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또 다시 봄
“두 분에게 에크리티아의 축복이 가득하길!”
신년제 인사는 두 가지가 있었다.
눈이 내릴 때 하는 인사인 ‘에크리티아의 축복이 내리기를’, 그리고 눈이 내리지 않는 날에 하는 인사인 ‘축복이 가득하길’, 이렇게 말이다.
올해는 작년과 다르게 눈이 내리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미소 지은 나는 아이들에게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너희들에게도 축복이 가득하길.”
그렇게 아이들에게는 트리 밑에 놓여 있던 커다란 선물 상자와, 작은 선물이 각각 하나씩 돌아갔다.
그중 작은 상자에는 아이들이 산타보다 더 좋아할 만한 사람이 준 선물이 들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모두 선물을 받은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커다란 상자는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이고, 작은 상자는 드미트르 씨의 선물이야.”
내 말에 아이들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드미트르가 준 쪽지에는 수표와 함께 자신이 올해 신년제를 넘기지 못한다면 이 돈으로 아이들에게 선물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바로.
“…책갈피네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린이었다.
그가 받은 책갈피는 초록색의 잎사귀가 직사각형 모양의 얇은 크리스탈로 코팅되어 있었다.
고급스러움을 더하기 위해 가장자리에는 금박 장식이 있었고 고정하는 용도의 끈 아래에는 푸른색의 보석이 달려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디자인 또한 같았으나, 토마는 붉은색의 단풍이, 렌에게는 조금 진한 색의 은행잎이, 그리고 레몬과 자스민에게는 각각 산수유 나무와 등나무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조만간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어요.”
덤덤한 미소를 지은 토마가 입을 열었지만 이미 그의 눈가는 촉촉하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우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이 선물을 준비했다는 것을.
“나두, 책 열심히 읽을게여.”
자스민도 울먹이며 말했고 레몬도 책갈피를 꽉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씩씩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팔을 벌려 그들을 안아 주며 미소 지었다.
“드미트르 씨가 정말로 기뻐하실 거야.”
내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네, 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아이들은 다 함께 내가 준 선물을 풀어보고는 즐거워했다.
드레스와 구두는 다행히 아이들에게 꼭 맞았다. 비슷한 디자인으로 옷을 맞춰 입으니 정말 한 가족처럼 보였다.
내가 직접 고른 옷으로 멀끔하게 빼입은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애들 최고, 세상 사람들 우리 애들 좀 봐 주세요.
나는 지난번처럼, 아이들의 귀여움이 다시 한번 알려지길 바랐다.
아이들과 함께 이번에 있을 연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바리다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내 아이들에게 에크리티아의 축복이 가득하길.”
그렇게 말하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준 그는 내게 다가와 이마에 작게 입을 맞췄다.
“당신에게도.”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바리다스를 올려다봤다.
올해는 연회가 선물이라고 하더니, 결국 다른 선물도 준비했구나.
“올해 선물은 연회 아니었어요?”
“제가 아니라, 산타가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제 선물은 없겠네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저으며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 담긴 건 영롱한 붉은빛을 띠는 보석 목걸이였다. 바리다스는 직접 내 목에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보석에서는 신비한 빛과 함께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처음 바리다스가 내게 선물해 준 목걸이가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요.”
내 인사에 바리다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선물들도 있는데, 조금 늦을 거라고 하네요.”
난 이거면 충분한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가 바리다스의 말을 이해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년제가 끝나고 일주일이 조금 넘게 지난 어느 날, 아필레가 두 아이를 데리고 저택에 방문했다.
“공작부인!”
“황후마마!!”
우리는 환하게 웃으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녀와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기에, 반가움이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상상도 못한 선물이네요, 바리다스.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내 말에 아필레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무슨 말인가, 내가 더 보고 싶었지.”
그녀의 말에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필레와 편지로는 매일같이 이야기를 나눴지만, 역시 얼굴 보고 하는 이야기에 비할 것은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아이들 그리고 강아지와 놀고 있는 리리안과 레이안을 뒤로한 채, 우리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바리다스의 초대를 받고 이번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왔다고 했다.
그래도 신년제인데 이렇게 막 내려와도 되냐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괜찮으니까 왔겠지 뭐. 황제 폐하가 알아서 다 할 거라고 나는 믿어.
“조금만 더 늦었다면, 기차에서 신년을 보낼 뻔했어.”
아필레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맞지, 늦었으면 그대에게 신년제 선물도 주지 못했을 테니.”
설마 또?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르게 기차로 온 데다가, 사용인들도 그렇게 많이 따라오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열린 창밖으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옮기자, 마차 세 대가 공작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차에 다 안 들어가길래, 그냥 하나를 사 버렸지 뭐야.”
…그…. 장난감 기차를 산 것처럼 말하지 말아 주실래요?
* * *
“이리와요, 예린.”
바리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시선을 위로 옮겨 무도회장을 바라보자 마지막으로 봤던 것 보다,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것보다 더 화려해질 수 있구나.
아이들과 아필레는 이미 무도회장에 들어가 있었고 나는 늦잠을 자는 바람에 조금 늦고 말았다.
계단을 모두 오른 우리가 문 앞에 서자 나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차일드 공작 부부께서 입장하십니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고, 맞는 말인데. 이렇게 들으니 왜인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가자 모여 있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이런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쏟아지는 시선을 외면하며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도회장의 한 가운데에는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큰 트리가 세워져 있었으며 벽과 테이블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정말 예쁘네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내려 작게 속삭였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입니다.”
내가 그의 말에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바리다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잡고 단상으로 향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미렐과 실비아는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으며, 그들 옆에 있던 마리 또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내게 인사를 했다.
다과회를 오가며 봐왔던 귀부인들도 보였고 결혼식에 참석한 적 있는 세븐 백작 부부 또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해 주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앞만 보고 걸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단상 앞에 와 있었다.
바리다스는 높은 구두를 신은 나를 배려해서인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주었고 나도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단상에 오른 바리다스는 내 손을 잡고 앞으로 향했고 지난번, 단상 아래에서 그를 바라봤던 것과는 다르게 같이 서 있게 되었다.
“모두 신년은 잘 보냈나.”
바리다스가 입을 여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바쁜 연말에도 다들 참가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바리다스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앞을 보고 있어,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왜인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변한 건, 나뿐만이 아닌 건가.
“이번 연회는 모두가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군.”
그때 바리다스가 나를 돌아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긴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두 새해 복 많이 받길.”
정말로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래를 바라보자, 처음 듣는 인사에 귀족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저건 내가 알려준 말이었다.
나는 전생이 그리울 때마다, 바리다스에게 그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바리다스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네, 맞아요.”
단상 아래로 내려가자, 아이들과 아필레의 모습이 보였다.
리리안을 포함한 여자아이들은 모두 있었으나 남자아이들은 그린을 제외하고 보이지 않았다.
“얘들 설마 또 연무장에 갔나요?”
내 질문에 한숨을 내쉰 아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많은 것이 담겨있는 한숨이었다.
“애들은 이제 제가 볼 테니, 쉬고 계세요.”
내 말에 아필레는 잠시 고민하는 듯, 바리다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개최자인데 한 곡은 추는 것이 예의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아필레가 애들을 다섯 명이나 데리고 있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물론 우리 애들이 얌전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내가 조금 뒤에 가도 된다고 말하려는 순간 바리다스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순식간에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어느새, 다른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고 나는 그에게 맞춰 천천히 춤을 추었다.
오랫동안 추지 않았음에도, 내 몸은 착실히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춤은 오랜만인데, 다행히 몸이 기억하네요.”
라고 말하기 무섭게, 바리다스의 발을 밟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프지도 않은 것인지 웃음을 터트린 그는 입을 열었다.
“기억하는 거 맞아요?”
“그러게요…”
바리다스의 말에 왜인지 민망해져 시선을 옆으로 돌린 순간, 사람들 사이로 푸른 머리를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레리아?
신비로울 정도로 푸른 머리카락과 회색 눈동자, 그녀는 레리아가 확실했다.
내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한 남자가 레리아에게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행동에 레리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둘은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유아가 한 말이 맞았구나.
그때, 바리다스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눈치 빠른 그는 아마도 내가 누구를 보았는지, 그리고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었다.
왜인지 불안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안 흔들려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표정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를 불안하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아가 예전에 내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 나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게 주어진 수많은 미래 중, 가장 행복한 미래는 지금일 테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만,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내 말에 마찬가지로 미소 지은 그는 고개를 숙여 나와 이마를 맞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