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마지막 인사
바리다스가 잠든 방 안, 나는 가만히 누워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튼을 쳤지만 아직 낮이었기에 창밖으로 은은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잠든 바리다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푹 자요.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다르게 바리다스는 이 주일이나 자지 못했음에도 두 시간 만에 눈을 떴다.
나는 자고 있지 않았기에 그의 작은 몸짓에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어요.”
내 질문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충분합니다.”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게 어떻게 충분할 수가 있어.
한숨을 내쉰 나는 바리다스의 팔을 붙잡듯이 끌어안았다.
“이러다가는 진짜 쓰러져요.”
그런 내 행동에 바리다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팔을 빼지는 않았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리다스를 잡아당겼지만 당연하게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소드마스터인 거 모르나? 이럴 때는 그냥 넘어와 줘도 되는 거잖아. 눈치도 빠른 사람이 말이야.
말로도, 힘으로도 설득을 못했으니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나는 바리다스를 잡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감성이라는 이름의 마지막 무기를 꺼냈다.
“그래요.”
물기를 담은 목소리로 울먹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정말로 슬퍼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리다스를 속이는 것이 미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의 잠이 더 중요했다.
“…왜, 그러는 겁니까. 예린.”
아무래도 이번 무기의 효과는 매우 뛰어난 것 같았다.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자,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 그만둘 수도 없었다.
“걱정하는 저랑, 자기 몸 생각은 안 하는 거예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원래 같으면 그의 손 또한 피해야 했으나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커튼 넘어 조금의 빛이 들어오는 방 안, 아직도 초췌한 얼굴이 눈에 들어와 마음이 아려왔다.
“정말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자요.”
바리다스라면 눈치챘을 것이었다.
말이 조금이었지, 나는 그가 푹 잘 때까지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리다스는 내게 져 주었다.
“알겠습니다.”
긍정의 대답에,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바리다스는 나를 끌어안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바리다스는 나를 반대로 안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당신도 이번에는 자요. 나 기다리지 말고.”
그냥 져 준 건 아니었네. 기다린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져 줘야 할 차례인 것 같았다.
“알겠어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안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일어나기 전까지, 어디 가지 마요.”
어린아이가 혼자 잠을 자는 것이 두려워, 엄마에게 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바리다스가 잠을 두려워하는 건.
“안 가요, 아무 데도.”
잠든 사이에, 누군가가 떠나갈 것 같아서겠지.
나를 안고 있는 바리다스의 팔 위에 손을 얹자, 그는 그제야 팔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왜인지 곰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자세를 바꾸기 위해 조금 몸을 비틀자, 내 허리 위에 올라가 있던 팔이 떨어짐과 도시에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세, 불편합니까?”
…지금 이러면 안 되는데,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들렸다.
머릿속에 자리한 음란마귀를 내쫓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까, 편하게 있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리다스는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절대로 놓지 않을 것처럼.
오랜만에 보는 약한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왔다.
몸을 돌려 그를 안아주려 했으나, 나를 너무 꽉 안고 있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바리다스에게 힘을 좀 풀어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등 뒤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내가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울고 있구나.
나는 바리다스가 왜 나를 붙잡고 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우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내 어깨 위로, 계속해서 그의 눈물이 떨어졌고 나는 가만히 그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마주 보고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바리다스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리다스는 눈물을 멈추고 팔에 힘을 풀었다. 나는 뒤를 돌아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양 눈시울 붉게 물들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바리다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정도로 슬퍼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음이 아파 와 손을 뻗어 눈가를 매만져주자 그는 고개를 숙여 내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그의 뺨에 남아있던 눈물 자국이 느껴져 마음이 더 아려왔다.
그렇게 그의 눈물을 닦아준 뒤, 나는 팔을 뻗어 그를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자라고 해놓고, 방해가 되었네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서운한 말에 바리다스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내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것인지 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네,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그 말과 함께 바리다스는 고개를 숙여 내게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내가 당신 곁에 있는 건 태양이 뜨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를 안은 팔을 위로 올려 목에 감았다.
그리고 바리다스의 양 눈가에 한 번씩 입을 맞춰준 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 앞에서는 편하게 있어도 괜찮아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어깨가 옅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당신에게 기대기만 하는 것 같네요.”
“그럼 저 말고 누구에게 기댈 건데요.”
약간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하자, 작지만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요, 당신밖에 없네요.”
조금은 괜찮아진 건가.
바리다스의 웃음소리를 듣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저도 당신밖에 없는걸요.”
내 말에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잠을 자기 위해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흘렀고 내가 잠에 빠져드려는 그 순간, 바리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어디 가지 마요.”
잠결에 말한 것인지, 내가 잠들었다 생각하고 말한 것인지,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찾아왔던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아무 데도 안 가요.”
잠결에 말한 것인지 바리다스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안심하고 푹 자길 바라며, 그의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 * *
그 시각, 아이들은 드미트르의 방 안에 있는 벽난로 앞에 모여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드미트르는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바리다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아이들처럼 자주 웃지도 장난을 치지도 않았지만 그들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계속 자신을 찾아와 주는 것은 몸이 안 좋아진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드미트르는 처음 쓰러진 날, 자신을 찾아온 아이들에게 더 이상 오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아이들과 더욱 가까워지게 된다면, 자신이 떠났을 때 그들의 상처가 커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의 생각보다 어른스럽고 의젓했다.
그의 말에 토마와 렌이 한 대답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었다.
“스승님이 저희 곁을 떠난다면, 당연히 슬플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스승님이 혼자서 외롭게 떠나시는 것이 더 슬픈 일입니다.”
“그건 저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이에요. 저희는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아요.”
드미트르의 생각이 틀린 것이었다.
아이들은 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소중한 이의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그 사람의 곁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 드미트르는 차마, 아이들에게 찾아오지 말아 달라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말한 그 감정을 드미트르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테리스를 보냈을 때의 그 또한, 죽을 때까지 죄책감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말하다니, 죽음이 다가와 판단력이 흐려졌던 건가.
드미트르는 자신의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토마와 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과 아가씨가, 저보다 의젓하신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그때, 드미트르의 품 안에서 자고 있던 자스민이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그를 끌어안은 자스민은 그의 품 안에 얼굴을 비볐다.
“하라버지, 좋아.”
귀여운 애교에 드미트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순간 자스민은 입을 열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하라버지랑 있으면, 아빠랑 그리구 큰오빠야랑 있는 것 가타.”
허를 찔린 드미트르는 할 말을 잃었다.
자스민을 바라보자 아직 잠에서 덜 깨어 눈도 똑바로 뜨지 못한 채, 고개를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가요?”
그의 질문에 자스민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웅, 셋이 닮아써.”
단호한 대답에 드미트르는 작게 미소지었다.
“감사한 일이네요.”
처음이었다.
그에게서 벤티스를 떠올려 준 사람은.
드미트르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아이들을 위해, 자신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자신을 위한 말이었다.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들을 볼 때면 그 생각이 바뀌었으니까.
아이들의 곁에 더 남아있고 싶었다, 그들이 어떻게 자라고, 어떤 어른이 되어 가는지 지켜보고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가족처럼 말이다.
결국 드미트르는 인정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이미 그의 가장 큰 미련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