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58)화 (158/207)

20. 아이들과 여름방학.

“으음.”

나는 토마와 렌에게서 온 편지를 내려놓으며 작게 신음했다.

이걸 어떡하지.

아이들에게서 온 편지에는, 그들이 기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내용과 다음 주부터 방학이라는 소식이 적혀있었다.

이 편지가 도착했다는 말은 아이들이 이제 곧 방학을 맞아 저택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고민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더 더워질 테니, 그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할 텐데.

정원으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얼음 잔에 한가득 맺힌 물방울을 보니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되었다.

거의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다 보니, 날이 이렇게 더워졌다는 것도 몰랐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위로 올리자 맑은 하늘에 반짝이는 태양이 보였다.

눈부신 빛에 표정을 살짝 구긴 그 순간, 불쑥 튀어나온 팔이 내 눈을 가로막았다.

“햇빛이 뜨겁습니다.”

그 뒤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덥지도 않은 것인지 검은색의 셔츠를 입고 있는 바리다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라스. 나한테 뜨겁냐고 물을 상황이 아닌 거 같은데요?

“저는 괜찮은데, 라스는 안 더워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의자를 가져오라 한 뒤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역시,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그에게 묻는 것이 좋겠지?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여름 휴가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아이들의 첫 방학인데, 어디든지 좋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 휴가가, 우리의 첫 여행이 될 테니까. 더 고민이 되었다.

내 말에 바리다스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예린은 어디로 가고 싶은데요?”

“저는 어디든 상관없어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으로 가고 싶어요.”

그 순간 바리다스의 얼굴에 아주 잠시,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머뭇거린 순간, 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 바다로 가죠.”

바다, 바다도 좋긴 한데.

여름 휴가 때 너무 당연하게 가는 곳이다 보니까, 조금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은 없으려나.

바다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바다에 간 적이 없겠군요.”

아이들은 델아트 밖으로 나간 적이 없기에 정말로, 당연한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까.

“분명 기뻐할 겁니다.”

“네, 조언 해줘서 고마워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예린은 가고 싶은 곳 없나요?”

“음, 저는 바다로 충분….”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바리다스가 내 앞까지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애들 말고, 단둘이 말이에요.”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저, 저는 어디든….”

괜찮아요, 다 좋아요.

라고 말하려는 순간 바리다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맑고 환한 웃음소리가 정원에 퍼져나갔고 나는 멍하니 그의 모습을 지켜봤다.

“저도 어디든 좋아요.”

고개를 아래로 내려 그는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얘는 어떻게 가까이에서 봐도 잘생겼냐.

이 외모는 앞으로 평생 봐도,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외모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자 그는 다시 한번 예쁘게 웃었다.

“휴가를 두 번이나 내야 하니, 당분간은 조금 바쁘겠네요.”

앗, 그러네.

휴가까지 가서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괜히 휴가 이야기를 꺼내 바리다스를 바쁘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일 많을 텐데 괜찮겠어요?”

“그럼요.”

걱정하는 나를 달래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것보다, 아이들이 탄 기차가 출발했다고 하던데. 늦어도 삼일 뒤에는 도착할 거에요.”

헉, 아니. 내 생각보다 너무 빠른데?

분명 편지는 오늘 도착했는데 말이야. 아직 휴가 계획도,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알 게 뭐야, 오랜만에 토마랑 렌을 볼 수 있는데!

나는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가야겠네요!!”

“네, 그리고 웨일즈 가의 영애도 같이 기차에 탔다고 하더군요.”

웨일즈 가의 영애라면….

루비아?

첫인상을 그렇게 망쳤는데, 대체 어떻게 친해진 거지.

그녀가 초면에 토마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을 아는 나로서는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 일이지만,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좀 궁금하네.

루비아가 순수하고 착한 아이 같아서, 걱정도 없고.

그리고 조금은 다행이네.

나는 렌을 떠올리며 작게 미소지었다.

외부인을 싫어하는 렌과 같은 기차에 탔다는 건, 그녀와도 친해졌다는 의미인데.

아이들 중 렌이 유일하게 또래 친구가 없었기에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유도 혼자가 편하다거나, 수준이 안 맞는다는 이유였으니.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렌의 마음을 열어주고 친구가 되었다니.

렌이 같은 공간을 허락했다는 것만으로도 거의 확실하다 볼 수 있었다.

“실비아의 동생과 친해졌다니, 좋은 소식이네요.”

내 말에 바리다스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그 순간 하늘 위에서 자스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우리가 시선을 위로 올리자 자스민이 창문 위에 서 있었다.

“언니랑 오빠 집에 와?”

저 위치에서 어떻게 들은 건지.

아니, 그것보다 자스민.

너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데?

이 층이긴 했지만, 아슬아슬한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철렁였다.

“자스민! 내려와.”

창문 위에서 내려오라는 의미였으나, 아무래도 자스민은 내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심호흡을 하더니 아래로 뛰어내릴 준비를 했으니 말이다.

저기, 자스민? 아니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자스민은 폴짝, 아래로 뛰어내렸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에 놀란 나는 그녀를 받아주기 위해 자스민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리고 자스민은 안정적으로 품 안에 떨어졌다.

내가 아닌, 바리다스의 품 안으로 말이다.

그녀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자스민이 입을 열었다.

“오늘이 지금까지 점프 중에 최고였어!! 그치, 큰오빠?”

맑게 웃으며, 자스민은 이 층에서 뛰어내린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설마, 아니지?

저런 위험한 장난을 바리다스가 허락해 줄 리가.

하지만 그런 내 믿음은 답지 않게 내 시선을 피하는 바리다스의 모습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라스.”

“…네.”

“상당히 안정감 있게 받아주네요? 마치, 처음이 아닌 것처럼.”

그제서야 자스민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큰 오빠는 잘못 없어! 예전부터 내가 해 달라고 계속 조른 거예요!!”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리다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자스민은 그를 변호하려 했다.

오히려 역효과였지만 말이다.

“아니, 자스민. 네가 사과할 거 없어. 이건 위험한 걸 알면서도 해 준, 너희 큰오빠 잘못이니까.”

싸늘한 내 목소리에 바리다스의 표정이 무너졌고 자스민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은 안 통해.

이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라고. 바리다스의 신체 능력이 초인적인 거 나도 알아.

안 다치게 받아 줄 수 있는 능력도 있다는 거 안다고.

근데 그러다,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

라스도 사람인데 어떻게 실수를 안 하냐고.

“예린, 화났어요?”

“네.”

단호한 내 말에, 바리다스가 자스민을 안은 채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미안해요, 이제 위험한 행동은 안 할게요. 걱정할 걸 알면서도 미리 말을 안 해 준 제 탓이에요.”

바리다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품 안에서 뛰어내린 자스민이 내게 다가와 드레스를 붙잡았다.

“저도 잘못했어요, 이제 이 층에서 받아 달라고 오빠한테 안 조를게요.”

둘의 모습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친구에게 들었던, 남편에게 애를 못 맡기겠다는 말이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저렇게까지 반성하는데, 어떻게 화를 더 내.

“알겠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마요.”

그렇게 말하며 자스민을 안아 들자, 그녀는 내 품에 얼굴을 묻었고 바리다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이번에는 나를 품에 안으며 바리다스는 다시 한번 사과했고.

그 사이에 낀 자스민은 조금 답답한 듯 보였다.

화가 풀리긴 했지만, 그가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직 화 안 풀렸는데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 팔을 펼친 바리다스가 내게서 두 발짝 멀어졌다.

처음으로 보는 민망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 모습에 왜인지 웃음이 지어졌다.

자스민을 땅 위에 내려놓은 나는 그에게로 세 발짝 다가갔다.

아까 만큼이나 나와 바리다스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이번에는 내가 그를 끌어안았다.

“장난이에요.”

내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나를 안은 팔에 강하게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저도 위험한 일은 안 할 테니. 앞으로, 이런 장난은 하지 말아주세요. 심장이 철렁인다는 말을 처음으로 이해할 것 같으니까.”

생각보다 더 귀여운 반응이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때었다.

“화해 기념?”

장난스럽게 말하자, 바리다스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혔다.

그리고 곧이어 나를 안고 있던 그의 팔이 떨어져 자스민의 눈을 가렸다.

“먼저 시작한 거예요.”

다시 그와 나의 입술이 포개졌고.

그제서야 나는 그가 왜 자스민의 눈을 가렸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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