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이들의 기말고사.
이런 말이 있었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고, 여름의 시작은 기말고사라고.
그런데 그건, 지구에서나 해당되는 말 아니었냐고!
루비아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문제지들을 바라봤다.
이걸 언제 다 풀어?
라이온 아카데미는 입학 첫 학기의 중간고사는 보지 않기에, 이번 기말고사가 첫 시험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입학 안 했으면…
그 순간, 루비아의 머릿속에 렌과 레이안 그리고 토마가 스쳐 지나갔다.
…더 후회하긴 했겠네.
솔직하게 말해서 루비아는 시험공부를 안 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지구의 수준이 이 세계의 아카데미보다 몇 배는 월등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녀와 함께하는 세 명의 사람이 너무나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들이 루비아의 성적이 낮아진다 해서 같이 다니지 않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무언가 수준을 맞춰야 할 것 같단 말이지.
솔직히 지금 약간 그거 같잖아, 웹툰이나 소설에서 나오는 클리셰.
완전 평범한 여자 주인공이, 되게 예쁘고 잘난 사람들 사이에 끼는 그런 거.
뭐, 나야 원래 내 인생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인다고.
자신의 성적이 떨어지면 자신을 무시하는 아이들이 생겨날 수 있다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 루비아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자신이 지금 공부를 하기 싫기는 한 모양이었다.
여러 가지 잡생각이 너무 많이 드는 것으로 보아, 엄청나게 말이다.
그냥 다 때려칠까 싶다가도 부모님과 실비아, 아이들을 떠올리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 고민해 봤자 뭐가 바뀌겠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집중이나 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루비아가 드디어 펜을 잡고 문제지를 넘긴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루비아, 있어요?”
하지만 시간 낭비가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렌이 찾아왔는데, 어떻게 시간 낭비야.
그렇게 펜과 문제지는 잡힌 지 일 분조차 지나지 않아 그녀의 손을 떠나갔다.
“무슨 일이에요, 렌?”
루비아의 질문에 렌은 조금 수줍은 표정으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 문제 같이 좀 봐주실 수 있나요?”
렌이 내민 것은 바로, 루비아가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인 수학이었다.
나, 이거 때문에 공부 열심히 했나 봐.
렌에게 풀이법을 가르쳐 준 루비아는 묘한 뿌듯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거,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할까요?”
루비아는 렌과 다르게 룸메이트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사람을 방 안에 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렌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저도 교과서 가져올게요.”
결정을 내린 렌이 교과서를 가져오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 순간, 그녀의 룸메이트가 나타났다.
루비아의 친구인 그녀, 테일라는 아이들과 같은 델아트 출신이었기에 렌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렌과의 적당한 인사를 주고받은 그녀는 바로 루비아에게로 향했다.
“루비, 어디 가?”
테일라의 질문에 루비아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책들을 챙기며 대답했다.
“도서관 가서 공부하려고.”
그런 루비아의 대답에 테일라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말이다.
“지금 가서 괜찮겠어?”
“왜?”
정말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루비아의 모습에 테일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학생은 예법 시험, 나흘밖에 안 남았잖아.”
그녀의 말에 루비아와 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갔다.
라이온 아카데미는 전공과목 말고도 필수 과목 또한 존재했다.
필수 과목은 수학, 제국 공용어, 역사, 과학, 사교계 예법으로 다섯 가지가 존재했으며.
체육과 음악, 미술 또한 필수이나, 예체능 쪽의 과목은 검술, 춤, 노래, 악기 연주, 그림, 등 여러 과목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으며 시험이 아닌 실기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네 아이들은 전공을 제외한 모든 과목이 같은 수업이었다.
그 뜻은, 아이들이 보는 시험이 모두 같다는 것이었다.
루비아의 경우 어지간한 과목을 모두 평균 이상으로 잘했으나, 그녀가 못하는 과목이 두 가지 있었는데.
바로 춤과 역사였다.
수학과 과학은 전생에서, 제국 공용어는 빙의 버프로 가능했지만 암기가 필요한 역사 부분은 거의 무지한 수준이었다.
체육은 꽤 잘하는 편에 속해있었고 음악과 미술 또한 지구에서 배운 것들이 있었기에 괜찮았지만…
춤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구에서 춤출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끽해봐야, 장기자랑 정도일 텐데.
루비아는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런 것들 또한 나가지 않았기에 살면서 춤을 춰 본 것이라고는.
유치원 때, 반강제로 나간 장기자랑.
그것이 그녀가 춤을 춘 마지막 기억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귀족들에게 춤은 필수 소양이나 다름없기에, 필수 과목에 들어가 있었고.
그로 인해 루비아는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진짜로, 춤추기 싫다고 말이다.
진짜 과목 하나 포기해 버릴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렌 또한 마찬가지였다.
렌은 몸을 움직이는 부분에 관해서는 영 소질이 없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바리다스와 토마, 두 사람과 분명 같은 유전자일 텐데 말이다.
레몬과 자스민, 심지어 렌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린 또한 운동에 소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셋 모두, 안 할 뿐이지.
하지만 렌에게는 그냥 없었다.
운동에 대한 흥미와 재능 모두 없었다.
조금도 말이다.
“예법 시험이, 춤이랑 다과였지?”
루비아의 질문에 테일라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너, 그냥 아예 안 할 생각이었구나.”
정곡이었다.
속내를 들켜버린 루비아는 테일라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과목 정도는, 조금 낮아도…”
하지만 아쉽게도 라이온 아카데미는 특별히 말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학생들의 성적순으로 방을 배정했다.
그 말은, 테일라 또한 학년 수석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학생이 저런 태도를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너 F면 재수강인 건 알지?”
“실비아 언니가 이걸 보면 뭐라고 하겠어.”
“무슨 도서관이야, 당장 무용실 가.”
순식간에 쏟아지는 테일라의 잔소리에 루비아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맞는 말이어서 반박할 수도 없었다.
구해달라는 의미를 담아 렌을 바라봤지만, 렌 또한 테일라의 잔소리에 타격을 입은 듯했다.
“저희… 예법부터 공부할까요?”
이러면 진짜 도망갈 수도 없잖아.
루비아는 울고 싶은 마음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렇게 두 사람은 무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법 수업은 학생들이 나중에 사교계에 데뷔할 때를 위한 것이기에 당연히 춤은 남녀 짝을 이뤄 시험을 치렀으나.
다행히도 이번에는 입학 첫 시험인 관계로 혼자서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수준의 춤을 배웠다.
정말로 간단한 스텝과 턴 정도였지만 렌과 루비아에겐 그것조차 어려웠다.
심지어 두 사람 다 못하는 과목이었기에, 가르쳐 줄 사람 또한 없었고 말이다.
춤을 추기 시작한 지 오 분 만에 세 번이나 발이 꼬인 루비아는 테일라를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연습하게 만들었으면 도와라도 주던가.
그녀의 룸메이트, 테일라가 수석인 과목이 바로 예법이었다.
과거 테일라의 어머니는 사교계의 꽃이라 불려왔고 그런 어머니의 영향인지, 테일라 또한 과거부터 사교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누가 시키거나 가르쳐 준 적이 없음에도 사교계의 말투와 춤 그리고 예법을 익혔고 그것들을 매우 좋아했다.
특히 테일라가 가장 자신 있어 하고 좋아하는 과목은 춤이었는데.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냐.
테일라 또래의 아들을 가진 귀족 부모가 다른 선생님들이 아닌 그녀에게 직접 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나는 안 가르쳐 주냐고.
나는 너 공부하는 거 다 도와줬는데!
왜 나는 춤 추라고 시키고 자기는 편한 공부하러 가는데.
나도 공부할래.
차라리 수학 문제를 더 풀고 역사서를 하나 더 읽고 말지.
한숨을 내쉰 루비아는 이제 그냥,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워버렸다.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지쳐 있는 루비아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안 다쳤어요?”
그 순간, 들려온 토마의 목소리에 루비아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누가 봐도 넘어진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 자세였으나, 토마는 무용실에 눕는다는 행동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했다.
그가 자신이 넘어졌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루비아는 붉어지는 얼굴을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넘어진 거 아니니까, 당연히 괜찮죠.
루비아는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렌 또한, 그런 루비아를 배려해주는 것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토마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그녀를 일으켜 준 뒤 바로 렌에게 시선을 옮겼다.
“연습은 잘돼가?”
토마의 말에 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의 대답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토마는 입을 열었다.
“이상하긴 해.”
“뭐가?”
“내 동생이면 운동을 못할 리 없을 텐데.”
반박할 수 없는 말에 렌은 표정을 구겼다.
“그러게, 내 오빠면 노래를 못할 리 없을 텐데.”
어릴 때부터, 렌을 따라 악기를 연주했던 토마였기에 악기 부분에서는 매우 뛰어났으나.
그는 엄청난 수준의 음치였다.
토마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표정을 구겼고.
그의 모습을 보며 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둘 다 잘하는데.”
그 순간 들려온 레이안의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그를 노려보았고.
레이안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루비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런 걸 보면, 진짜 남매인데. 안 그런가, 영애?”
레이안의 말에 두 사람의 모습을 돌아본 루비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레이안의 말대로 두 사람이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