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42)화 (142/207)

4. 토마와 렌의 아카데미

밝은 하늘 아래.

레이안의 백금발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랬기에, 페인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저런 머리색을 한 소년은 제국에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황태자.

저 사람이 왜 공작가의 사생아를 위해 나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가 난 이유는 확실했다.

자신이 공작가의 사생아를 모욕했기 때문에.

갑자기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반항 없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나는 것으로 레이안의 손을 뿌리친 페인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태자 저하.”

자신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듯이 말하는 실로 뻔뻔한 태도에 레이안은 작게 혀를 찼다.

그래, 증거가 없다 그거지?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훈련을 멈춘 기사들이 수군거리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레이안이 먼저 그에게 시비를 건 것으로 보일 것이었다.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친 레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레이안에게도 방법이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보았는데, 경의 실력이 매우 뛰어나더군. 괜찮다면 우리와 대련을 해줄 수 있겠나?”

순식간에 정중해진 말투와 행동으로 레이안은 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데다가, 페인의 성격으로 보건대 그는 토마와의 대련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으니까.

레이안의 말에 페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레이안의 말은.

네가 그렇게 무시하는 사생아가.

너보다, 실력 좋아.

내가 보증할 정도로.

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 말이다.

페인은 현 학년 수석이었다.

뛰어난 재능과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아온 뛰어난 센스, 그 또한 천재까진 아니더라도 수재라 불릴 정도는 되었다.

페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랬기에, 페인에게는 그의 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입학시험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레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 저하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정중한 대답이었으나, 말에 뼈가 있었다.

황태자가 부탁하는데 대체, 누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라는 의미가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레이안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어떻게든, 저 자존심과 자신감을 뭉개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토마를 바라본 레이안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대, 토마.”

박살 내 버리고 와.

진짜 천재를 만나보지 못한, 저 수재의 오만한 자존심을.

레이안의 말에 토마는 망설임 없이 페인에게 향했다.

자신의 친구가 몸소 나서 만들어 준 기회를 발로 걷어찰 정도로 토마는 멍청하지 않았다.

토마는 레이안에게 고맙다는 생각과 동시에, 자신에게 화가 났다.

저런 모욕을 들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해, 친구를 나서게 만든 자신의 나약함이 말이다.

예전부터 들어온 말이니, 익숙해졌다. 라는 생각은 정말로 멍청했다.

자신이 페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가문과 동생들까지 같은 모욕을 듣게 만든 것이었다.

“고마워.”

레이안에게 작게 속삭인 토마는 페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부터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최소한의 격식만을 차린 대답이었다.

그의 대답에, 토마 또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친 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목검 하나를 주워들었다.

서로에게 경례를 한 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다른 학생들 또한 어느새 그들의 주위로 몰려들어 구경을 하고 있었다.

수재라 불리는 학년 수석과 검술 명가의 자녀이자 소드 마스터의 동생.

이 사실 만으로도 그들의 이목을 주목시키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약간의 긴장감이 맴돌았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나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검이 공중에서 맞물렸다.

손이 저릿하게 떨려왔다.

확실히 페인은 토마가 지금까지 상대해 온 사람들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의 실력자였다.

검을 맞댄 상태로 힘을 겨루던 두 사람은 힘을 풀고 뒤로 한 발짝씩 물러났다.

이것 또한, 같은 타이밍이었다.

그 순간, 토마는 알 수 있었다.

페인이 바리다스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바리다스와 여러 번 대련을 해온 토마로서는 느끼지 못할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제서야 토마는 페인이 왜 자신을 싫어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해서,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평정심을 찾기 위해 작게 심호흡을 한 토마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그 또한, 바리다스처럼 되고 싶었다.

그 어떤 기사가 그러지 아니할까.

토마는 바리다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자 했고, 바리다스가 연무장에 오는 날이면 훈련을 멈추고 그를 관찰했다.

지금 당장의 실력 자체는 페인이 더 뛰어났다.

당연한 말이었다.

토마는 검을 잡은 지, 불과 삼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페인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았으니.

다만 이것은 상성의 차이였다.

지금까지 진짜 바리다스를 상대해 온 사람 앞에서 어설프게 바리다스를 흉내 내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있을까.

그렇게 토마와 스무 번쯤 합을 주고받던 페인은 방법을 바꾸려 한 것인지 방향을 틀어 아래로 파고들었다.

이것 또한 바리다스가 토마에게 알려준 것들 중 하나였다.

형님이라면, 여기서…

검이 아니라, 목을 노리겠지.

그의 형은 언제나 실전처럼 대련에 임하였으니까.

토마는 방금처럼 검을 맞받아치지 않고 몸을 돌리는 것으로 페인의 검을 피했다.

이걸 피한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페인의 눈이 커졌다.

페인의 검이 토마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

알고 있기에, 피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공격이 실패하게 된다면 균형을 잃고 몸이 아래로 쏠리게 되었다.

바리다스가 이 방식을 채용할 수 있던 이유는 그의 균형 감각이 엄청 뛰어나기 때문이었지.

그가 아니라면 누구나 이렇게 될 것이었다.

이 공격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페인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토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토마의 검 끝이 페인의 목에 닿았다.

대련의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은 둘 중 한 명이 검을 떨어트리거거나 이 상황이 실전이라는 가정하에 죽는 상황이 나왔을 때, 두 가지였다.

승패를 결정지은 토마가 검을 아래로 내렸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페인은 토마의 말이 들린 순간까지도 결과를 납득하지 못한 듯했다.

토마가 내민 손을 잡지 못하고,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페인은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페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레이안은 입을 열었다.

“조금 힘들어 보이는군, 나는 다음에 상대해줘도 괜찮네.”

페인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페인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번 이겼다고, 우쭐대지 마십시오.”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살벌했다.

그의 짙은 푸른색의 눈이 토마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차일드 가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해도, 당신이 사생아인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

끝까지 시비를 거는 페인의 말에 발끈한 레이안이 나서려는 순간, 토마가 그를 막아섰다.

승패를 납득하지 못하고 끝까지 발악하는 그의 모습이, 추하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린 토마는 입을 열었다.

“저는 사생아도 아닐뿐더러, 형님께서 인정한 차일드 가의 후계자 중 한 명입니다.”

형님, 이라는 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레이안의 착각이 아닐 것이었다.

이래야, 내 친구답지.

레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페인이 연무장을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친 것은.

“웃기지 마! 너 따위가 차일드 가의 일원이라니, 나는 절대 인정 못 해!!!”

질리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익숙해질 정도로 말이다.

형님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겠지.

너 따위의 인정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그 사실에는 당신의 인정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차일드 가의 일원을 정하는 데에 너의 인정이 왜 필요하지?”

그 목소리의 주인은, 토마와 페인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차가운 시선을 바라보고 있는 바리다스의 붉은 눈을 보는 순간, 페인은 바닥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동경해 온 사람에게 받는 차가운 시선은 아직 어린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으니 말이다.

표정을 굳힌 채, 페인에게 다가온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왜 필요하냐 물었다.”

그건 명백한, 살기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페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방금까지 당당하게 토마에게 소리 지르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그 어떠한 변명도 없이 잘못을 인정한 페인은 고개 숙여 바리다스에게 사과를 할 뿐이었다.

“그 어떤 사람도 내 동생에게 자격을 논할 수 없다.”

그건 페인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경고와도 같았다.

토마가 명백한 차일드 가의 후계자라고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