때문이야.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욱 슬펐다.
거기서는 단풍을 못 보니까, 이렇게라도 같이 보낼게.
그리고 장미도.
그건 내 부케에 사용한 장미야.
드미트르는 슬픈 눈으로 장미와 단풍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여전히 붉은빛을 띠는 단풍과는 다르게 거의 바스러진 장미는 색이 바래, 낡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너라면 분명 내 결혼을 축하해 줬겠지?
만약 네가 참가할 수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맨 앞자리를 내어주었을 거야.
드미트르,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해.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왜, 끝까지 행복하지 않으셨습니까.
차라리 자신을 잊었더라면,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을 텐데.
테리스의 편지를 붙잡고 한참을 울던 드미트르는 마지막 남은 편지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편지들과는 다르게 최근에 보낸 것인지 비교적 하얀 봉투가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