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루비아
인사가 들려온 방향에서는 회색 머리의 소녀, 루비아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영애.”
“네.”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형식적인 딱딱한 인사에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루비아는 다시 한번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질문에, 떨어졌던 시선들이 다시 한번 그들에게 쏠렸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누구도 세 아이가 함께 있을 때 말을 걸어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세 아이가 따로 돌아다닐 때는, 어떻게든 용기를 얻어 말을 걸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형식적인 대답뿐이었고.
셋이 붙어 있을 때는 그 누구도 대화를 걸 용기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용기를 얻어, 말을 건다 하더라도 그때는 형식적인 대답조차 듣기 힘들었다.
어떤 질문을 하든 그들의 의사는 거절이었으니까.
황태자, 공작가의 공자와 공녀.
학년 수석 입학자라는 타이틀에, 그를 뒷받침하는 신분과 화려한 외모.
심지어 그들이 입학한 연도에는 다른 후작가와 공작가에서 입학생이 나오지 않아, 비슷한 신분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한 명 있던, 외국의 공주 또한.
그들에게 식사를 요청했으나 바로 거절당했으니 말이다.
그 일이 소문이 나, 그 누구도 세 아이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했는데.
그런 그들에게 식사를 요청할 정도로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니.
어떻게,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들 근처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은 분명 아이들 쪽을 주시하고 있으리라.
당연히 그녀가 거절당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 순간 토마와 레이안, 렌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그러세요.”
“상관없습니다.”
“네.”
처음이었다.
세 아이가 타인의 합석 요청을 승낙한 것은.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귀족들은 빠르게 루비아 쪽으로 시선을 옮겨 그녀를 훑었다.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 신분.
예쁘지만, 그렇다고 귀족들 사이에서 그렇게 특출나다고 할 수 없는 외모.
아이들을 지켜보던 귀족들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왜?
다른 아이들은 절대 알 수 없겠지만 세 아이가 루비아와의 합석을 승낙한 이유는 간단했다.
실비아의 동생이어서.
공작가에 자주 드나들던 실비아는 아이들과 안면이 없으려 해도 없을 수 없었고.
학교에 입학을 할 때 또한, 그녀의 도움이 있었으니까.
기숙사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알려주거나, 좋은 교재와 수업을 추천해주었고 어떤 교수님이 잘 가르치는지를 비롯해 아카데미에 다녀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을 그들에게 해주었다.
그런 실비아의 동생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귀족들은 세 아이와 함께 앉아있는 루비아가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식사에 함께하게 된 루비아는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아이들은 간간이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는 것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멀쩡해 보이는 겉과는 다르게 루비아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자신의 첫인상 때문이었다.
아무리 어린 그녀라 하더라도, 스스로의 첫인상이 정말로 망했다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소설 속 최애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데 담담하게 반응할 정도로 그녀는 성숙하지 않았다.
루비아, 올해로 열세 살.
좋아하는 것은 소설 읽기, 취미도 소설 읽기,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친구들과 소설 이야기 하기.
자다 일어나니, 즐겨 읽던 소설 속 영애로 환생해 있었다.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들러리로.
그런 그녀가 어떻게 자신이 소설 속 빙의자인 것을 알게 되었나.
바로 성녀 유아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예린과의 만남 이후, 유아는 다른 빙의자들을 돕기 위해 신전에 글을 써 놓았다.
[빙의신고는 성녀에게]
[Soul-change Report to saintess]
한글과 영어, 두 가지 언어로 말이다.
그녀가 쓴 언어에 의문을 가지는 신관들 또한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성녀가 하겠다는데.
신전, 아니 제국 내에서 성녀는 황제와 대신관 두 사람 정도의 입지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쓴 글을 보고 꽤나 많은 빙의자들이 그녀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며 유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예린과 루비아가 읽은 [공작가의 아이들]은 이 세계의 극히 일부이며, 다른 소설을 통해 이 세계에 온 사람도 있었다.
판타지 류의 책을 읽은 적이 없는데, 이 세계에 오게 된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오게 된 방법 또한 가지각색이었기에, 유아로서는 어떤 과정을 통해, 누구를 뽑아 이 세계에 오게 되는지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그나마 공통점을 찾자면, 대부분 착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
만나본 빙의자들 모두가, 그녀의 선의를 이용하려고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유아가, 빙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도중 나타난 것이 바로 루비아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만난 빙의자들 중 가장 어린 루비아는 유아가 한국어로 말을 하는 순간 눈물을 쏟아냈다.
지구로 가고 싶다고 슬피 우는, 어린아이를 어떻게 가만히 놔둘 수 있을까.
유아는 매일같이, 루비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히도 루비아의 가족들은 착한 사람이었고 유아 덕분에 루비아 또한, 이 세계에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던 도중, 루비아는 언니 실비아의 추천으로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아카데미에 오게 된 루비아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토마였다.
차일드라는 성, 붉은 머리와 눈, 검에 대한 열정과 재능.
루비아는 그제서야 깨닫고 만 것이었다.
자신이 과거 읽은 소설 [공작가의 아이들]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루비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토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런 생각 하나로 자신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그를 붙잡았지만, 눈을 마주하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친구들은 다 유치하다 말했지만, 나는 되게 재밌게 읽었는데.
네가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나는 다 알고 있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고 응원했는데.
하지만 그런 말은 루비아의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고, 그렇게 루비아가 그에게 꺼낸 첫마디는 바로.
좋아해요, 였다.
그것이 우리의 루비아가, 토마에게 고백을 하게 된 경위였다.
예린이 빙의자인 것을 알게 된 것 또한, 유아의 덕이었다.
유아는 이 세계의 수많은 미래가 존재하고 그중 하나가 기록되어 지구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직 원작의 정체를 모르는 루비아를 위해, 유아는 그 사실을 미리 귀띔해주었고.
그 덕에 원작을 알고 있는 루비아는 빠르게 예린의 정체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유아 또한, 루비아가 저렇게 직설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만난 빙의자가 예린이라 정말로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루비아의 말을 장난 취급하며 절대 빙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루비아는 현재,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또 다른 빙의자를 만난 것만으로도 기쁜데, 최애까지 만났다. 심지어 그 빙의자는 최애를 괴롭히던 악역에 빙의한 상태였다.
이제 내 최애의 앞길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이보다 일이 더 잘 풀릴 수가 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제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토마와 친해지고 싶어!
이제 너에게는 행복한 일들만 남았을 테니까, 그 행복에 나도 함께하고 싶어.
그러니까, 우리 조금 많이 친해지지 않을래?
여긴 책 속이 아닌 현실이고, 나는 너의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너를 응원하고 싶은걸!
그래, 루비아는 정말로 착하고 순수한 아이였다.
그리고 이런 성격의 루비아는 아이들에게 너무나도 색다르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다 느껴졌지만, 그녀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세 아이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악의와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던 그들은, 조금의 눈빛과 대화만으로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루비아의 티 없는 순수함과 맑음은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에게서는 그들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한 사람이 떠올랐으니.
그 사람은 당연하게도, 예린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했던 루비아의 첫인상은 어느새 그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뒤였다
아이들 모두, 루비아에게서 왜인지 예린이 겹쳐 보인다 생각하며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운 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위기가 편해진 것을 느낀 루비아 또한 마음에 짐을 덜어내고 더 편하게 이야기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식사가 끝이 났고, 루비아는 아이들 중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루비아는 입을 열었다.
“다음 수업이, 이동 수업이라 먼저 일어나 볼게요.”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발걸음을 옮기는 루비아를 붙잡은 사람은.
놀랍게도 렌이었다.
“내일도 같이, 식사할래요?”
그녀의 말에 루비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이어 환한 미소를 띄웠다.
티 없이 맑은, 환한 미소였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