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55)화 (155/207)

17. 아이들의 기말고사.

“…그런 걱정 안 합니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 토마가 내놓은 답이었다.

그러자 표정이 한층 더 밝아진 루비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네요!”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토마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렌은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가 자신의 오빠를 좋아한다는데, 응원하며 기뻐해 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정신 차려서 다행이야, 루비아. 네가 아까워.

토마가 알게 된다면, 서운해할 만한 생각이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릴게요!”

“네, 뭐.”

조금 떨떠름하게 대답한 토마는 다시 루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루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요!”

그렇게 두 사람은 합을 세 번 더 맞추어 보았고, 루비아는 렌처럼 엄청난 정도의 몸치는 아니기에 금방 토마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그렇기에 네 번째 춤이 시작함과 동시에 토마는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영애는 충분할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한 토마는 렌을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무래도 이제 렌의 연습을 도와줄 생각인 것 같았다.

음악이 끝나고 토마의 손을 놓은 루비아는 렌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럼, 렌도 연습 열심히 해요.”

“먼저 가려고요?”

아쉬운 듯 되묻는 렌의 모습에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포기한다 했을 뿐이지, 루비아 또한 공부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과목들은 정말로 다 괜찮은데, 역사는 정말로 더 해야 해.

이대로라면 A는 고사하고 재수강이라고.

“역사 공부 때문에,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루비아의 말에 렌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같이 있고 싶기는 하나, 루비아의 공부를 방해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을 두고 무용실 밖으로 나온 루비아는 기숙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그녀가 무용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요!”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손에 깜짝 놀란 루비아가 팔을 떨쳐내며 고개를 돌리자, 갈색 머리의 귀엽게 생긴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에 없는 사람인데, 누구지?

아무리 고민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기에 조금의 경계를 하며, 루비아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저랑 내기해요.”

미친 사람인가.

그녀에게서 들려온 쌩뚱맞은 첫 마디에 루비아는 생각했다.

지금 보니, 눈도 회까닥 돈 것이 정말로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네, 술래잡기로 하죠. 제가 숨을게요.”

그렇게 말한 루비아는 그 소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냅다 기숙사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가자.

저런 사람은 상대 안 해주는 게 제일 좋아.

하지만 루비아는 얼마 달리지도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루비아의 달리기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를 따라오는 소녀가 미친 듯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뇌가 전부 다리 근육으로 갔나.

루비아는 자신을 잡고 있는 소녀의 손과 다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도와달라고 소리칠까 싶다가도 별 것 아닌 일인 것 같아 망설여졌다.

“왜 도망가시는 거죠?”

아니, 너 같으면 도망 안 가겠니?

눈을 그렇게 뜨고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데, 안 가겠냐고!

하지만 루비아는 알고 있었다.

미친년을 이기는 건, 더 엄청난 미친년이라는 사실을.

그랬기에 루비아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뻔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기하고 싶다 하시길래, 말 그대로 술래잡기를 해 드린 건데요?”

엄청난 루비아의 뻔뻔함에, 소녀는 루비아를 미친 사람 보듯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표정은 네가 지을 게 아닌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루비아는 그런 말들을 꾸역꾸역 삼키며 가만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떻게, 당신 같은 게 …님과.”

이름만 못 들었어.

아니, 가장 중요한 이름만 그렇게 작게 말하면 어떡해!

하지만 정황상 소녀는 레이안, 아니면 토마의 극성팬인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인기 많은 사람들도 힘들겠구나.

루비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소녀가 소리치듯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이 그분과 친구인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어요! 이번 시험에서 저에게 학과 1등을 뺏긴다면 그분들에게서 멀어져 주세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너도 소설 많이 봤구나.

저런 걸 어떤 멍청이가 하겠다고 해?

그런 멍청한 놈들은 소설 속에나 있는 거야.

“제가 왜요?”

소녀는 정말로 일차원적인 사람이었다.

루비아가 이렇게 반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헀는지 이를 갈며 소리쳤으니 말이다.

“제가 당신을 인정하지 못하겠으니까요!”

하지만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미친년을 이기는 건, 더 미친년밖에 없다고 말이다.

“네!! 하지 마세요!!!!”

자신보다 더 크게 소리치는 루비아의 모습에 소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아니, 정말 말 안 통하는 사람이네.”

대체 왜 내가 할 소리를 아까부터 자기가 하는 거야?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더 이상 대화하지 말고 서로 갈 길 가죠?”

말을 마친 루비아는 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녀는 거머리처럼 루비아를 붙들고 늘어졌다.

“아뇨, 이제 더 인정하지 못하겠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그분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요!”

“그럼 당신부터 인정받고 오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박하는 루비아의 모습에 소녀의 말문이 막혔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와의 말싸움에서 이기는 법은 간단했다.

자기도 무지성으로 몰아붙이면 되는 것이다.

서로가 벽을 보고 말하는데 어떻게 대화가 이어질 수 있을까.

“할 말 더 없으시면, 가 보겠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더 안 건드리겠지?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 말이었지만 아쉽게도 소녀는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맛이 가 있었다.

“지금, 저에게 질까 봐 두려우신 건가요?”

“네, 두렵네요.”

그리고 루비아도 소녀의 생각보다 말을 잘했다.

소녀도 이제 슬슬 알고 있는 듯했다.

말싸움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루비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으득, 이 갈리는 소리가 살벌했다.

어이구, 치과 가셔야겠네.

루비아에게는 전혀 타격이 없었지만 말이다.

“두고 봐요, 이번 시험에서는 제가 학과 수석이 되어 당신의 자리를 가져갈 테니까.”

라고 말한 소녀는 빠르게 사라졌고 루비아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의자 뺏기 게임도 아니고 그게 수석을 한다고 가져갈 수 있는 자리냐고…

그리고 나는 수석에 딱히 관심 없어.

지난번에는 그냥 입학시험이기도 했고,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할 수 있었던 거지.

이번에는 역사에, 예법 시험까지 있어서 수석 못 할걸?

혼자서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는 소녀에게 측은함을 느낀 루비아는 한숨을 내쉰 뒤,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가서 공부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 * *

예법 시험 당일.

루비아와 토마, 그리고 렌은 함께 시험을 보는 무용실로 향했다.

생각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본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이 정도 시선이라면 그렇게 부담스러울 것 같지는 않아.

“출석번호대로 준비하도록 하세요.”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루비아는 망했다고 생각했다.

라이온 아카데미의 출석번호 또한 입학시험의 성적으로 결정되기에, 루비아와 렌은 맨 앞 순서였다.

차라리 중간이나, 마지막으로 해 주지.

두 번째라는 부담스러운 순서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자신과는 반대로 렌은 담담해 보였다.

“가자, 렌.”

토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렌은 토마와 함께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루비아.”

그 순간, 평소보다 힘이 더욱 들어가 있는 렌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렌도 긴장하고 있구나.

루비아는 손을 들고 주먹을 쥐며 작게 소리쳤다.

“힘내요, 렌!”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가 다행히도 잘 통했는지, 곧이어 렌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네, 루비아도요.”

작게 심호흡을 한 렌은 무용실 중앙에 있는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 앞에는 세 명의 교수님이 서 있었고 렌이 학번과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마치자,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렌은 토마와 함께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고.

두 사람은 딱 적당히 잘 추었다.

실수도 없었고 추가 점수를 받을 만한 기교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교과서적인 왈츠였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귀족 특유의 기품 말이다.

그랬기에 그들의 춤을 본 교수들은 꽤나 만족하는 듯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학생 올라오시죠.”

교수의 말에 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루비아는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수 없이 많이 봐온 수행평가인데,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루비아가 무대 위로 올라가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그녀에게 내밀어졌다.

“긴장하지 말고.”

다정한 목소리에 시선을 올리자, 환한 무대 조명 아래 서 있는 토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잘생기지 말라고!

잘생길 거면 친절하지라도 말던가!

이러면 나 너한테 안 반할 거라는 약속 못 지켜!!

하지만 토마는 루비아가 자신의 손을 잡지 못하고 망설이자, 그것을 긴장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는 거, 상당히 안 어울립니다. 영애.”

라는 말과 함께 토마는 루비아의 손을 잡고 무대 위로 끌어 올렸다.

아니, 긴장한 거도 맞긴 한데. 너 때문인 게 더 강하거든?

약속을 지키려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토마가 야속했다.

“그러는 거, 상당히 반할 것 같아요.”

긴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자신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루비아의 모습에 토마는 웃음을 터트렸다.

“절대 안 반한다면서.”

“잘생기지 말던가요.”

상당히 뻔뻔한 대답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토마의 귓가가 붉게 물들었다.

어떻게 이리도 솔직할 수 있을까.

토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출석번호 2번 수학과의 루비아 웨일즈입니다, 미뉴에트 준비했습니다.”

무대 한가운데에 도착한 루비아는 소개와 함께 교수님들께 인사를 마쳤다.

그녀와 함께 서 있는 토마의 모습, 그리고 둘이서 함께 추는 미뉴에트라는 춤을 준비해왔다는 말에 아래에서 그들을 보고 있던 여학생들의 시선이 무섭게 변했다.

너 따위가 어떻게.

라고 말하는 듯한 따가운 시선은 아쉽게도 루비아에게 닿지 못했다.

토마에게는 닿은 듯했지만 말이다.

그 또한 과거 공작가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때가 있었기에 이런 분위기를 잘 감지했다.

자신 때문에 이런 시선을 받는 것 같아 괜히 도와준다고 나섰나, 생각하던 찰나 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도와주신 것이 부질없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는 춰 보겠습니다.”

저 시선에 기가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저렇게 대놓고 노려보는데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걸 걱정해야 하나.

뭐, 일단 시험이 우선이니. 지금은 다행인가.

토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아는 토마의 생각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도와준 세 사람에게 보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저런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었다.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고 루비아는 연습한 대로, 춤을 추었다.

렌과 마찬가지로 교과서적인 깔끔하고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완전한 교과서적인 춤이었다.

노래가 끝이 났고, 루비아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 순간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세 명의 교수 중 유일한 남자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 춤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죠?”

아니, 렌한테는 이런 질문 안 했잖아요!

그냥 사교댄스 중에 그나마 가장 쉬워 보이는 춤 선택한 건데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 이유였다.

하지만 교수님 앞에서 어떻게 저렇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기에, 루비아가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그 순간 토마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도 괜찮으니, 자연스럽게 말하세요.”

거짓말을 못 하는 루비아의 성격상, 자신이 도와준다고 해서 췄다고 할 확률이 높다고 계산한 토마의 빠른 판단이었다.

그런 토마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인지는 몰라도 용기를 얻은 루비아는 입을 열었다.

“이 노래가 마. 마음에… 들어서요!”

거짓말 엄청 못해.

정말로 어색한 대답에 토마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흠,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하지만 다행히도 교수님은 그녀에게 더 캐묻지 않았고 그렇게 루비아는 무대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제서야 뒤늦게 느껴지는 다른 영애들의 질투 섞인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며 무용실 밖으로 나간 루비아는 토마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들었다.

“좋은 서포트였어요.”

처음 보는 행동에 토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따라 손바닥을 들자.

루비아와 그의 손바닥이 부딪혔고 짝,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친구끼리 무언가를 잘 끝냈을 땐 이걸 해 줘야 해요.”

그런 루비아의 모습에서 왜인지 과거, 예린의 모습이 겹쳐보여 토마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영애도 고생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토마도 손을 들었고 그런 그의 모습에 루비아는 환하게 웃었다.

그들의 손이 다시 한번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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