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30)화 (130/207)

외전 1. 예린의 생일.

언제나처럼 박하와 커피향이 맴도는 집무실 안, 바리다스는 장부를 읽고 있었다.

어지간한 백과사전보다 두꺼운 차일드 가의 장부에는 공작가의 내부 재정과 사건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그때 무표정하게 책장을 넘기던 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페이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제국력 16XX년, 1월, 6일. 데이먼 제국의 황녀께서 델아트에 도착.]

예린이 이 세계에 온 날이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 한참이나 그 구절을 읽던 바리다스는 페이지를 넘겼다.

그렇게 다시 미소를 지운 바리다스가 진지하게 장부를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까와 같은 미소가 아니라 당혹감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하나의 단어가 쓰여 있었다.

바로, 생일 말이다.

예린이 이 곳에 온지도 이 년, 하지만 바리다스는 아직도 그녀의 생일을 모르고 있었다.

스스로의 생일도 챙기지 않는 그와는 다르게 예린은 다른 사람들의 생일을 꼬박 꼬박 챙겨주었다.

바리다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고.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스스로를 자책하며 바리다스는 표정을 구겼다.

예린의 올해 생일을 꼭 챙겨주어야겠다. 결심했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는 그녀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알고 있지 않았다.

바리다스의 등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애초에 예린이 그에게 자신의 생일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었지만, 바리다스는 이미 죄책감에 휩싸인 뒤였다.

더 빨리 물어봤어야 했다.

이 년이나 지난 지금 물어보는 것은 조금 미안하지 않은가.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였지만 이미 그것들은 예린에 밀려 뒷전이 되어 있었다.

바리다스의 머릿속에는 이미 예린과 생일, 그 두 단어로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다.

바리다스가 한참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그때 문이 열리고 크림슨이 양 손 가득 서류를 든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바리다스의 상태를 보고 직감했다.

또, 마님 생각 중이시구나.

저 상태의 공작님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마님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크림슨은 한숨을 내쉬고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저 서류들 내일 까지는 받을 수 있겠지?

급한 계약 건도 끼어 있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맨 위에 올라가 있는 두 서류는 빠르게 결재 부탁드리겠습니다.”

크림슨은 바리다스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할 말을 마친 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손이 문고리에 닿은 순간, 바리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부인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고 있나?”

바리다스의 질문에 크림슨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망설였다.

애처가로 소문난 공작님이, 마님의 생일을 모를 리 없으니 이건 분명 자신에 대한 테스트가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크림슨은 눈을 반짝였다.

그는 예린과 바리다스의 생일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생일, 차일드 가의 경조사, 심지어는 강아지들의 생일까지도 외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에게 공작부인의 생일 정도의 문제는 너무나 쉬웠다.

다만, 바리다스가 원하는 것은 피오라가 아닌 예린의 생일이었지만.

“6월 14일 5시 37분입니다.”

그제서야 바리다스는 깨달았다.

크림슨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봤자, 예린이 아닌 피오라의 생일을 알려 줄 것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되면 당사자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크림슨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가 봐.”

그것은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그렇게 집무실 밖으로 나온 크림슨의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설마, 마님의 생일을 착각한 건가?

그럴 리 없을 텐데.

바리다스의 상황을 모르는 크림슨의 속은 바싹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바리다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시, 당사자에게 물어봐야 하나.

크림슨이 나간 방 안,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예린이 내려주고 간 아메리카노를 바라봤다.

최근 바리다스는 라떼 대신,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를 못 마시는 그를 위해 예린이 시럽을 고안해 낸 덕분이었다.

시럽을 잔뜩 넣어 내린 아메리카노는 바리다스도 쉽게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달콤하고 맛있었으니 말이다.

예린을 떠올리며 미소 지은 바리다스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홀짝였다.

딱 그가 선호하는 정도의 달콤함이 입 안에 맴돌았다.

당신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나는 가끔 어떤 보답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어.

자신의 진짜 가족이 되어 준 것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 준 것도.

전부 다, 당신이라.

모든 것을 줘도 부족할 따름인데,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죄책감과 때문인지 입 안에 남은 커피의 향이 오늘따라 떫게 느껴졌다.

* * *

그 시각, 두 남자가 고민에 빠진 것을 알 턱이 없는 나는 실비아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 있었다.

그녀의 생일 파티는 웨일즈 가문의 정원에서 개최되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거대한 규모였다.

웨일즈 가의 스케일에 놀란 것도 잠시,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실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생일을 맞이해서 그런 것인지, 실비아는 오늘따라 더 즐거워 보였다.

그녀에게 다가간 나는 직접 고른 루비 목걸이를 건네며 작게 미소 지었다.

“생일 축하해, 실비아.” 

내 등장에 실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끌어안았다.

조금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으나, 파티에 참석한 사람 대부분이 실비아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웃음을 터트릴 뿐 그 누구도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잠깐의 포옹이 끝난 뒤, 나보다 키가 조금 큰 그녀는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내게 시선을 맞춰주며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감사해요, 공작부인.”

그녀에게 선물을 전달해준 뒤, 나는 행복해 보이는 미렐의 모습을 보며 딸기 케이크를 오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뒤로 생일을 챙긴 적이 없네.

피오라의 생일은 6월로 1월인 나의 생일과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에 관해서 딱히 신경 쓴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쯤이면 데이먼 제국에서 선물이 도착했기에 생일이 언제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생일을 챙긴 기억은 없네.

물론 아이들과 다른 귀족들에게 축하를 받긴 했으나, 그건 내 생일이 아닌 피오라의 생일이었으니까.

뭐, 나는 내 생일보다 남 생일 챙겨주는 것이 더 좋아서 딱히 상관없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크 위에 올라가 있는 딸기를 입 안으로 쏘옥 집어넣었다.

좋은 딸기를 사용한 것인지 달콤하고 상큼한 딸기의 맛이 느껴졌다.

오늘 집에 가면, 딸기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어.

나는 그렇게 결심하며 딸기 케이크를 한 조각 더 가져왔다.

따뜻한 밀크티와 함께 케이크를 먹다 보니,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자스민의 생일이구나.

올해 선물은 뭘로 해 줘야 기뻐할까.

작년에는 마법 서적을 주었으니, 이번에는 서재를 만들어 줄까?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택에 남는 방은 많으니까, 바리다스와 함께 의논해 봐야겠어.

서재를 받고 기뻐할 자스민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공작부인의 생신은 언제인가요?”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언제 온 것인지 미넬이 내게 질문을 건넸고.

“일월 십칠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실수로 진짜 생일을 말해 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내가 해명하려는 그 순간, 언제 온 것인지 실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부인의 생신은 유월 아니었어요?”

큰일 났다.

어서 해명을 해야 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변명거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냥 헷갈렸다고, 우기려는 그 순간.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먼과 크레센트가 사용하는 달력이 달라서 그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마리였다.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거침없이 다가온 그녀는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내게 인사했다.

몇 년 전 있었던 그 사건 이후로 딱히 엮일 일이 없었기에, 마리와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부인.”

한층 더 아름답고 성숙해진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그런 그녀의 미소에서는 사악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실비아와 미렐 같은 좋은 친구가 곁에 있어 준 덕분이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마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내가 당황하기 무섭게 마리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예전 멍청했던 저의 실수를 아무런 질책 없이 용서해준 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은 사죄라 염치없는 것 같지만, 공작부인께서 괜찮으시다면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마리가 사과를 할 줄은 몰랐던 것인지, 그녀의 등 뒤로 놀란 표정의 미렐과 실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다시 마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말 반성하고 있는 것인지, 눈을 내리 깔고 청초하게 손을 모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예쁘네.

뭐라고 해야지, 항상 쎈 느낌으로 화장하던 연예인이 청순한 느낌으로 화장을 했는데 그게 너무 잘 어울리는 그런 느낌.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먹에 힘을 주고 마리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전에 비해 많이 성숙해지고 철이 들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반성도 충분히 한 것 같고 이런 곳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알기에 나는 마리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발뒤꿈치를 든 나는 마리에게 손을 뻗었다.

내 행동의 의미를 파악한 것인지 그녀는 허리를 숙여 나와 키를 맞춰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쉽게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었다. 내 키가 그녀보다 작기에 조금 어색한 모습이긴 했지만 말이다.

손을 땐 나는 미렐과 실비아를 한 번씩 바라본 뒤 작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는 영애도 같이 공작가에 오도록 해요.”

내 말에 옆에서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실비아와 미렐의 표정이 밝아졌고 마리 또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꼭 방문하겠습니다.”

그녀의 미소에 왜인지 뿌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미래 중, 내가 선택한 미래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게 만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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