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황녀님은 황실이 싫다.
리리안, 레이안의 동생이자 크레센트 제국의 단 한 명뿐인 황녀.
오빠와 마찬가지로 황족의 상징을 완벽하게 물려받은 황가의 금지옥엽.
그녀는 레이안이 떠난 이후로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더 이상 운동하라고, 옷 좀 그만 사라고, 공부하고, 책 읽고, 교양을 쌓으라고 잔소리하는 오빠가 없었으니까.
많지 않은 부모님의 시간까지 모두 그녀의 것이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카데미 방학이 아주 천천히 왔으면 좋겠어.
리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잠시 동안은 말이다.
레이안이 떠나가고 일주일이 조금 넘어가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녀는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레이안의 빈자리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리리안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겠지만 말이다.
“…지루해.”
화려하게 장식된 샹들리에 아래, 값비싸 보이는 장난감들에 둘러싸인 그녀는 중얼거리며 최고급 양탄자 위에 쓰러졌다.
그 상태로 몸을 뒤집은 리리안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황궁이 원래 이렇게 넓었나.
황궁이니 당연히 넓었지만 리리안에게 황궁은 어릴 때부터 자라온 집이자 놀이터였다.
그런 그녀가 황궁이 넓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레이안이 없어서 그런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리리안은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럴 리 없었다.
자신이 그를 그리워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물론 레이안이 있을 땐, 그가 공부하거나 훈련하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내긴 했다.
그러니까, 이건 허전한 것이다.
그립다는 그런 오글거리는 감정이 아니라, 항상 옆에 있던 사람이 사라진 거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허전함이지 그리운 것이 아니었다.
리리안은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된 거, 친구나 만들까.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노란 머리의 소녀가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 굳이 친구를 만들려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녀에게는 이미 절친한 친구가 있었으니까.
당분간 차일드 가에서 지내도 되냐고 허락을 구해볼까.
레이안이 떠나 외롭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허락해 주실 것이었다.
절대 외로운 것이 아니라, 허락을 받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구긴 리리안은 아킬레스의 집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집무실에 도착한 리리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녀를 반겨주는 아버지가 아닌, 밀린 일들 때문에 지쳐 쓰러져 있는 황제였다.
그 모습에 리리안은 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버지.”
리리안의 부름에 그제서야 그녀가 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킬레스는 다크서클이 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무슨 일이니, 리리안.”
자리에서 일어난 아킬레스는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에게 리리안이 좋아하는 차와 다과를 내오라고 시킨 뒤, 집무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그의 일에 방해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리리안은 반대편 소파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길래 답지 않게, 이리 망설일까.”
자신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말에, 리리안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여기서 자신이 레이안이 떠나 외롭다고 말하거나, 공허함을 느끼고 있다고 하면 착한 아버지께서는 분명 죄책감을 느낄 것이었다.
그랬기에, 리리안은 지금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레몬이 보고 싶어요. 당분간 차일드 가에 가서 지내도 될까요?”
아킬레스는 다행히도, 리리안의 말에 의문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공작가라면 분명 환영해 줄 테니. 내가 미리 연락을 넣어 주마.”
아킬레스의 말에, 리리안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방금처럼 지어낸 미소가 아닌, 진정으로 기쁜 마음에서 나오는 밝은 미소였다.
“감사해요!”
그 말과 함께 아킬레스를 끌어안은 리리안은 그의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고 아킬레스는 그런 리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리리안은 티를 내지 않았다 생각했겠지만, 그와 아필레는 이미 레이안이 떠난 뒤로 리리안이 외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평소와 같다면, 그들이 그녀에게 신경을 써 주었겠지만.
현재 제국 내부와 외부의 여러 문제 때문에, 두 사람은 그녀에게 많은 시간을 내어 줄 수 없었다.
아킬레스의 눈에 아직 식지 않은 차와, 리리안이 좋아하는 딸기 마카롱이 들어왔다.
그녀가 자신의 일해 방해가 될까 봐 빠르게 자리를 비켜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킬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철이 들어, 기쁘다고 해야 할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이 평범한 부모였다면, 그녀에게 더 신경을 써 줄 수 있었을 것 같아 오늘따라 더욱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구나.”
착한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분명 더 미안해할 것을 알고 있기에.
닿지 못할 사과는 주인을 찾지 못하고 집무실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아이씨.”
그 시각, 아킬레스의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간 리리안은 왜인지 흐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안이 없는 지금 너무나도 외롭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슬픈 감정을 막기에 리리안은 아직 어린 나이였다.
이제 나도 어쩔 수 없어.
자신의 궁전에 도착한 리리안은 대기하고 있던 시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차를 대기시켜, 마탑으로 갈 거야.”
한시라도 빨리, 차일드 가에 도착해 이 공허함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 * *
“…그래서, 허락을 받자마자 마탑에서 텔레포트 해 바로 차일드 가에 도착한 거라고?”
“네.”
당당한 리리안의 말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텔레포트는 황실에서 법으로 금지된 마법 중 하나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안전이었다.
마법사 혼자 사용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마법사가 누군가와 함께 동시에 텔레포트를 하는 것은 달랐다.
어지간한 실력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한 명 이상의 사람을 동시에 텔레포트 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몸과 영혼이 분리되거나.
몸 자체가 분리될 수도 있었으니까.
나는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한데, 리리안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은 한 것인지 자각조차 없는 듯했다.
“텔레포트의 부작용은 알고 있고?”
리리안이 저택에 오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녀가 방문하면 아이들도 좋아할 테고 그녀 또한, 민폐를 끼치거나 사고를 치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런 위험한 방법으로 오는 건 아니잖아.
내 말에 리리안은 당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끽해야, 죽는 것 말고 더 있겠어요?”
그녀가 민폐를 끼치지 않고 사고를 안 친다는 건 정정하겠다.
그녀는 뒤를 엄청, 엄청, 매우 생각하지 않았다. 사고가 안 나서 다행이었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혼을 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혼을 내야 맞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외로웠기에 이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차일드 가에 온 것인지 걱정이 되어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마음은 이해하나, 앞으로는 그러지 말렴.”
리리안은 자신의 행동이 위험했으며 황실과 마탑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리를 해서 올 정도로, 외로웠던 것이겠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하자, 리리안의 시선이 나를 피해 바닥으로 향했다.
“…알겠어요.”
그 순간,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아필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리리안의 소식을 듣고 온 것인지, 단정하고 우아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눈 또한 초점을 잃은 채 떨리고 있었다.
“피오라, 언질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해요. 혹시 리리안이 여기에 있나요?”
공작부인이 된 이후로 아필레는 나를 저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녀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와 함께 있는 리리안의 모습을 확인한 아필레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빠른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혹시라도 그녀가 리리안을 혼내면 말릴 생각으로 둘을 지켜보았다.
아필레가 입을 열자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랬어, 리리안. 걱정했잖니.”
아마도 아필레는 리리안이 위험하게 텔레포트를 사용한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리리안 또한 느낀 것인지, 그녀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죄송해요.”
아까와는 다르게 변명 없이 잘못을 인정하는 리리안의 모습에 아필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외로웠니?”
그건 너무나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리리안 또한 그 사실을 느낀 것인지,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황궁이 넓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어요. 혼자가 된 것 같았어요. 친구가, 사람이 그리워서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황궁을 떠나고 싶었어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또박또박 할 말을 한 리리안을 보며, 아필레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해.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항상 잘 버텨주던 너니까,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나 봐. 이렇게 외로워할 줄 알았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내주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아필레는 몸을 숙여 리리안을 안아주었다.
그러자, 결국 리리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의 품 안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미안하다는 말과 괜찮다는 말이 반복되었다.
리리안이 눈물을 완전히 그칠 때까지 말이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끝내고 리리안이 아필레의 품에서 벗어나자, 아필레는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날인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네요. 미안해요, 공작부인.”
아필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우리는 안부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리리안이 텔레포트를 사용한 것과 비슷한 시간에 도착한 거면 아필레도 텔레포트로 온 거 아니야?
“혹시 텔레포트로 온 건가요?”
“그렇죠?”
아니, 리리안한테 뭐라고 할 게 아니잖아!
급한 마음은 이해하는데, 황후가 그러면 어떻게 해!!
“아니,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요.”
“괜찮아요. 끽해봤자, 죽는 것 말고 더 있겠어요.”
그녀의 말에 아까 내게 비슷한 말을 했던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나, 리리안이 누굴 닮았는지 알 것 같아.
“그리고, 죽는 것 보다. 리리안이 위험해지는 게 더 두려워요.”
하지만 그 순간, 이어진 아필레의 말에 나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