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아이들의 기말고사.
“남매한테, 닮았다는 말보다 실례인 건 없어요.”
렌의 단호한 말에 토마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둘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레이안의 머릿속에 리리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닮았다는 말, 싫지 않던데.
물론 그의 동생인 리리안이 만약 그와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면 정색하고 싫어할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전보다는 잘 추는 것 같네.”
그 순간 들려온 토마의 말에 렌은 고개를 저었다.
이 상태로라면, 학과 수석을 유지하지 못 할 것임이 분명했다.
“아직 많이 부족해.”
그녀의 말에 토마는 시선을 옮겨 렌을 살펴보았다.
한눈에 봐도 지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토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무리해도 좋을 거 없을 텐데.
“그래도 오늘은 그만 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하지만 렌은 그의 말에도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시험까지 얼마 안 남아서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더 쉬라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쓰러지거나 다치면 더 손해 보는 건 너일 텐데, 왜 그걸 모를까.
자신의 똑똑하지만 고지식한 동생은 이상한 면에서 고집이 셌다.
여기서 더 말해봐야 안 들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토마는 다른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러면 시험을 차라리 나랑 같이 보자.”
이번 예법 시험의 방식은 가장 자신 있는 춤이었고.
합동해서 시험을 보는 것 또한 상관없었다.
렌과 루비아의 경우 가장 자신 있는 춤이 이번에 배운 스텝 정도였던 것이지, 다른 춤을 춰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그건.”
편법이잖아, 비겁하지 않을까?
하지만 토마가 자신을 생각해서 해준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렌은 뒷말을 삼켰다.
그런 렌의 생각을 토마가 모를 리 없었다.
“지금부터 가장 잘 추는 춤이 될 정도로 연습하면 되는 거고, 규칙 위반도 아니잖아. 애초에 과목 이름이 뭐야? 사교계 예법이잖아, 사교계에서 혼자 춤을 추나?”
토마가 이렇게 말을 잘했던가.
하나하나 따져봐도 반박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긴 하네, 토마.”
렌이 지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레이안 또한 토마의 말을 거들었고 결국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고마워.”
그녀의 수락에 안도한 토마가 미소지은 그 순간.
표정을 굳힌 렌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루비아는 어떡해?”
나, 나는 왜?
렌의 말에 루비아는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신은 괜찮다고 다른 것에서 만회하면 된다고 말하려는 순간, 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영애는 내가 도와주면 되는 거지.”
레이안의 말에 렌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제 의사는요…?
순식간에 내려진 결론에 루비아는 멍하니 세 사람을 바라봤다.
아니, 솔직히 고맙긴 한데.
많이 고맙긴 한데!
황태자랑 같이 춤 한 번 췄다가, 이상한 소문 나버리면 어떡해.
막, 우리 가문이 황태자랑 연이 있다든가, 황태자가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든가, 우리 가문의 사업이 엄청 크게 번창했다든가.
정치적으로 이상하게 꼬일 수 있는 그런 소문 있잖아!
사교계를 책으로밖에 접해보지 않은, 루비아이기에 할 수 있는 상상이었다.
겨우 춤 한 번 췄다고 그렇게까지 소문이 퍼질 리가 있겠는가.
“그럼 영애, 잘 부탁하네.”
그 순간, 레이안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루비아로서는 그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이제 나도 몰라.
성적 잘 받으면 좋은 거지 뭐!
결국 루비아는 눈앞에 있는 이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이 일이, 얼마나 커질지도 모르고 말이다.
“감사합니다.”
루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고 레이안 또한 그녀의 모습에서 리리안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다음 날부터 함께 모여 춤을 연습했다.
토마와 레이안의 실력이 워낙 출중한지라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뿐이었지만, 렌과 루비아도 나름 잘 추는 것으로 보였다.
이대로라면 시험도 별문제 없이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건은 바로 시험 당일에 터지고 말았는데.
바로 검술 시험을 보고 있던 레이안이 상대 학생의 실수로 발목을 다치게 된 것이었다.
레이안의 예법 시험이야 그의 부상이기에 뒤로 미룰 수 있다지만 루비아의 시험은 그럴 수 없었으니 말이다.
“상황이 이래서 시험은 같이 못 볼 것 같군. 미안하네, 영애.”
자신의 부상 소식에 놀라, 달려온 루비아와 렌을 보며 레이안은 입을 열었다.
다친 와중에도 자신부터 신경 써주는 레이안의 모습에, 루비아는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괜찮으셔요?”
걱정이 가득 담긴 루비아의 말에, 작게 웃은 레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니까. 나는 걱정할 필요 없어.”
라고 하기에는 그의 한쪽 다리는 완전히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지만 말이다.
걱정을 하지 않을 수준이 아닌데요.
루비아는 턱 밑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시험은 걱정하지 마시고, 낫는 것에 집중해 주세요.”
루비아가 단호하게 말한 그 순간, 보건실 안으로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 땀을 흠뻑 흘리고 있는 토마의 등장에 레이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시험은 잘 봤어?”
능청스러운 그의 질문에, 숨을 고르고 있던 토마는 표정을 구겼다.
“너는 지금, 그게 중요해?”
“내가 걱정돼서 시험을 망쳤다면, 미안할 것 같아서.”
수업이 같은 토마와 레이안은 당연하게도 검술 시험 또한 같이 보았다.
하지만 레이안이 거의 첫 번째 순서인 반면, 토마는 마지막 차례였고.
레이안이 다쳤을 때 토마는 아직 시험을 치르기 전이었기 때문에, 다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잘 봤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치료에나 집중해.”
자신을 생각해주는 저 모습에 고마워해야 할지, 그렇게 살다가는 호구 같은 황제가 될 것이라며 타박을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토마는 결국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뱉었다.
“알겠어.”
그의 말에 레이안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토마가 아직 모르는 사실이 있었는데.
레이안이 저런 유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가족과 차일드 가 사람들, 그리고 황실 기사단장뿐이었다.
그 외 사람들에겐 냉철하고 칼 같았다.
아마도 토마는 당분간 그 사실을 모를 테지만.
“그런데, 토마.”
“왜.”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뭔데?”
거기까지 말한 레이안은 씨익 웃으며 옆에서 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루비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 대신, 영애의 시험 좀 같이 봐 줘.”
그의 말에 가장 당황한 것은 루비아였다.
아니, 진짜 괜찮은데?
설마, 황태자. 너.
내가 진심으로 토마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밀어주려고 이러는 거야?
진짜로 필요 없는데?!
그리고 어차피 토마가 거절할걸, 쟤는 내가 자기 좋아하는 줄 알잖아.
렌 덕분에 같이 다니고 얘기하는 거지, 무슨 오해를 하게 만들려고 이거까지 도와줘.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토마를 돌아봤다.
“그러지 뭐.”
하지만 토마에게서 들려온 답은, 전혀 예상 외의 수락이었다.
아니, 나 너한테 차였는데 안 부담스러워?
아직 어려서 모르는 건가?
물론 너랑 나랑 그렇게 많이 차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내가 찬 사람이랑 춤추는 거 부담스러울 것 같아.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 진짜로 괜찮아요.
하지만 레이안은 진심이 담긴, 루비아의 괜찮아요를 못 알아들은 것인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어, 나보단 아니지만 나름 잘 추는 친구니.”
그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토마는 루비아의 거절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그의 표정에서 자존심이 상한 것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걱정할 것 없으니까, 연습부터 해보게 따라와요.”
그렇게 루비아는 토마에게 이끌려 무용실에 오게 되었다.
렌 또한, 두 사람만 두기에는 불안한 듯, 그들을 따라왔고 말이다.
그렇게 무용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소설에서도 읽긴 했지만 역시, 레이안은 몸을 쓰는 일이라면 다 잘하는 것 같았다.
레이안의 리드는 부드럽게 따라오라 한다면 토마의 리드는 빨리 오라는 듯 강한 느낌이 들었다.
확실한 건, 토마도 레이안 못지않게 잘 춘다는 사실이었다.
“이래도 괜찮아요?”
자신감 넘치게, 정말 자신과 안 해도 되겠냐는 것처럼 묻는 토마의 모습에 루비아는 차마 그렇다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시험 하나를 그냥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근데 저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해.
잠시 망설이던 루비아는 입을 열었다.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토마의 얼굴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떠올랐었다.
이어진 루비아의 말에 그의 표정이 점차 오묘하게 변했으니 말이다.
“혹시나, 이번 도움으로 인해 제가 오해할까 하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태자 저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와주시는 거 알고 있어요! 저 공자님 안 좋아합니다, 실수였어요.”
루비아 딴에는 토마와 레이안 모두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토마는 왜인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또한, 그녀에게 관심도 없었고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들으니까 왜인지.
차인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토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렌은 잘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고 있었고.
할 말을 마친 루비아는 밝게 웃으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마지막까지 단호하게 소리치는 루비아의 모습에 토마는 무어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