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루비아
“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렌이 뒤를 돌아보자 함께 서 있는 토마와 레이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렌이 자신을 돌아보자 씩 웃은 토마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입을 열었다.
“밥 먹으러 가자.”
입학식이 끝나고 오 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길다고는 보기 힘든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아이에게는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국의 황태자인 레이안은 원래부터 평가가 좋았으나, 토마와 렌은 델아트가 위치한 서부의 귀족들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이미지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귀족들은 혈통과 명예를 중요시했다.
그런 그들에게 평민의 자식이자 사생아인 아이들은 좋게 보려 해도 좋게 볼 수 없었다.
귀족들은 바리다스 또한 당연히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혐오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을 깨고 공작은 그들을 자신의 동생이자 가족으로 인정했다. 그가 인정한 이상 귀족들은 더 이상 아이들을 건들 수 없었다.
그들은 이제 차일드 가의 사생아가 아니었으니까.
그 사실은 렌과 토마 또한 체감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쏟아지는 동경의 시선과 부러움.
공작가의 자제, 황태자의 친우, 각 학과의 수석 입학생.
안 그래도 주목받던 토마와 렌은 저런 이유로 인해 더더욱 주목과 부러움을 받게 되었지만 토마와 렌은 이 상황이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지.
귀족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던 두 사람으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토마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는 레이안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이안 또한, 황태자라는 위치에 있기에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가오는 귀족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레이안은 황태자라는 위치 때문에 그들을 쉽게 끊어 낼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
하지만 그건 고위 귀족으로 태어난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숙명과도 다름없었기에 레이안은 그들에게 더 이상 감정을 낭비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의 이득과 위치를 위해 그들을 상대했고 이 모든 것이, 진정한 황제가 되기 위한 과정 중 하나라 생각하니 이전만큼이나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들 또한, 그에게 진심이 아닐 테니까.
레이안은 토마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고 토마 또한 그의 말에 동의했다.
토마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학생들에게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상대해 주었고 그 덕에 나름대로 괜찮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학생들에게 선을 그었다.
역겹고 짜증 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기에, 토마와 레이안은 왜인지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친구는 좀 만들었어?”
“오빠도 안 만들면서, 그런 건 왜 물어.”
단호한 대답에 토마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작게 웃음을 터트린 레이안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 있잖아.”
그의 말에 고개를 양방향으로 저은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래도 델아트에서는 나름 애들과 잘 지내보려고 하지 않았나.
친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친구도 있었던 것 같았고.
그런데 왜 여기서는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걸까.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이기는 했다.
그래, 태도를 바꾸는 거나. 델아트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의 우리의 평가를 생각했을 때.
렌이 그들을 혐오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으니 말이다.
“알겠어.”
완강한 렌의 태도에 한숨을 내쉰 토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토마나 레이안의 경우 정치 쪽이나, 사교계에서 계속 활동을 해야 하기에 발판으로 삼기 위해 인맥을 만들려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 비해 렌은 사교계에도 정치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친구 하나 없이 살 수는 없잖아.
자신에게는 레이안이 그린과 레몬에게는 리리안이 있는 반면, 렌에게는 친구라 부를 어떠한 존재도 없었으니 말이다.
자스민은 아직 어리니까, 제외하고 말이다.
그래, 토마는 오빠로서 렌이 걱정되었다.
“그래도 렌,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한 명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 순간, 들려온 레이안의 목소리에 토마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 저희의 배경만 보는 것일 텐데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있을 거야 렌. 너의 배경이 아니라, 너 자체를 좋아해 주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 사람이.”
레이안의 계속된 설득 끝에 렌은 결국 승복하고 말았다.
“알겠어요, 친구… 만들어 볼게요.”
그녀의 대답에 들려오자 만족한 듯 미소지은 레이안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의젓한 레이안의 모습을 보며 토마 또한 미소지었다.
자신이 친구를 정말, 잘 두었다고 생각하며.
아이들 중, 과거와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레이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징징거리기만 하던, 철없는 황자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되고 싶은 사람이, 지키고 싶은 것이, 원하는 목표가, 생긴 레이안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철 없던 모습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요즘 들어, 너에게 고마운 일이 많네.”
자신에게 작게 소곤거리며 인사를 전하는 토마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레이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차남이라는 이유로 동생들을 돌보는 의젓한 너의 모습에서도.
뛰어난 재능이 있으면서도 늘 노력하는 너의 의지에서도.
공작가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네가.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되었는지, 너는 아마 모르겠지.
“별거 아니야.”
전부 다, 네가 있었기에 될 수 있었던 나니까.
정말로, 별 것 아닌 일이었다.
알게 모르게 받은 것들이, 더 많으니까.
“이게 왜 별게 아니야.”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리는 토마의 말에 레이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우면 밥이나 사 주던가.”
제국의 황태자가, 뭐가 부족하다고 밥을 사 달라고 말할까.
더 이상 고맙다고 하지 말라는 거네.
그의 의도를 토마가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토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둘의 대화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렌은 그제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래, 밥 좀 먹자. 배고프다.”
그렇게 두 사람을 앞질러가기 시작한 렌은, 왜인지 계속해서 두 사람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런 것이 진짜 친구라면.
친구 한두 명쯤은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대부분의 학생이 귀족인 라이온 아카데미의 식당은, 정해진 식단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음식을 주문해서 먹을 수 있었다.
계산은 주문한 음식들을 기록해 한 학기에 한 번씩 하는 방식이었고 말이다.
주문을 마친 세 아이는 자리에 앉아 음식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당연히 아카데미에 관한 것이었다.
아직 학기 초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업에서 진도가 나가지 않아, 수업 내용보다는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나,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세 아이 모두, 전공 선생님은 만족하는 것 같았다.
감정의 동요가 적은 렌까지,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을 칭찬했으니 말이다.
학생들의 수준 또한, 아이들이 생각하기에도 높았다.
렌의 반에는 벌써 작곡을 하는 학생도 있었고 토마와 레이안의 경우 둘과 수준이 비슷한 학생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같은 학년이 아니라 다른 학년에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주문한 음식이 나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렌, 네 룸메이트는 누구야?”
2인 1실인 라이온 아카데미의 규정상, 대부분의 학생들은 룸메이트가 있었다.
토마와 레이안은 당연하게도 서로가 룸메이트였고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렌에게도 당연히 룸메이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라이온 아카데미는 대부분 계급이 비슷한 귀족들과 같은 방을 쓸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니, 렌의 룸메이트는 적어도 후작가나, 백작가의 자제일 것이라 예상했다.
룸메이트와는 친해지지 않으려 해도 조금은 친해지기 마련이라 렌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담아 말이다.
“없어.”
아까보다 한층 더 단호해진 대답이었다.
“그럴 수 있어?”
렌의 말에 레이안이 의문을 가득 담은 채, 입을 열었다.
공작가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불가능한 것도 없었지만, 교칙 상 2인 1실일 텐데 말이다.
“라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건 인정이지.”
렌의 대답에 레이안은 바로 납득하고 말았다.
사실, 저 이유뿐만이 아니라 렌이 남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 바리다스에게 따로 부탁한 것이지만, 렌은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걱정할 필요 없는데.
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점심으로 주문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토마나 레이안, 레몬과 리리안.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만, 그녀 또한 친구가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과거 그들이 자신을 보던 시선을 생각하면 마음이 또 바뀌었다.
그들의 위선은 역겨웠고 또, 추악했다.
자신은 바뀐 것 하나 없는데.
바리다스가 인정했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을 보는 시선과 행동들이 바뀐 것이.
아까, 레이안의 말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어디 없을까.
그때 렌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 내가 왜 친구가 없어.
나한테는 우리 라라가 있는데.
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생각을 레이안과 토마가 안다면 가슴을 치며 답답해 할 일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부담스러울 정도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