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마지막 인사
드미트르가 생각에 잠겨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덜컹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정원이 보였다.
“바람은 안 부는데.”
열린 창문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레몬이 작게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레몬보다 더 먼저 빨리 일어난 자가 있었으니, 바로 리리였다.
오랜만에 눈을 본 리리가 신이 나 창밖으로 뛰쳐나간 것이었다.
“리리!”
레몬은 그런 리리의 모습에 데자뷰를 느끼며 그녀를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눈밭을 뛰어다니며 짖는 리리의 모습이 보였다.
“멍! 멍멍!”
꽤나 높이가 있는 이 층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다치지 않은 것인지 신이 난 모습이었다.
과할 정도로 건강한 리리를 보며 레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불안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창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으며 레몬은 소리쳤다.
“루이랑, 라라! 잡아!!”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루이와 라라도 리리를 따라 창밖으로 뛰쳐나간 것이었다.
그 둘의 모습에 렌과 그린 또한 달려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눈밭을 뒹굴고 있는 세 개의 털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신이 나 눈밭을 뛰어노는 강아지들을 바라보며 레몬은 눈을 반짝였다.
나도 눈 맞으면서 놀고 싶다.
하지만 아픈 드미트르를 두고 놀러 나갈 순 없기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생각만 할 뿐이었다.
“나도 눈밭에서 놀래!”
그때 레몬과 마음이 통한 것인지 자스민이 까치발로 창밖을 내다보며 입을 열었다.
“자스민!”
토마와 렌이 드미트르의 눈치를 보며 이름을 부르자, 자스민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그때 지팡이를 집고 자스민에게 다가온 드미트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도 함께 나가도 되겠습니까?”
그의 말에 자스민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드미트르는 토마와 렌에게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을 싫어하는 아이는 없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토마와 렌도 밖에서 놀고 싶을 것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그의 말에 렌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고 드미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아가씨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바람은 많이 안 분다고.”
확실히 그 말이 맞긴 했다.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고 적당히 드리워진 구름과 조금씩 내리는 함박눈은 정말로 놀기 딱 좋은 날씨라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드미트르와 함께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모두가 옷을 갈아입으러 나갔지만 오직 그린만이 드미트르의 옆에 앉아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도련님은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드미트르의 말에 그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갈 겁니다. 하지만 눈 위에서 뛰어놀지는 않을 거라서요. 저는 눈도, 추운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아이도… 있나?
“차갑고 귀찮기만 한 눈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애늙은이 같은 말에, 드미트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읽던 책을 덮은 그린은 근처에서 담요 하나를 주워들어 어깨에 대충 둘렀다.
아무래도 저 상태로 나갈 생각인 것 같았다.
딱 봐도 추워 보이는 복장에 드미트르가 걱정을 내비쳤다.
“그래도 따뜻하게 입고 오시지요, 감기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저은 그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따뜻하게 입고 나가면, 분명 눈싸움에 끌려갈 겁니다.”
예상치 못한 귀여운 발언에 드미트르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 눈싸움을 하기 싫은 것처럼 치를 떠는 그린의 모습에 드미트르는 외투를 걸치라 권하지 않는 대신 목도리를 꺼내 둘러 주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까?”
드미트르의 말에 그린은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맙습니다.”
그린은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반대 팔로는 드미트르를 부축하며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
토마와 렌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고 레몬과 자스민은 강아지들과 함께 눈밭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다 뒀으니 편하게 계세요.”
토마의 말에 드미트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두 아이는 드미트르가 의자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발걸음을 옮겼고 그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전자에 담긴 박하 차와 작게 자른 양갱이 눈에 들어왔다.
두 가지 모두 그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찻잔에 차를 따르자, 진한 박하의 향과 함께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두 개의 찻잔이 더 있는 것을 확인한 드미트르는 바로 앞에 있는 그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드미트르의 말에 그린은 책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의 말에 드미트르는 다른 잔에 차를 따라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린은 그가 따라 준 차를 바라보기만 할 뿐 섣불리 입을 대지 못했다.
바리다스와 드미트르에게는 무엇보다 익숙한 맛이었으나, 그린에게는 박하 냄새가 치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치약 맛 날 거 같아.
뒤늦게 드미트르가 마시고 있던 차의 정체를 깨달은 그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갈색의 차를 노려보다 드미트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고민하는 자신에 비해, 그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 맛이 있으니. 형님과 교수님도 드시는 거겠지.
그의 우상과 다름없는 바리다스와 드미트르의 모습을 떠올린 그린은 마음을 다잡고 차를 적당히 식힌 뒤,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게 되었다.
…양치하는 것 같아.
예상처럼, 박하는 그린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다시는 먹고 싶지 않아.
상쾌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 입안을 양갱으로 달랜 그린은 입을 열었다.
“제 입맛은 형님을 닮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의 말에 드미트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바리다스 또한, 처음 드미트르를 따라 박하 차를 마셨을 때 이상한 맛이 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뇨, 도련님도 처음에는 드시지 못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못 먹을 것 같은데.
그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주전자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형님은 드미트르 씨를 닮고 싶었던 것 같네요.”
그 말에 드미트르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그린은 읽던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그가 놨던 자리에 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불안한 느낌이 든 그린이 주위를 둘러보자, 언제 온 것인지 레몬이 그가 읽던 책을 들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그녀가 원하는 바를 그린이 모를 리 없었다.
한숨을 내쉰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 놀아.”
“아, 왜!”
“옷도 없고 추운 건 싫어.”
그린의 말에 레몬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장갑까지 끼고 있는 그녀와는 다르게 그는 얇은 차림에 담요와 목도리만 두르고 있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한 레몬은 표정을 구겼다.
저렇게 춥게 입어놓고 뭘 추운 게 싫다는 거야.
“지금도 충분히 추워 보이는데?”
맞는 말이었다.
사실 그린도 조금 전부터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아닌 척했던 거지.
하지만 여기서 인정하면 지는 것 같잖아.
“아니, 안 추운데.”
자신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팔짱을 끼는 그린의 모습에 레몬은 볼을 부풀렸다.
“거짓말쟁이.”
“진짜거든.”
“너 귀 엄청 빨갛거든.”
레몬은 그에게 주황색 털로 만들어진 귀마개를 씌워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린의 눈에 추위로 인해 붉게 물들기 시작한 레몬의 귀가 들어왔다.
추위도 제일 많이 타는 주제에.
한숨을 내쉰 그린은 귀마개를 벗어 다시 레몬에게 씌워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놀자 놀아. 옷 입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레몬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다, 그린이 앉아 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고 드미트르를 불렀다.
“할아버지는 뭐 하고 계셨어요?”
“눈을 구경하며,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드미트르의 말에 레몬은 그가 마시고 있는 차를 빤히 바라보다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부터 두 분의 분위기가 왠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시는 차가 비슷해서 그런 거였군요!”
그린과 닮았으면서도 다른 말에 드미트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끄덕인 드미트르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저도 좋아하는 차랍니다.”
그때 차와 드미트르를 번 갈아가며 바라본 레몬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저도 마셔 볼래요!”
레몬의 말에 드미트르는 잠시 망설였다.
그린처럼 그녀의 입맛에도 맞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린 도련님께서는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하시던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지만 드미트르는 질문을 잘못 선택했다.
그린과 레몬의 입맛은 완전히 정반대였으니 말이다.
“네, 괜찮습니다!”
저렇게까지 마시고 싶어 하는데 안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드미트르는 남은 찻잔 중 하나에 차를 따라 레몬에게 건넸고 레몬은 적당히 식은 차의 온도를 확인한 뒤, 그린과 마찬가지로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레몬은 나직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시원하고 상쾌한, 처음 느껴보는 맛과 느낌이었다.
완전 맛있어.
그린과는 정반대되는 평가였다.
“이거, 진짜 맛있다. 입안이 맑고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이 차가 맛있다고 말해 주는 어린이는 레몬이 두 번째였다.
드미트르는 왜인지 뿌듯함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드미트르의 말에 레몬이 대답하려 한 순간, 그녀의 입안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에 깜짝 놀란 레몬이 뒤를 돌아보자 외투를 입고 나온 그린이 초콜릿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교수님 쉬시는 거 방해하지 말고, 가자.”
그린의 말에 레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내일 또 마셔요!”
“예, 알겠습니다.”
레몬의 말에 그린은 곁눈질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설마, 저 차를 또 마시고 싶다고 한 거야?
그린은 표정을 구겼다.
어릴 때, 양치하기 싫다고 그렇게 징징거리더니 저게 맛있다고?
그린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쌍둥이였으나, 외모와 성별 입맛까지, 대부분 다른 것 같았다.
쌍둥이라면 그래도 닮은 부분이 하나는 있지 않나?
그 시각 레몬도 그린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치는 그렇게 잘하면서 어떻게 저 맛있는 차를 어떻게 맛없다고 할 수 있지?
쌍둥이라면 그래도 닮은 부분 하나는 있지 않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드미트르는 생각했다.
정말 꼭 닮은 쌍둥이라고 말이다.
오직 그 둘만이, 서로가 닮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혼자 남은 드미트르가 주전자를 들어 마지막 남은 차를 따른 그 순간.
“드미트르.”
뒤쪽에서 바리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식어버린 차에서는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