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마지막 인사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드미트르는 나를 찾아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 속, 우리는 그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드미트르였다.
“저는 제가 누구인지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의견을 쉽게 존중해 줄 수 없었다. 나는 드미트르의 일에 깊게 관련이 되어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 비밀이 밝혀졌을 때 내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인지, 드미트르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말하지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저 또한, 도련님들과 아가씨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리다스의 아버지는 그에게 가족보다 못한 존재였다.
드미트르는 그런 바리다스에게 차마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었고 그렇게 시작된 거짓말이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정을 듣고 나니, 나는 차마 드미트르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가 바리다스와 아이들을 대할 때 무슨 감정이었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
드미트르의 사연과 그의 마음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와 밝히기엔 너무 늦은 것이겠죠.”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드미트르는 고개까지 숙여가며 내게 간청했다.
결국 나는 그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부탁에 따라, 나는 그에게 초상화를 돌려주었다.
“여기 있어요.”
초상화를 받아든 드미트르는 자신이 차일드 가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줄 유일한 증거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해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 사연을 듣고도 어떻게 이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감사할 일은 아닌걸요.”
내 말에 드미트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끝까지 거절하는 드미트르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그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저 또한, 감사드려요.”
아이들과 바리다스를 잘 돌봐주어서.
* * *
일이 마무리된 후, 드미트르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의 몸은 육안으로 봐도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말라가기 시작했고 식사 또한 거의 하지 못했다.
가벼운 산책을 제외하면 그는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치의에 말에 따르면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성력을 아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성력은 기적에 가까운 힘이라 묘사되었지만, 그것 또한 계속하여 사용한다면 내성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드미트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드미트르가 쓰러지고 삼 일째가 되던 날, 바리다스는 근처 신전의 신관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들은 모든 성력을 퍼부어 드미트르를 치료하려 했으나, 그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사자인 드미트르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지 담담해 보였으나, 아이들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이들 또한 드미트르를 데려왔을 때부터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이별이 빨리 다가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특히 쓰러진 드미트르를 가장 먼저 목격한 렌과 그린의 충격이 가장 커 보였다. 토마를 포함한 세 사람이 드미트르를 잘 따랐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매일같이 강아지들과 함께 드미트르를 찾아갔고 그럴 때면 드미트르는 어렵사리 몸을 일으켜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는 했다.
한 번은 아이들이 오는 것이 쉬는 데 방해가 되냐 물었더니, 그는 내게 답했다.
그것은 괜찮으나, 한 번씩 슬픈 생각이 든다고 말이다. 아픈 자신을 위해 애써주는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정말로 사랑받고 자랐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벤티스가 아이들에게 주었던 사랑의 일부만이라도 테리스와 바리다스에게 주었으면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예전에 바리다스가 내게 해 주었던 말이 떠오르는 이야기였기에, 두 사람이 제법 닮았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그 후로 드미트르를 찾아갈 때마다 그는 내게 한 번씩, 자신의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가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무 슬프지도 그렇다고 그냥 담담하게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말이다.
바리다스 또한 드미트르를 보내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외출을 줄이고 대부분의 업무를 집에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바리다스의 집무실을 채우고 있던 커피 향이 점점 진해지기 시작했다. 재택근무로 늘어난 업무량을 감당하기 위해 박하 차를 줄이고 커피만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카페인을 과다 복용하는 것이 걱정되긴 했으나, 말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날이 갈수록 드미트르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 드미트르는 방을 찾아온 나에게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두 번 접어진 종이를 건넸다.
그가 내게 어렵거나 곤란한 부탁을 할 리 없었기에 나는 종이를 열어 보지도 않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드미트르는 미소 지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작은 아버님.”
태어나 처음 뱉어보는 호칭에 왜인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드미트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게 얼굴을 붉혔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제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호칭이군요.”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고 나 또한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
뒤이어 강아지들까지 들어오자 방 안은 순식간에 북적북적해졌다.
나는 아이들의 이마에 한 번씩 입 맞춰 주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 뒤, 방 밖으로 나갔다.
복도 창밖으로 흰 눈이 수북이 쌓인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이제 진짜 한 겨울이구나.
드미트르를 볼 때면 한 번씩, 전생의 가족이 떠올랐다. 나를 떠나보냈을 때의 가족들도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금, 우울하네.
전생을 떠올리며 복도에 막연하게 서 있던 그때, 바리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린.”
나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리다스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잠을 며칠 동안이나 자지 않은 것인지, 얼굴이 초췌했고 피부는 까칠해 보였다.
바리다스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체력도 좋았고 잠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되다니, 대체 며칠 동안이나 밤을 새운 건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마지막으로 침실에 들어온 것도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설마, 일주일 동안이나 안 잔 거야?
바리다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간섭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침실이 바로 옆에 있긴 했으나, 바리다스의 집무실에도 작은 간이침대가 있었다.
일주일 동안 그는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집무실에 있었기에, 일이 많아 거기서 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안 잔 거였다니.
아니, 이건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내게도 책임이 있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그에게 다가가 뺨을 쓰다듬었다.
심하지는 않았으나 조금 거칠어진 피부와 수염이 느껴졌다.
“얼마나 안 잔 거예요?”
그 질문에 바리다스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이 주일 정도.”
아니, 그 정도로 안 잤는데 살아있을 수 있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나는 그가 내 손을 피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입을 열었다.
“아니, 일주일 전 까지만 해도 같이 자지 않았어요?”
“……”
내 질문에 바리다스는 묵언으로 대답했다.
설마, 이 사람 나 자는 것만 보고 나간 거야?
말문이 막혔지만 그에게 무어라 타박할 수 없었다.
바리다스의 어머니는 그가 잠깐 잠들었을 때, 돌아가셨고 그는 그 충격으로 몇 년 동안 몽유병에 시달렸다.
그때, 그가 받았을 상처와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그의 행동이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러다 진짜 쓰러진다고.
“라스,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는 알아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자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동시에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드미트르 씨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나랑 드미트르 씨가 안 괜찮아요.”
단호하게 말하자 바리다스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당신이 왜 잠을 안 자려고 하는지 모르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 바리다스는 지금 불안한 것이다. 자신이 잠들었을 때, 드미트르가 떠나갈까 봐. 그리고 불안정한 상태의 자신이 또, 몽유병에 시달릴까 봐.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바리다스의 손을 잡았다.
“당신 옆에는 내가, 드미트르 씨 옆에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오늘은 조금만 자도록 해요. 걱정할 일은 없을 거예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맞잡은 손에 힘을 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고개를 내려 살짝 입을 맞춘 뒤, 그는 약속대로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몸을 눕힌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바리다스는 나를 끌어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그는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처음 보는 그의 불안정한 모습에 많이 걱정되었다.
“아무 꿈 꾸지 말고, 편하게 자요.”
지금 당신에게 좋은 꿈을 꾸라는 말은, 너무나 잔인하니까.
나는 그렇게 속삭이며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