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또 다시 봄
뒤를 돌아보니, 미렐과 실비아가 손을 흔들며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내 앞까지 다가온 그녀들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작부인, 그간 잘 지내셨어요?”
“보고 싶었어요!”
귀여운 두 사람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가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잘 지냈지, 너희는 어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아이는 소리쳤다.
“당연히 잘 지냈죠!”
“저희 졸업시험 한 번에 통과했거든요!”
뿌듯하게 웃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많이 기뻤던 모양이었다.
기쁠 만하지. 그 과제와 시험지옥에서 탈출하는 건데.
그 해방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 졸업 기념으로 내가 뭐라도 사 줘야 할 거 같은데?”
내 말에 두 소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미렐과 실비아는 각각 내 왼팔과 오른팔에 팔짱을 꼈다.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작게 웃으며 실비아가 말했고 미렐 또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요.”
그런데 어딜 가야 하지.
이런 날에는 물질적인 것보다는 맛있는 걸 사줘야 하는데, 시간이 애매했다.
네 시.
디저트를 먹기에는 저녁 시간 때문에 애매하고, 그렇다고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빠른 시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물질적인 거랑, 맛있는 거 다 사 주면 되는 거 아닌가.
“구두랑 주얼리 세트, 원하는 걸로 하나씩 고른 다음에 저녁 먹으러 가자.”
가는 김에 아이들의 선물도 골라달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두 아이의 표정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두 아이 모두 내 선물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나는, 두 아이의 손을 잡았다.
“얘들아, 너희한테 그 정도 쓰는 건 전혀 아깝지도 않고 무리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부담가지지 않아도 돼.”
진심이었다.
두 소녀는 내가 아끼는 동생들이었고 둘의 옷장과 신발장을 가득 채우고, 보석함을 넘치게 만들어도 차일드 가의 재산의 백만분의 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소녀는 선물보다, 내 말이 더 기쁜 것 같았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소녀의 볼이 붉게 물들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라면, 감사히 받을게요.”
“네, 정말 감사해요.”
두 소녀는 내게 허리까지 숙여가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챙겨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출발할까?”
나는 두 소녀와 팔짱을 끼며 장난스럽게 외쳤고 우리는 상점가에서 쇼핑을 한 후 식사까지 즐겼다.
오늘따라 마음에 드는 물건이 많아 헤매는 나에게 두 소녀는 열과 성을 다해 조언을 해 주었고 그녀들 덕분에 나는 만족스러운 선물을 구입할 수 있었다.
미렐이 소개해 준 식당 또한 훌륭했다.
요리는 하나같이 맛있었으며, 나오는 시간 동안 미렐과 실비아는 내게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정말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졌고 시간이 더 늦기 전에 헤어지려던 찰나, 실비아가 나를 붙잡았다.
“그거 아시나요.”
답지 않게 단호한 그녀의 말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그러자 실비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바로 크레센트 제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신분증이었다.
…여기도 민증이 있구나.
나로서는 딱히 사용할 일이 없기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미렐이랑 실비아는 올해로 열아홉 살 아닌가? 크레센트 제국에서 성인으로 인정해 주는 나이는 열여덟 살이니까 그 전부터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의아한 듯 보고 있자 미렐이 나서서 덧붙였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는, 학생 신분이어서 술은 금지였단 말이에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고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졸업생이라구요.”
그래서 이렇게까지 좋아했던 거구나. 맞지, 원래 졸업하면 달려야지.
그녀들의 말을 납득한 내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양쪽으로 들어온 그녀들의 팔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술 저희가 살게요!”
“네, 같이 마셔주세요!!”
마시는 건 상관없는데, 나는 술이 처음인 너희 둘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하지만 그녀들은 내게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나는 칠드런을 불러 오늘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바리다스에게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둘에게 끌려가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이 나를 데려간 곳은 한눈에 봐도 꽤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뽐내고 있는 칵테일 바였다.
대부분이 어린 귀족이네.
딱 봐도, 실비아와 미렐처럼 오늘 처음 술집에 온 것 같았다.
우리가 메뉴를 고르고 있던 그때 웨이터로 보이는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신분증 검사하겠습니다.”
이곳의 신분증은 전생과는 다르게 사진이 붙어 있지 않았으나, 그것 대신 제국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제국의 문양은 황실의 문양과 동일한 정도의 가치를 지니기에, 위조가 적발될 시에 사형에 준하는 엄벌에 처해졌다.
그런 덕분에 위조 또한 거의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근데, 왜 저 두 사람한테만 물어봐? 나도 신분증 검사해 줘.
진짜 내 얼굴도 아닌데 묘한 위기감이 들었다.
피오라가 올해로 스물세 살이니까, 받을만한 나이 아닌가? 나 늙어 보이나?
내가 왜인지 모를 충격에 빠져 있던 그때,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역시, 공작부인이라 그런지 다들 알아보네요.”
알아봐서 검사 안 한 거겠지? 그렇다고 해 줘.
물론 나는 이곳에 신분증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지금까지 몰랐지만, 그래도 검사당하는 게 기분이 좋잖아.
내가 공작부인인 것을 알아봐 안 물어봤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세뇌하고 있던 그때, 실비아게 내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공작부인은 무슨 술이랑 안주 좋아하세요?”
저는 맥주에 치킨 좋아하는데 여기에는 그것 둘 다 안 팔겠죠.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기니, 정말로 처음 보는 이름의 칵테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직역하자면 드래곤 브레스, 엘프의 아침 이슬 그리고 리치드의 사랑의 묘약… 그래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근데 진짜로 고독한 청춘의 슬픈 마음, 이건 대체 뭔데? 갑자기 장르가 왜 판타지에서 감성적으로 바뀌는 건데, 뭐 이름이 다 이따위야?
내가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고 있던 그때, 실비아와 미렐이 입을 열었다.
“난 청춘의 마음으로 할래.”
“나는 리차드의 묘약.”
두 사람도 차마, 이름을 전부 부르지는 못하는 듯했다.
“이 두 개가 제일 맛있다고 하더라.”
근데 제일 맛있는 거구나.
하지만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차마 저런 이름의 칵테일에 시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나는 그냥 무난한 칵테일을 선택했다.
바로 전생에서부터 알고 있던 칵테일인 블루하와이를 말이다.
이제 안주만 시키면 되는데.
안주 쪽으로 시선을 옮긴 그 순간, 내 눈에 믿을 수 없는 것이 들어왔다.
바로 메뉴판에 치킨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치킨볼, 이라는 조금 생소한 이름이었으나 아무튼 중요한 건 치킨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치킨볼로.”
빠르게 메뉴를 고른 나에 비해 한참 동안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던 두 소녀는 프렌치프라이를 골랐다.
그렇게 주문을 마친 우리는 요리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가 나왔다.
치킨볼은 치킨을 다져 채소와 함께 동그랗게 튀긴 음식이었다.
아무래도 귀족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보니, 포크나 도구를 사용해서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요리처럼 만든 것보다 원래의 치킨이 더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맛있긴 했지만 그래도 원래 치킨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아, 같이 나온 술은 당연히 맛있었다.
내 블루하와이는 알던 그 맛이었고.
묘약은 복숭아 맛이 나는 칵테일이었고 고독은 레몬 맛이 나는 칵테일이라고 두 소녀는 내게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분홍색을 띠는 묘약과 검은색을 띠고 있는 고독은 내 생각보다 예쁘긴 했지만, 시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아이는 칵테일이 마음에 드는 듯 순식간에 잔을 비우고 또 다른 칵테일을 주문했다.
아니, 저러다가는 금방 취할 텐데.
“너희들 그러다가는 진짜 금방 취한다?”
이게 바로 칵테일이 무서운 이유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때문에, 술술 들어가서 언제 자신이 취할지 모르게 만드는 거.
내 말에 실비아는 괜찮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아빠가 데리러 오기로 했거든요.”
순간적으로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는 아빠가 데리러 오지는 않았어도 매일 아침 해장국을 끓여주셨는데.
오랜만에 떠오른 가족의 기억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그런 내 표정을 두 사람은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오늘만큼은 공작님도 공작부인을 못 말립니다.”
“네, 그냥 저희 계속 마셔요.”
“빨리 외박한다고 연락하세요, 저희 집에서 같이 자요.”
칠드런을 통해, 집에 늦게 들어간다고 연락하긴 했지만 외박까지 하는 건 좀 힘들 것 같은데.
하지만 둘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왜인지 거절하기 힘들었다.
망설이던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알았어.”
내 말에 두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러면 건배해요, 건배!”
하지만 우리는 몇 잔 마시지도 않아 완전히 취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술을 못 마시는 나와, 술을 처음 마시는 두 명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렇게까지 심하게 취해있지는 않았기에, 두 소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차가운 바람에 취기가 조금 가시는 것을 느끼고 있던 그때,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이윽고 마차 문이 열리고 실비아와 꼭 닮은 진중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내렸다.
그런 모습에 다시 한번 전생의 아빠가 그리워졌다.
“제 딸을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아니에요.”
그때 그의 뒤를 이어 마차에서 내린 시녀 한 명이, 미렐을 들어 마차에 태워준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타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내가 머뭇거리던 그때, 실비아의 아버지 또한 거들었다.
“날이 늦었는데, 저희 저택에서 하루 지내고 가시죠. 공작님께는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허리를 잡아당겼다.
“고맙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네, 백작.”
익숙한 목소리에 목을 들어 위를 바라보자, 바리다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등장에 백작은 바리다스에게 인사를 한 뒤,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갔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나도 데리러 와 줄 사람이 있구나.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조금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긴 했으나, 왜인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실수하기도 했고.
“미안해요.”
환하게 웃으며 사과하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만지다가, 살짝 잡아당겼다.
갑작스레 느껴진 아픔에 내가 표정을 구기자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나 따라가려고 하면 어떡해요.”
실비아 아버지니까, 아무나는 아니지 않나?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지금은 일단 알았다고 하면 되는 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리다스는 내 뺨을 잡은 손의 힘을 풀며 입을 열었다.
“술 마시고 싶으면, 미리 말해요. 데리러 갈 테니까.”
그러네, 데리러 와 줄 사람 여기 있구나.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네, 고마….”
잠시 망설이던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아니, 사랑해요.”
그리고 그의 콧잔등과 입술에 살짝씩 입을 맞췄다. 적당히 오른 취기가 내게 용기를 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런 내 말에 웃음을 터트린 바리다스는 나를 안아 들며 입을 열었다.
“이러면, 술 자주 마시게 하고 싶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