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24)화 (124/207)

125. 마지막 인사

드미트르가 뒤를 돌아보자 바리다스와 예린이 함께 서 있었다.

그들 중 예린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드미트르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비켜주었고 바리다스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에 앉았다.

평소와는 다른 바리다스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린 드미트르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하지만 그의 질문에도 바리다스는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드미트르는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고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바리다스의 말에 드미트르는 약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킨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드미트르는 피오라와 자신을 믿기로 했다. 그는 들킬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고 피오라는 약속을 어길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드미트르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차를 더 내와야겠군요.”

그 말과 함께 드미트르는 시녀 한 명을 불러 차를 더 내올 것을 부탁했다.

바리다스의 눈에, 드미트르는 조금 마른 것을 제외하면 건강해 보였고 태도에서는 여유가 흘러나왔다. 그와는 다르게 말이다.

드미트르가 쓰러진 이후, 바리다스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드미트르의 죽음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외출을 줄였으며, 집 안에서 모든 서류를 처리했다.

그 때문에 일이 배로 늘었으나 그에게는 오히려 나은 일이었다.

일을 할 때면 잠을 자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바리다스는 일이 많다는 핑계로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잠 또한 자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드미트르가 사라져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예린은 그런 바리다스를 걱정했지만, 그는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때, 시녀가 박하 차를 가지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고 그녀에게서 주전자를 받아 든 드미트르는 바리다스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그간 잠들지 않기 위해 커피만 마셨기에 정말로 오랜만에 맡는 박하 향이었다.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차를 바라보다,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예정된 일이었는데, 무서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드미트르는 그의 말처럼 정말 괜찮아 보였다.

그런 모습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이 아파 왔다.

바리다스는 드미트르가 왜 마나 과남용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드미트르가 왜 드래곤을 토벌하러 떠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원망도 하시지 않는 겁니까?”

바리다스의 질문의 의미는 그를 강제로 전쟁터로 내몬 신전과 나라가 원망스럽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드미트르는 바리다스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던 드미트르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원망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원망이 향한 곳은 테리스를 지키지 못한 벤티스와 자신이었지 이 나라가 아니었다.

드미트르가 올곧은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잃은 것보다 지킨 것이 더 많기 때문에 원망스럽지 않습니다.”

드미트르를 대단한 기사이자 전쟁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는 아킬레스가 듣는다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받을 만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진실을 모르는 바리다스의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갈 만한 대답이기도 했다.

“몇 명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당신의 희생을 모르고 있습니다. 근데 왜 괜찮다고 하시는 겁니까?”

동상이몽이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상황은 없을 것이었다.

정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던 드미트르는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벤티스와 똑 닮은 얼굴은 너무나도 그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깐, 옛날 생각이 났다.

드미트르와 벤티스가 오랜만에 만났던 그때의 기억이었다.

지금의 도련님과 비슷한 나이였지. 형님이 도련님처럼 자라 주었다면 조금은 달랐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바리다스가 정말 잘 자라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어른이 된 바리다스의 모습을 볼 때면 자신의 희생이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도련님.”

“…예.”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도련님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전쟁에서 업적을 세우지 못했더라면 드미트르는 이름을 되찾지 못했을 것이었고 이름을 되찾지 못했더라면 테리스의 편지를 받을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드미트르는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드미트르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괜찮습니다.”

바리다스는 드미트르가 전쟁에서 공을 세운 기사인 덕에, 벤티스에게 자신을 돌보겠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바리다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바리다스를 바라보며 드미트르는 아주 오랜만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리다스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드미트르가 죽는 것이 두렵고 이렇게 몰아붙인 사람들이 원망스럽습니다.”

그의 죽음은 바리다스 또한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드미트르가 아프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런데도 막상 닥치고 나니,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후회가 되었다.

자신에게 병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바로 그를 수도로 데려와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리다스는 죽음에 대한 강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래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 순간까지, 드미트르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병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바리다스가 눈치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드미트르는 처음 바리다스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사실 많이 놀랐다.

그가 자신에게 이 정도로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처음 그의 표정을 마주했을 때 드미트르는 그제야 실수를 눈치챘다.

바리다스는 그의 생각보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바리다스를 따라나선 것이었다. 자신이 홀로 죽어 버린다면 바리다스에게 더 강한 트라우마를 심어 줄 테니까.

“그리고 슬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미트르의 말에 바리다스는 그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어느새 그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바리다스를 봐 온 드미트르도 처음으로 보는 그의 약한 모습이었다.

자신 때문에 슬퍼하는 그의 모습에 왜인지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이지만 말이다.

“저는 도련님이 있어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바리다스가 테리스가 그에게 남겨 준 미련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그는 드미트르에게 삶의 이유가 되어 있었다.

자라가는 바리다스를 보는 것이 뿌듯했고 피오라를 데려왔을 때는 기쁘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가 아이들을 대해 주는 것을 봤을 땐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자라 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바리다스의 눈이 커졌다. 저에게 그렇게 말하는 드미트르 눈에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드미트르는 테리스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것은 드미트르에게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드미트르는 지금까지 바리다스의 곁에서 떠나간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모든 것을 끝내고 떠나는 것이었다.

그런 거라면 바리다스도 그를 보내줘야 했다.

바리다스는 강하게 주먹을 쥐며 입을 열었다.

“많은 것을 알려 주시고, 키워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삼촌.”

생각지도 못했던 호칭에, 드미트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으로 듣는 말이었다.

자신이 테리스의 동생이라 그에게 소개했으니, 바리다스의 입장에서는 맞는 호칭이었지만 많이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드미트르에게 인사를 한 바리다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예린이 그에게 다가왔다.

“몸은 좀 괜찮아요?”

“예, 여전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드미트르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예린은 드미트르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드미트르가 입을 열었다.

“형님이 도련님처럼만 자라 주었다면, 조금 다를 것 같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드미트르의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던 예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바리다스가 그렇게 자랄 수 있었던 건, 드미트르 씨 덕분이 아닐까요.”

예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전생에서 많은 것을 봐 온 그녀는 주위에 본받을만한 어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예린의 말에 드미트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드미트르는 시선을 옮겨 다시 한번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이끌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다스와 예린이 그들의 곁에 있을 테니까.

“도련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과 같았지만, 그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네.”

예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드미트르는 눈이 가득 덮여 있는 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그건 저택에 있는 몇 개의 없는 벚꽃 나무 중 하나였다.

이번 벚꽃은 보지 못하겠구나.

그래도 괜찮았다.

그곳에는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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