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29)화 (129/207)

130. 내 이야기의 끝

오늘은 날씨가 매우 좋은 봄날이었다. 막 마차에서 내린 나는 뒤이어 내리는 그린과 레몬의 손을 잡아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결을 따라 벚꽃잎 하나가 내 눈앞으로 떨어졌다.

손을 뻗자 그 벚꽃잎은 내 손바닥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드디어 봄이구나.

내가 벚꽃잎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은 순간, 레몬이 입을 열었다.

“형수님, 그거 알아?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대!”

내 첫사랑이 이뤄지면 너희 큰일 나….

내가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머쓱하게 웃고 있던 그때 그린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형수님께는 필요 없겠네.”

레몬은 그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의미를 알아들은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나와 그린은 마주 보며 미소 지었고 아직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한 레몬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레몬을 달래주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한 순간이었다. 저택 문이 열리고 렌과 자스민이 강아지들과 함께 달려 나왔다.

“다녀오셨어요?”

둘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나는 모두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우리의 뒤를 따라 벚꽃잎이 들어왔고 이번에는 렌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것을 제일 먼저 목격한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를 털어 주었다.

그걸 본 레몬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헐, 언니 첫사랑도 이뤄지겠다.”

“도는 빼.”

그린의 단호한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고 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드디어 자신의 말에 호응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 기쁜 것인지 레몬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벚꽃잎 미신이야, 나는 원래 알고 있었고 그린은 그런 미신을 믿지 않아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으니 말이다.

내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레몬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리 언니가 알려준 건데, 떨어지는 벚꽃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대.”

역시 저 미신의 출처는 리리안이구나.

어디서 그런 것을 듣고 다니는지, 리리안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고 나이에 비해 조숙했다.

이상한 쪽으로 조숙해서 문제지.

리리안의 과거 어록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다 미신이야.”

렌은 단호하게 말했으나, 나는 보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붉게 물든 것을.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을 뿐, 렌은 얼굴은 다시 평소의 빛을 되찾았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인가?

내가 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그때, 그린이 입을 열었다.

“근데, 황녀님은 어디 가셨어?”

신년제가 끝난 뒤, 아필레는 황궁으로 돌아갔으나 리리안과 레이안은 델아트에 남았다.

아이들과 더 놀고 싶다는 것이 이유로 말이다.

레이안은 대부분의 시간을 토마와 함께 연무장에서 보내니, 저택에 없는 것이 익숙했지만 리리안은 아니었다.

저택 안이니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바로 물어봤어야 했는데 리리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필레는 나를 믿고 아이들을 맡기고 갔는데.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그때, 자스민이 입을 열었다.

“옷 갈아입고 내려오겠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 발소리를 내며 리리안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아무리 봐도 일상복이 아니었다.

챙이 넓은 모자와 움직이기 편한 원피스 낮은 구두까지.

어디 나가려고 하나?

“우리 다 같이 벚꽃 구경 가요!”

나도 가는 거구나.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리리안의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니, 정정하겠다.

레몬과 자스민의 마음에는 든 모양이었다.

별생각 없어 보이는 그린 그리고 렌과는 다르게 둘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봤으니 말이다.

벚꽃이라고 하면 바로 앞에도 많이 피어 있는데 굳이 멀리 가야 할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렌이 입을 열었다.

“엘리한테 가는 건 어때요?”

그러고 보니 엘리의 무덤 근처에도 벚꽃 나무가 정말 많이 있었지.

그 장소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에게 인사도 할 겸, 오랜만에 가는 것도 좋겠네.

“그러면 그렇게 하자.”

그렇게 우리는 공작가 근처 숲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벚꽃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는 그대로네.

마차에서 내린 나는 벚꽃 나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년 전 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벚꽃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나는 아이들을 기사들에게 맡긴 뒤, 렌과 함께 엘리를 찾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걷지 않아, 엘리의 무덤이 눈에 들어왔고 렌은 무릎을 굽혀 그 위의 벚꽃들을 쓸어 주었다.

하지만 렌은 모든 벚꽃이 사라졌음에도 몸을 일으키지 않고 계속해서 무덤을 바라봤다.

그때 강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 순간 렌은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바람 때문에 나는 그녀의 말을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엘리에게 인사를 마친 우리가 다시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있던 그때, 우리를 따라온 것인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토마와 레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더 걸어가자 꽤나 멀리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떨어지는 벚꽃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뤄져서 그러고 있는 거라고?”

어이없어 보이는 토마의 질문에도 레몬은 꿋꿋하게 팔을 휘두르며 벚꽃을 쫓아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내가 알려줬어.”

리리안까지 거들자, 토마는 머리를 짚었다.

레이안은 이 상황이 재밌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그린은 읽고 있는 책에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아니, 벚꽃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책 읽는데 자꾸 떨어지네, 거슬리게.”

좋은 이유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린이 중얼거리며 책을 털어낸 순간 그에게 다가온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너에게는 낭만과 동심이 부족해.”

“필요 없습니다.”

“어릴 때만 누릴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야.”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거야?

스무 살은 족히 된 것 같은 리리안의 말에 나는 생각했다.

동심은 리리안 너도 필요한 것 같은데.

그 순간, 그린의 책 위로 벚꽃잎이 하나 더 떨어졌고 그것을 주워 든 그린은 리리안에게 내밀었다.

“그러면 제 거 드릴게요, 황녀님의 첫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겠습니다.”

리리안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지만, 싫지는 않은 듯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그렇게 리리안은 그린의 벚꽃잎을 든 채 아이들 쪽으로 향했고 그린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각 토마는 오빠로서 레몬의 동심을 지켜주기로 한 것인지 가만히 앉아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벚꽃잎을 못 잡는 레몬의 모습이 조금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왜 이걸 못 잡아?”

앉은 자리에서 놀라운 동체 시력과 순발력으로 순식간의 다섯 개의 벚꽃잎을 잡은 토마가 입을 열었고 레몬은 볼을 부풀렸다.

“오빠가 잘하는 거야, 힘들다고.”

답답함에도 토마는 인내심을 발휘해 레몬의 모습을 지켜봐 주었다.

하지만 그 인내심은 나와 렌이 그들에게 다가갔을 때, 동이 나고 말았다.

답답해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인지 나에게 인사를 한 뒤 멀리 떨어져 칼을 뽑아 든 토마는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둘렀다.

아니, 허공에 대고 휘두른 줄 알았다.

그의 검에 반으로 잘린 벚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레몬,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토마가 잘하는 게 맞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토마는 요리조리 뛰어다니는 레몬을 보고 있는 레이안을 부르며 팔을 흔들었다.

“너도 와, 이안. 같이 하자.”

그의 부름에 레이안은 레몬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에게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안은 그와 마찬가지로 한 번 만에 떨어지는 벚꽃을 잡아챘다.

주먹을 살짝 펴 벚꽃을 잡은 것을 확인한 레이안은 다시 주먹을 쥐고 레몬에게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내가 잡은 거라도 괜찮으면, 너 줄게.”

레이안이 주먹을 펴자, 그의 손안에서 떨어진 벚꽃이 레몬의 손 위로 내려앉았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 떨어진 벚꽃을 보며 레몬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레이안은 토마에게 달려가 검을 뽑아 들고 그를 따라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열심히 노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같은 벚꽃으로도, 이렇게 다르게 즐길 수가 있구나.

그렇게 각자의 방법을 벚꽃 구경을 실컷 한 우리는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자리를 정리했다.

강아지들에게 붙은 벚꽃잎을 털어 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마차에 오르려는데,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먼발치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바리다스의 모습이 보였다.

딱 돌아가려는 타이밍에 도착한 그를 보며 자스민과 렌이 입을 열었다.

“조굼만 더 일찍 오지.”

“아니면 더 있다가 갈까요?”

어쩔 줄 몰라 하는 렌의 모습에 말에서 내린 바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를 보러 온 것이고 내가 늦은 것이니, 괜찮단다. 신경 써 줘서 고맙구나.”

하지만 그의 말에도 다른 아이들이 괜찮지 않은 듯했다.

그때 마차의 창문을 열고 살짝 고개를 내민 토마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끼리 돌아갈 테니, 두 분은 산책이라도 하고 올래요?”

그리고 바리다스는 그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작게 미소 지으며 손을 뻗어 토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럴까요?”

이 상황에서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를 안아 들고 말 위에 내려놓은 그는 내 뒤에 올라타 고삐를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첫 번째는 말등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엄청나게 시원하고 재밌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빨리 달려본 것이 언제더라.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소 지었다.

봄의 숲은 아름다웠고 적당히 빠른 속도와 부드러운 바람은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바리다스는 흰색의 꽃이 가득 핀 장소에서 말을 멈춘 뒤 나를 안아 들었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처음 보는 우아한 모습에 흰색 꽃이 잔뜩 피어 있는 숲의 모습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나는 입을 열었다.

“예쁘네요.”

내 말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춘 바리다스는 걷기 시작했다.

…근데, 왜 안 내려 줘?

나는 나를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바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음에도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저도 다리 있는데요.”

내려달라는 의미를 담아 입을 열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대답하라고 한 말이 아니잖아.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러지?

“그런데 왜 안고 있어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해야, 입 맞추기 편하니까?”

고개를 내린 바리다스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약간의 간격을 두고 나를 바라보았고 한결같은 그의 모습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 생각 없이 안고 온 거면서.

핑계를 대면서도 내 허락을 기다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네, 괜찮아요.”

나와 그의 입술이 맞닿았고 나는 눈을 살며시 감으며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이곳이 소설 속이라면 이 말로 끝이 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말이다.

167378407770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