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예린의 생일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때, 갈색 머리를 한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내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한 그 남자는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부인. 사비튼 남작가의 차남, 리몬이라고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와, 단정한 복장.
평범하지만 호감이 가는 외모까지.
나는 그를 정확하게 표현 할 수 있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 남자, 상견례 프리패스상이다.
“반가워요.”
내 말에 리몬은 허리를 든 뒤,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진짜 예의 바르네.
나는 그의 행동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저런 남자라면 우리 미렐과 실비아를 시집보내도 되겠어.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몬의 다음 말이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실례지만, 제 약혼녀를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정중한 것까지 정말 완벽한 신랑감… 어?
깜짝 놀란 내가 리몬을 바라보자, 그는 마리의 손을 잡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마리 또한 붉어진 얼굴에 미소가 자리했다.
예전처럼 사랑과 질투가 뒤섞인 표정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말하는 듯한 행복이 가득 묻어난 미소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본 나 또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바뀐 것은, 나 때문만이 아니었나.
작게 미소를 지은 나는 마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나중에 또 봐요. 마리.”
내 말에 두 사람은 인사를 한 뒤 떠나갔고 내가 미소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도수가 낮은 술을 들이켠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참하고 조신한 남자 안 나타나려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에서 술을 빼앗은 미렐이 입을 열었다.
“나타나도 너랑은 안 만나.”
아, 순간적으로 웃을 뻔했다.
둘이 정말 친한 친구구나.
내가 웃음을 참고 있던 그때, 미렐을 노려본 실비아는 그녀의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만 빼고 다 약혼자가 있지.”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안겨왔다.
실비아는 아무래도 조금 취한 것 같았다.
“역시 제게는 공작부인 밖에 없어요.”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며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미렐 또한 내게 안겨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작부인에게는 너 말고 공작님도 계시고 나도 있는걸.”
그렇게 말하며 두 소녀는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귀여운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부인. 오랜만이야 실비아.”
이번에 우리에게 다가온 청년은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실비아와 미렐의 아카데미 친구이자. 몇 주 전, 미렐과 약혼식을 마친 카이도 남작가의 장남 웰피튼이었다.
다 실비아가 초대한 사람이겠지만, 이거 실비아의 생일 파티가 아니라 데이트 장소가 되어 버린 것 같은데.
왜인지 실비아가 조금 서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인사를 한 뒤, 미렐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 웰피튼은 실비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스무 번째, 생일 축하해. 실비아.”
라고 말하며 그는 실비아에게 돌돌 말린 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미렐은 그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으나, 나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선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대체 뭐지?
편지는 아닐 테고 …그렇다면 집문서인가?
웰피튼의 가문인 카이도 남작가는 부동산을 포함에 여러 오페라와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실비아를 바라보자 그녀 또한 선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괜찮다면 지금 열어봐.”
그 순간 들려온 미렐과 웰피튼의 말에 실비아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분홍색의 끈을 풀고 종이를 펼치자, 선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누군가에게는 낙서였지만, 누군가에게는 명화보다 값진 것이 될 수도 있는.
웰피튼의 선물은 바로.
실비아가 사랑해 마지않는 엘시디어스의 친필 사인이었다.
저걸 어떻게 구했데.
엘시디어스가 있는 극단은 현재 전국을 돌며 공연하고 있었기에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마음에 들어?”
웰피튼의 질문에 실비아는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엘시디어스의 사인을 바라보던 실비아는 이제 좀 진정이 된 것인지 웰피튼과 미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당장 데이트 하러 가. 누가 오늘이 내 생일이랬어. 사실 둘의 데이트를 위한 장소였어.”
그녀의 귀여운 반응에 실비아와 웰피튼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웰피튼은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벌써부터 그런 반응이면, 큰일인데.”
“그러게.”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킥킥거린 두 사람은 실비아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것도 지금 열어봐.”
웰피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실비아는 그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들었다.
상자를 열자, 푸른빛의 동그란 보석이 영롱한 빛깔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거, 영상구잖아.
내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영상구에서 반짝이는 빛과 함께,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상 속의 인물은 당연하게도 엘시디어스였다.
“안녕하십니까, 웨일즈 영애. 라이란 극단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엘시디어스라고 합니다.”
영상구 안에서 엘시디어스의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실비아는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과거 서부에서 몇 번 뵌 것 같은데, 꾸준히 저를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무 번째 생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연기하겠습니다. 감사하고, 다시 한번 생신 축하드립니다.”
와, 이건 진짜로 최고의 선물이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실비아는 감사 인사도 잊은 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영상구를 돌려 보았다.
하지만 그 둘에게는 그 행동이 어떠한 감사 인사보다 값지게 느껴졌을 것이었다.
실비아가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실비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남친 같은 거 없어도 될 거 같아.”
그건 너희 부모님께서 반대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비아가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뭐가 중요하겠어.
아마 미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나랑 쭉 같이 살아.”
실비아를 꼭 껴안으며 미렐이 말했고 그녀의 말에 웰피튼의 표정이 조금 굳기는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 것인지 별말은 하지 않았다.
미렐과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지만.
저걸 보니, 웰피튼이 미렐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렐을 꼭 껴안은 실비아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고마워.”
그러고는 미렐의 품에서 벗어나 내게 달려왔다.
“공작부인도,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는 실비아는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 나는 그녀를 강하게 안아 주었다.
“그래, 생일 축하해. 실비아.”
그 순간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실비아의 아카데미 친구들이 몰려온 것은.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달려온 그들은 기차 시간 때문에 늦었다는 말과 함께 실비아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왜 이리 규모가 큰가 했더니, 아카데미 친구들 때문이었구나.
조금은 휑해 보였던 정원이 순식간에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실비아 또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비아 정말 인싸구나.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쁜 얼굴에 부유한 가문, 거기에 착하고 성격까지 좋으니까.
거기다가 아카데미 시절, 늘 높은 성적까지 유지했으니.
헉, 잘 생각해보니 우리 실비아 너무 최고잖아.
“…우리 실비아는 대체 못하는 게 뭐지.”
내가 작게 중얼거린 그 순간 그녀의 친구들이 소리쳤다.
“연애요!!”
그리고 그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비아 또한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거든!!!”
그녀의 말에 나와 그들은 다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은 실비아의 주위에 몰려들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대부분 실비아와 동갑일 테니, 딱 대학교 신입생일 나이구나.
정말 귀여울 때네.
더 있어 봤자, 애들 노는데 방해나 될 것 같은데.
이제 돌아가 봐야겠다.
왜인지 대학교 신입생들 사이에 낀 화석 선배가 된 기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실비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먼저 돌아갈게, 나중에 보자.”
친구들과 노는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입 모양으로 작게 속삭이자, 실비아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의 친구들로 북적북적해진 정원을 뒤로하고 마차를 타러 가던 그 순간, 내 눈에 로브를 쓴 푸른색 머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생일 파티에 왔다기엔 조금 수상한 차림새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그렇게 고민하길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엘시디어스 아니야?
누군지는 몰라도 실비아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부른 것 같았다.
여기서 아는 척 해 봐야 실례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엘시디어스를 모른 척 지나쳤다.
누가 그를 초청한 것인지는 몰라도, 실비아를 많이 아끼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사실 누가 부른 것이 아닌, 그가 직접 실비아를 보기 위해 생일파티에 온 것을 내가 알게 되는 것과.
한 유명 뮤지컬 배우가 회색 머리의 소녀와 스캔들이 나는 건, 아직은 먼 훗날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