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이들의 기말고사.
그 뒤로, 일주일.
모든 시험이 끝이 났고 마지막 시험이었던 역사 시험의 답안지를 렌과 맞춰보며 루비아는 책상 위에 엎어지듯 쓰러졌다.
하나 빼고, 다 맞았다…!
이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힘들긴 했으나, 결과가 좋으니 가슴 안쪽에서부터 뿌듯함이 몰려왔다.
“고생했어요, 루비아!”
렌 또한 환하게 웃으며 루비아를 축하해 주었다.
“렌, 덕분이죠.”
“무슨 소리예요, 저도 루비아 덕분에 수학 시험을 잘 봤는걸요.”
렌의 말에 책상 위에서 몸을 일으킨 루비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렌이 노력한 덕분인걸요.”
그렇게 두 소녀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성적표 벌써 나왔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남학생의 외침에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나갔다.
아니, 시험 방금 끝났는데?
지구보다 몇 배는 빠른 채점 속도에 루비아가 눈을 크게 뜬 그 순간, 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마탑에서 채점 도구를 만들어 줬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어쩐지 이 세계에 OMR카드가 있더라.
나도 중학교에 입학하면 사용한다는 얘기만 들어봤지 써본 건 처음이었는데. 누가 그런 걸 만든 거야 대체!
루비아는 그런 끔찍한 작품을 만든 사람은 분명 자신 같은 빙의자가 분명하다 생각하며 렌과 함께 성적표가 걸려 있는 복도로 향했다.
“시험은 잘 봤나요, 영애?”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갈색 머리의 영애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험을 나름 잘 본 것 같았다.
“네.”
하지만 루비아도 잘 봤다.
루비아가 자신감을 보이자 소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보자구요.”
아냐, 걱정하지 마. 자신감은 어떻게 해도 너 못 이길 것 같으니까.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성적표가 붙어 있는 복도에 도착했음에도, 세 소녀는 성적과 등수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성적표 앞에 바글바글 몰려 있는 다른 학생들 때문에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렌, 보여요?”
루비아의 말에 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멀어 글씨를 읽을 수도, 저 인원수를 뚫고 가운데로 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학년에서 삼 등이네, 축하해. 렌.”
그 순간,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레이안과 그를 부축하고 있는 토마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먼 거리를 어떻게 읽은 것인지, 토마가 그녀의 성적을 알려 준 것이었다.
“내가 학년 수석이고, 레이안이 차석. 사 등부터는 처음 보는 이름이네.”
이어 자신의 성적과 레이안의 성적까지 불러준 토마는 마지막으로 루비아의 이름을 찾는 것처럼 성적표를 쭉 훑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성적은 나오지 않았고.
루비아는 슬슬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뭐 밀려 썼나 봐!
가채점 당시, 그렇게 낮은 점수는 아닌 루비아였기에. 토마가 지금까지 찾지 못한 것이라면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었다.
스스로의 실수를 자책하며 루비아가 한숨을 내쉰 그 순간, 토마의 눈이 커졌다.
“못 보고 지나쳤는데 수석이 둘이었네, 축하해. 영애.”
헐.
나 수석이래!
토마의 말에 루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렌을 끌어안았고, 렌 또한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환하게 웃었다.
“축하해요, 루비아!”
아이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성적을 내었기에 행복해하고 있었으나.
하지만 그 자리에서 웃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갈색 머리의 소녀였다.
“제 이름은 테이타 루라고 해요. 혹시 제 성적도 확인해 줄 수 있나요?”
부들거리며 입을 연 소녀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토마는 시선을 다시 성적표로 옮겼다.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성적표를 바라보던 토마는 입을 열었다.
“저. 성적표에는 백 등까지밖에 올라오지 않는 모양이야.”
그의 말에 소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수치심과 분노는 루비아에게 다가왔다.
고개를 아래로 내린 채, 루비아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던 그녀는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두고 봐요, 다음번엔 당신을 이기고 렌 님의 옆자리를 빼앗을 거니까!”
라고 소리치며 말이다.
하지만 테이타의 말은 수석의 기쁨에 젖어 있는 루비아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에 비해 루비아와 함께 있던 토마와 레이안, 심지어 렌은 똑똑히 듣고 말았고.
피식 웃음을 터트린 토마는 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 렌 네 친구니?”
“아니, 내 친구는 루비아밖에 없어.”
렌은 그렇게 말하며 루비아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고.
루비아는 이 소식을 들은 자신의 부모님과 언니 실비아가, 기뻐할 것이라 생각하며 환하게 웃었다.
* * *
기말고사가 끝이 났다.
이 말이 무엇이냐, 여름 방학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황궁에 들렀다가, 바로 델아트로 내려갈게.”
“알겠어.”
레이안은 황궁과 델아트로 보낼 편지를 접으며 토마에게 말했다.
이번 여름 방학을 델아트에서 보내기 위해서는 부모님과 공작가에 먼저 허락을 구해야 했으니 말이다.
“편지 보낼 거면 같이 가자.”
토마의 말에 레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우체국이 위치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직도 수석의 기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는데.
그 소녀는 당연하게도 루비아였다.
루비아는 이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부모님과 언니에게 알리고 싶어 편지를 쓰기 위해 온 것이었다.
가장 비싼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구매한 루비아는 바로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론 그 편지 내용의 반 이상은 자신이 수석이 되었다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뿌듯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쓴 루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토마와 레이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루비아를 발견한 것은 레이안이었다.
“안녕, 영애.”
레이안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고 토마는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해 주었다.
그들의 등장에 시선이 갑자기 자신에게 몰리는 것을 느끼며, 루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요즘 들어, 그녀를 보는 시선은 꽤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어쩌다 셋 사이에 낀 들러리에서 공부 잘해서 겨우 셋 사이에 들붙은 들러리로 말이다.
물론 그런 시선에 기가 죽을 루비아가 아니었지만.
“식사는 하셨나요?”
이제는 세 사람과 꽤나 친해졌겠다, 루비아는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고 토마와 레이안 또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같이 들겠나?”
“좋아요! 렌도 부르죠.”
해맑은 루비아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토마는 입을 열었다.
“그럼, 편지 다 쓰면 말해요.”
그의 말에 루비아는 그들이 자신을 기다려 주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이 왜인지 기분이 좋아져, 작게 미소지은 루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다 쓴 거예요!”
라고 말한 루비아는 빠른 속도로 편지지를 접고 봉투에 넣은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체통으로 달려갔다.
빠르게 편지를 부친 뒤, 다시 쪼르르 달려오는 루비아를 보며 토마와 레이안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실비아의 동생이기 때문에 그녀를 잘 챙겨주려 했던 것이지만, 가면 갈수록 순수하고 맑은 루비아에게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조금 사차원이긴 했지만.
토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아이들은 다 함께 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 범위야, 도서관 아니면 기숙사 그것도 아니라면 라라와 산책 중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느 장소에도 렌이 보이지 않았다.
여성 기숙사는 남자가 들어올 수 없기에, 루비아는 혼자 렌의 방 앞에 서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이럴 때면 스마트폰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전화 한 번, 문자 한 통이면 끝나는 디지털 시대 말이다.
루비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그때, 기숙사로 걸어오고 있는 렌의 모습이 보였다.
“렌!”
드디어 만났다는 반가움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렌 또한 웃으며 루비아에게 다가왔다.
“어디 있었어요?”
“어디 갔었어요?”
마주한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질문을 내뱉었고.
루비아는 그제서야 렌 또한 자신을 찾아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우체국에 다녀 왔어요, 렌은요?”
“식사 시간인데, 루비아가 안 보여서 찾으러 다녔어요.”
“미안해요, 말하고 다녀올 걸 그랬다.”
루비아의 말에 렌은 고개를 저으며 루비아의 손을 잡았다.
“아니에요,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제 같이 식사하러 가면 되는 거죠.”
렌이 그렇게 말한 순간 아래쪽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루비아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토마와 레이안 앞에 모여있는 영애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식사를 하려면 저기부터 뚫고 지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
루비아의 말에 렌 또한 창밖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마에 손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 * *
“고마워, 덕분에 풀려났어.”
레이안의 말에 렌과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인기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렇게 생각한 루비아는 시선을 살짝 올려 렌을 바라봤다.
아닌가, 세 사람인가.
렌의 차가운 이미지 때문에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지 그녀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꽤나 있었다.
레이안과 토마의 경우 거의 여학생에 한정되었으나.
렌의 경우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멋있는 그녀를 좋아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함부로 웃어주고 다니지 마.”
렌의 말에 토마와 레이안은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요즘은 줄어든 거야.”
“거절할 건 확실하게 거절하는 거 알잖아.”
그래, 인기 많은 게 어떻게 너네 잘못이겠어.
루비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아직도 렌을 포기하지 못한 것인지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테이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테이타 뿐만이 아니었다.
남녀 불문하고 주위에 있는 많은 영식과 영애들이 루비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나한테 왜 그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