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20)화 (120/207)

121. 겨울

편지를 펼치자 전과는 다르게 흐트러진 문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녕, 드미트르.

너한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도 오랜만이네.

미안.

그동안 여러 가지로 너무 여유가 없었어.

그 문장을 읽던 드미트르의 손이 떨렸다.

하얀 편지지에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드미트르 나, 너무 힘들어.

벤티스와 결혼하게 된다면 행복할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벤티스와 싸우고 있어.

…아버님을 꼭 닮았더라.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드미트르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 숨은 의미를 파악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전쟁터에 나가 있던 십 년, 아니. 살아온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책상을 내려친 드미트르는 아랫줄로 시선을 옮겼다.

변한 그의 모습을 볼 때는 숨이 막혀오고. 

그가 들어오지 않는 밤이면 미쳐 버릴 것 같아.

이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녀가 떨면서 편지를 썼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드미트르는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테리스가 불치병에 걸렸단 말은 거짓이었다. 그녀는 벤티스가 죽인 것과 다름없었다.

드미트르는 그때 망설이지 않고 벤티스를 찔렀어야 했다. 편지의 마지막 줄을 읽는다면 그는 복수 같은 건 꿈도 못 꾸게 될 것이니까.

드미트르, 만약 내가 견디지 못한다면 내 아들을 부탁할게.

그렇게 편지가 끝이 났다.

허망한 웃음과 함께 드미트르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 위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들은 그에게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남겼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지나고 라이온 아카데미의 방학이 시작한 날, 드미트르는 바리다스를 찾아갔다.

벤티스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처음 바리다스를 마주한 드미트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붉은 눈동자와 검은 눈, 그의 아들은 벤티스를 꼭 닮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드미트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리다스가 테리스가 남긴 유일한 자식이라는 사실이었다.

드미트르가 바리다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는 자신에게 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표정을 굳혔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저는….”

드미트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바리다스에게 자신을 무어라 소개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망설이던 그때,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리다스였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라면 그냥 포기해, 나는 그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 따위 없으니까.”

바리다스의 모습에서 왜,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을까.

하지만 지금 바리다스의 모습은 사생아였던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드미트르는 그제야, 테리스가 왜 자신에게 바리다스를 맡겼는지 알 수 있었다.

“저는 공작가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리다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대체 왜 날 데리러 온 건데?”

그리고 드미트르는 이제 대답할 수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죽게 된다면 아들을 부탁한다는 부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 없었기에 바리다스의 두 눈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번 한 번만 저의 거짓말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누님. 저의 검은 그 어떤 순간에도 당신의 것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으니.

무릎을 꿇은 드미트르는 바리다스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도련님. 저는 테리스님의 기사였던, 드미트르라고 합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 * *

“할아버지!”

“교수님.”

멍하니 옛일을 떠올리고 있던 드미트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자 강아지들과 함께 서 있는 그린과 레몬의 모습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도련님. 아가씨.”

그의 인사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할아버지, 무슨 일 있으세요?”

레몬이 눈치챌 정도로 드미트르의 표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말할 만한 고민은 아니었기에 드미트르는 표정을 풀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 없습니다.”

그래, 정말로 아무 일 없었다.

애초에 미련도 없는 삶이었고 유일한 이유였던 테리스의 부탁도 이 정도면 충분히 들어 줬으니 이제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네가 찾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같이 가자는 네 아이의 말은 언제나처럼 내게 선택권이 없는 질문이었지만 왜인지 그 사실이 슬프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더 슬퍼 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형과 아버지를 닮은 아이에게서 처음으로 당신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까.

그제야 드미트르는 뒤늦게 인정하고 말았다.

바리다스의 존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를.

정말로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순간도 가족으로 인정해 준 적은 없으면서 왜 언제나 삶에 미련을 가지게 만드는지.

그리고 왜 그 사실이 싫지 않은지.

“아닌데,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

드미트르를 위로하듯 그의 품 안에 뛰어들며 레몬이 입을 열었고 그린은 그런 레몬의 팔을 잡아당겼다.

“교수님 괴롭히지 말고 일어나.”

“괜찮습니다.”

드미트르는 자신의 목을 끌어안은 레몬이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꿔 앉아 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배려를 느낀 것인지, 드미트르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레몬은 환하게 웃었다.

“할아버지가, 진짜 우리 가족이면 좋을 텐데.”

정말로 기다려왔던 말은, 예상치 못한 아이에게서 처음으로 나왔기에 드미트르는 그 말에 웃음보다 눈물이 더 먼저 나왔다.

드미트르의 울음에 두 아이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할아버지 울어요?”

레몬은 그를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고 그린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그제야 드미트르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민망함에 그린이 내민 손수건을 받아들지도 못하고 손으로 빠르게 눈물을 훔친 그는 레몬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죄송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딜 향해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이상한 감정으로부터.

그가 어렸을 적 딱 한 번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벤티스 때문이었다.

친절했던 그의 형은 자신만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불공평하다며, 드미트르의 것도 그려 달라 졸랐고 그렇개 드미트르는 하나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설마, 그 초상화가 아직도 저택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드미트르는 헛웃음을 지었다.

몇십 년을 그렇게 잘 숨기고 살아왔는데, 그렇게 쉽게 들킨 것이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자신이 벤티스의 동생이라고 솔직하게 밝혔다면 바리다스는 그를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니까. 

뭐, 그것이 아니라 해도 밝힐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벤티스의 수많은 형제들 중 한 명일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아가씨와 도련님께는 사과드려야겠지. 어른이 자신들 앞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렸으니, 분명 놀랐을 것이었다.

드미트르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는 바리다스와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제정신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를 하고 말았다.

“형님.”

계속 과거를 생각하고 있어서인지, 순간적으로 나온 말에 드미트르는 입을 틀어막았다.

벌써 노망이 든 것인가.

드미트르는 바리다스가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랬지만, 그는 이미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바리다스는 드미트르의 예상과는 다르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치의는 아무 말이 없었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얼굴 말고는 단 한 가지도 당신들을 닮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아닙니다, 도련님.”

드미트르의 말에 바리다스는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어디 안 좋은 곳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말을 마친 바리다스는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드미트르는 그를 붙잡았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 말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바리다스를 처음 만났던 그 날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시 망설이던 드미트르는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저는 사실 테리스님의 기사가 아닙니다.”

말해야 했다. 자신이 테리스의 사람이 아니라, 벤티스의 동생이며 그의 형이라는 사실을.

머뭇거리던 드미트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바리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있었어요.”

바리다스의 말에 드미트르의 눈이 커졌다.

대체, 언제부터.

당황한 드미트르가 바리다스를 바라보자,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어머님의 기사라고 찾아온 사람을 제가 그냥 따라갈 리 있겠습니까. 어머니께서 예전부터 말씀하셨거든요.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자신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동생이 있다고.”

설마.

드미트르의 두 눈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바리다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갈색 머리를 한 드미트르라는 이름의 동생이.”

그렇게 말하는 바리다스의 미소는 정말로 테리스를 닮아 있어, 드미트르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테리스는 이미, 그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은 그녀에게 가족으로서 그 무엇도 해 주지 못했는데.

지켜주지도, 곁에 있어 주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자신을 가족이라 생각해 준 것일까.

“그리고 그건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을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얀 눈이, 바닥에 떨어진 붉은 단풍을 덮기 시작했다.

결국 드미트르는 바리다스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전부, 상관없었다.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 해도 그들은 이미 가족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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