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45)화 (145/207)

7. 또 다른 빙의자

“렌?”

지금 아카데미 내에서 자신을 붙잡을 만한 사람은 렌이나 옆에 있는 레이안 뿐이었기에.

토마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토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렌이 아닌 회색 머리의 작은 소녀였다.

아카데미 대부분이 비슷한 나이였으나 그 소녀는 토마와 거의 삼십 센티 정도가 차이 났다.

자스민보다 작은 것 같네.

토마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잡고 있는 손을 힐끗 바라보자, 바로 손을 뗀 소녀는 얼굴을 붉혔다.

언제나 당당한 사람들만 주위에 있던 토마로서는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만 그의 그런 생각은, 그녀의 다음 대답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주먹을 강하게 쥔 그녀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좋아해요!!”

그 말에 당황한 것은, 그 자리에 있던 토마와 레이안뿐이 아니었다.

저게, 뭔 말이야?!

아이들이 시험을 끝낸 시간에 맞춰 그들을 데려가기 위해 아카데미에 들어온 나와 바리다스도 그녀의 말을 듣고 말았으니까.

아니, 고백을 받을 수 있지.

연애도 할 수 있지.

다 이해해.

근데 너희 언제 만났다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라이온 아카데미에 온 뒤로 나와 바리다스는 아이들과 하루 종일 같이 있었기에.

두 사람이 오늘 처음 만났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소녀 또한 토마가 당황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첫눈에 반했어요!”

그래, 그렇다면 납득이…

가나?

너무 당당해서 순간적으로 속을 뻔했다.

뭐, 어차피 결정은 토마가 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누구를 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낯이 익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그 순간,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저 소녀와 같은 회색 머리를 한 내 친구가 말이다.

…실비아!!

실비아의 동생인가?

잘 생각해 보니, 과거 실비아에게 동생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실비아의 동생이야, 착하게 거절해 줘.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토마의 정중한 거절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소녀의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기뻐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려나.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소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분명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그 말에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말았다.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했는데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내 머릿속에 과거 실비아가 했던 말과 몇 가지 사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 시대에서 만들었다기엔 너무나 신축적인 백화점과 현대인이 즐겨 먹던 간식 중 하나인 민트초코 그리고 자신의 동생이 사차원이라는 실비아의 말.

혹시, 실비아의 동생도 나처럼 빙의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앞뒤가 맞아 떨어지긴 했으나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나처럼 이 세계를 책에서 접한 것이라면 바뀐 미래에 의문을 가질 텐데.

왜 그러지 않지?

한 번, 확인해 볼까.

결정을 내린 나는 망설임 없이 세 아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얘들아, 데리러 왔어.”

내 말에 세 아이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향했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소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커졌다.

역시.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공작부인. 실비아 언니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루비아 웨일즈라 합니다.”

놀랐던 이유가 내가 살아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만나서인가.

잘 생각해보니, 실비아에게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충분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텐데 놀라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렇다면, 내 예상이 틀렸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나처럼 이 세계가 살아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거겠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을까.

“영애가, 실비아의 동생이군요. 반가워요.”

내 말에 루비아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나와 바리다스에게 한 번 더 인사를 했다.

그렇게 우리가 인사를 마친 순간, 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어서 가요, 렌이 기다릴 거예요.”

레이안은 아무래도 루비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의 말에 시선을 살짝 돌려 루비아를 바라보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경황이 없어 시간을 뺏었네요, 다섯 분 모두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그렇게 루비아가 사라지자마자, 레이안이 토마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난 너, 아무한테나 장가 못 보내.”

그의 말에 토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나 또한, 레이안의 말에 동의했다.

어떻게 아무한테나 장가를 보내겠는가, 예쁘고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무튼 여러 가지 조건에 부합한 사람에게 보낼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는 바리다스 또한, 동의하는 듯했다.

“연애도 좋은 사람이랑 하는 편이 좋단다.”

그들의 말에 토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지금 당장은 할 생각이 없다니까요!”

토마가 큰 목소리로 소리친 순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렌의 모습이 보였다. 데리러 오기로 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우리가 오지 않자 결국 먼저 찾아온 것이었다.

“오빠, 연애해?”

렌의 말에 토마는 결국 머리를 짚었다.

“…안 해.”

“그래, 우리 나이에 무슨 연애야. 조금 더 크고 해도 늦지 않아.”

이어진 렌의 말에 완전히 지친 표정이 된 토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봐, 너희 다 알면서 나 놀리는 거지.”

토마의 말에 시선을 교환한 렌과 레이안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여기서 진심이었던 사람은 나와 바리다스 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뭐 어떤가, 너희가 좋으면 됐지.

“그래서, 다들 시험은 잘 봤니?”

내 말에 다시 한번 시선을 교환한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저는 합격 할 것 같아요.”

“당연하죠.”

각자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답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다 같이 시내 구경하면서 맛있는 음식이나 먹으러 가자!”

내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맛있는 음식 때문이 아니라, 시내 구경 때문에 말이다.

시내에 도착하면 바리다스와는 또 따로 다녀야겠네.

렌은 서점에, 두 아이는 무기점에 가고 싶어 할 테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래, 한 시간 전만 해도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내 예상대로 바리다스는 토마, 레이안을 데리고 무기점에 나는 렌과 함께 서점에 오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분명, 내 예상과 일치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내 앞에 앉아 민트 초코 라떼를 마시고 있는 루비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루비아와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녀 또한 볼일이 있어서 간 서점에 우연히 나와 렌이 들어간 것이다.

이 근방의 수많은 서점 중에 하필 같은 곳으로 들어가 만나게 됐다.

아니, 잘 생각해 보니 우연이 아니었다.

이 서점은 실비아와 미렐이 알려준 책의 상태가 가장 좋은 서점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루비아는 실비아와 함께 서점에 온 것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만난 김에 자신이 책을 추천해 주겠다고 렌을 데려간 실비아를 바라봤다.

그들은 조금 먼발치에서 대화를 나누며 책을 고르고 있었다.

너무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황하긴 했으나, 오히려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루비아와 이야기를 하겠는가.

지금이 아니라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를 텐데.

내가 무어라 운을 띄워야 할지 고민하던 그 순간, 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공작부인은 혹시, 빙의자인가요?”

내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강렬한 직구로 말이다.

순간적으로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아니, 옷과 얼굴에 튀지 않는다면 뿜는 게 나았으려나.

커피를 잘못 삼켜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추태인가.

아니,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침착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옆에 준비되어 있던 물을 마셨다.

그리고, 이미 다 티를 낸 것 같지만.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연기를 시작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웨일즈 영애.”

하지만 루비아는 이미 내 반응에서 확신 아닌 확신을 한 것 같았다.

아까보다 더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너무나도 당돌한 태도에 나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건, 확신할 수밖에 없잖아.

내가 먼저 들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한숨을 내쉰 나는 입을 열었다.

“이미 확신하신 것 같으니, 더 숨기는 것은 의미 없겠군요.”

내 말에 루비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얘도 나처럼 생각이 얼굴로 다 드러나는 편인가 보네.

이게 연기라면, 얘는 전생에 배우였을 거야.

내 생각은 표정만 봐도 다 안다고 했던 바리다스의 말이 이해 가는 순간이었다.

“성녀님께 다른 빙의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다른 빙의자는 처음 만나봐요!”

왜, 루비아가 원작병에 걸리지 않았는지 이해가 갔다.

그녀도 나처럼 유아에게서 이 세계에 대해 설명을 들은 것이었다.

루비아가 정말로 착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되었다.

잠시만, 근데 너 몇 살이야.

지금 말고, 전생 나이.

설마 스무 살이 넘어가는데 양심 없게 토마에게 고백한 것은 아니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루비아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자기소개나 할까요? 이곳 말고, 지구에서의 이름으로.”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올해로 스물일곱이 된, 이예린입니다.”

내 말에 루비아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삼 년 전에 빙의했으니, 올해로 초등학교 육 학년, 최아영입니다.”

자기가 너무 어려서 당황한 거였구나.

아니, 학년으로 말하는 거 왜 이렇게 귀엽지.

저절로 엄마 미소가 지어지는 귀여운 행동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하는 손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금 놀랐어요. 공작가의 아이들을 읽은 어른이 계시다니.”

?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실비아가 말을 덧붙였다.

“제 친구들도 그 책, 유치하다고 안 읽었거든요.”

그래서 당황한 거였구나.

악의 없는 말이었지만 왜인지 마음이 아파왔다.

내 수준이 초등학생보다 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언니, 아니 이모가… 재미있게 읽어서 미안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그 순간, 언제 온 것인지 렌과 실비아가 책을 산더미처럼 들고 등장했고.

나와 루비아는 동시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 실비아는 루비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또 빙의니 뭐니, 이상한 소리 하고 다녔지.”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랬던 거야?

이번에는 그냥 운 좋게 얻어걸린 거였고?

진짜, 어린 애구나.

나는 실비아의 말에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버리는 루비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흥, 언니는 내 마음 몰라.”

그녀의 말에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루비아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입을 열었다.

“공작부인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냐, 나도 빙의자라 괜찮았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곤란하지 않았어. 그렇지 루비아?”

내 말에 루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조르르 달려와 나를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봬요, 꼭!”

그 행동에서, 왜인지 루비아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떨어져 적응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른인 나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말이다.

루비아가 왜 그렇게 빙의자를 찾아다녔는지, 나는 왜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고향이, 그리웠던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그것이 나와, 이 이상한 빙의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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