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바다와 첫사랑의 상하 관계.
기차 안에서의 시간은 멈춘 것처럼 천천히 흘러갔고, 아이들 또한 오랜 탑승 시간으로 인해, 지쳐 보였다.
나 또한, 꽤나 지쳐 있었고 말이다.
지금 이 기차 안에서 멀쩡해 보이는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괴물 같은 체력을 지닌 바리다스는 당연했고 의외로 토마와 렌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잘 버텨냈다. 아카데미를 오가느라 자주 기차를 타 익숙해진 듯했다.
바리다스의 체력은 나도 진짜로 닮고 싶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다르게 멈추지 않고 계속 기차에 타 있던 것이기에 이제 좀 내리고 싶었다.
정말, 언제쯤 도착해.
“언제쯤 도착해?”
아, 내가 입 밖으로 말 한 줄 알았네.
말을 꺼낸 건 레몬이었다. 소파 위에 늘어져 있는 모습이 퍽 지루해 보여 안쓰러웠다.
“이제 금방이야.”
바리다스가 레몬을 달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고 그의 말에 레몬 옆에 누워있던 자스민이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어제도 그 말 했자나.”
귀여운 자스민의 말에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제는 자스민을 달래주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거의 도착해 꺼낸 말이었다. 아마 곧 창밖으로 바다도 보이겠지.
“정말로 조금만 더 가면 돼.”
내 말에 자스민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자스민은 내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 귀여워하던 것도 잠시 그녀는 곧 내 무릎 위로 머리를 누였다.
“힘드러어.”
오늘따라 응석이 심한 것으로 보아, 자스민은 정말로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어른인 나도 지루한데 어린 자스민은 오죽할까. 당장 기차에서 내리게 해 주진 못하는 대신 자스민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바다로 가는 길에도 이러니 다시 돌아갈 때는 얼마나 지루해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리 오래지 않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그린이 소리쳤다.
“바다다!!”
답지 않게 잔뜩 들뜬 그린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달려갔다.
각자 하나씩 창문을 잡고 밖을 내다보기 시작한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 바다야!!”
“완전 예쁘다!”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답네요.”
한껏 들뜬 목소리들이 들려왔고 나 또한 오랜만에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열린 창문 사이로 조금은 짠 바다 냄새와 함께 넓게 펼쳐진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라스라의 바다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역시, 유명한 곳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진짜 예쁘네.
멀리서도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은 바닷물과 그 안을 헤엄치는 돌고래와 거북이, 작게 보이는 알록달록한 열대어들은 이곳의 바다가 얼마나 맑은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저거 고래야?”
“거북이들도 있어!!”
사진으로만 봐오던 동물들이 신기한 것인지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금까지 지쳐 있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의 웃음을 보니 정말 바다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맑고 아름다운 바다를 보니 힐링이 되었고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한 기차가 멈추었지만 아이들은 바다를 더 보고 싶은 것인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 도착하냐며 칭얼거린 것은 아무래도 잊은 듯했다.
“멀리서만 보려고? 가까이에서 보면 더 예쁠 텐데.”
달래듯 말하자 바로 풀어지는 아이들의 표정이 귀여워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바다가 있기 때문인지 짠 바닷바람이 느껴졌다.
“바람에서 소금 맛이 나!”
바닷바람이 신기한 듯 외치는 자스민의 목소리에 우리는 다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소금이 바다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자스민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그러네! 소금 맛이 나.”
레몬을 포함해서 말이다.
방금까지 자스민의 말에 웃고 있던 그린은 레몬의 말에 표정을 굳히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레몬도 아직 아직 모를 수 있는 나이… 인가?
레몬이 올해로 열한 살이니까, 초등학교로 치면 사 학년.
모를 수 있는 나이가 아닌데?
처음으로 레몬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슬슬 레몬도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생각을 한 것은 나와 그린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렌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레몬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예법 외에 다른 것은 공부시키지 않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하기 싫다는 공부를 강요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지식은 쌓아둬야 하니 말이다.
“아니, 왜?”
아직까지 레몬은 자신의 말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걸 알려줘야 해, 말아야 해…
알려주는 것이 당연히 좋긴 하다만 지금 말한다면 그녀가 많이 민망해할 것 같아 고민이 되었다.
“당연히 소금 맛이 나지, 바닷물로 소금을 만드는 거니까.”
그린이 막을 새도 없이 레몬에게 타박을 놓았다. 레몬의 얼굴이 붉어졌다.
“공부 좀 해, 허구한 날 드레스랑 보석만 보고 있으니까 모르는 거 아니야.”
그의 싸늘한 말에 레몬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니, 그린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린을 말리기 위해 입을 열려 하니 바리다스가 먼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그린.”
다정하게 타이르는 그의 말에 그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는 레몬이 걱정되어서…”
걱정된다는 사람이 왜 말을 저런 식으로 해.
그린, 너는 레몬한테 공부하라고 할 게 아니라 사회성부터 길러야 할 거 같은데.
한숨을 내쉰 나는 시무룩해진 그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좋게 말해줄 수 있었잖아, 그렇게 말하면 레몬의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
내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는지 그린이 레몬의 눈치를 살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레몬의 모습에 상황을 파악한 그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열었다.
“그, 레몬 내가…”
“잘못했지?”
하지만 레몬은 내 생각만큼 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레몬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당당한 자세가 레몬다웠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안해.”
“좋아 용서해 줄게. 그리고 몰랐던 게 아니라, 아는데 신기해서 감탄한 거뿐이야. 정말로.”
“알겠어.”
근데 레몬, 진짜로 알았던 것 맞지…?
약간의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아무튼 크게 싸우지 않고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공부는 집 돌아가면 할게, 정말로.”
새침하게 웃으며 말하는 레몬의 모습에 그린 또한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예전처럼 같이 배우자.”
그렇게 둘의 작은 소란이 훈훈하게 마무리되던 그때, 우리 쪽으로 붉은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은 우리 앞에 일렬로 서 경례했고 그들 중 황금색의 배지를 달고 있는 남성이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호텔 신리의 메니저 필이라고 합니다. 차일드 가의 귀빈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귀족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호텔의 직원답게 기품이 흘러넘쳤다.
이게 고급 호텔인가.
여느 호텔과는 다른 대접에 속으로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곧 필이 절도 있는 손동작으로 마차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준비해 둔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절도 있는 그의 손동작을 보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은 자스민은 마차에 탄 뒤 내게 속삭였다.
“나 이런 경험 처음이야, 공주님이 된 거 같아.”
그렇게 말하며 작게 미소짓는 자스민의 모습은 정말로 귀여웠다.
우리 자스민이 공주님보다 예쁜데, 공주님 대우를 받아야지. 그치.
누가 들으면 상당히 팔불출 같다고 말할 만한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니 다행이네.”
내 말에 자스민은 환하게 웃으며 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웅, 같이 여행 오자고 해 줘서, 고마워요!”
환하게 웃으며 내 품에 얼굴을 비비는 자스민의 모습은 정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귀여웠다.
…아냐, 내가 더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마워.
“이 정도로 뭘.”
나는 내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어른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자스민을 끌어안고 귀여워를 연발했을 테니까.
“앞으로도 다 함께, 자주 여행을 가자.”
그런 내 말에, 자스민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가든, 형수님과 함께라면 즐거울 것 같아요.”
우리 민은 어쩜 이리 말도 예쁘게 할까.
나, 자스민 너를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전국 일주도 시켜 줄 수 있을 거 같아.
아니, 전국이 뭐야.
세계 일주하러 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스민을 안은 팔에 힘을 준 순간, 내 앞에 앉아있던 토마가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데려와 줘서 감사해요. 형수님.”
너희 말 왜 이렇게 예쁘게 해.
아이들의 예쁜 말에 감격해 남은 팔로 토마도 함께 끌어안았다.
이어 다른 아이들도 입을 열었다.
“네, 정말로 기뻐요. 감사해요.”
“전부터 바다에 한 번쯤 와보고 싶었는데, 먼저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형수님과 함께 와서 정말 행복해요.”
렌과 그린, 레몬까지 차례로 입을 열었고.
나에게 감사를 전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나도 너희와 함께 올 수 있어서 행복해.”
내 말에 환하게 웃은 아이들은 이번에는 바리다스에게 가 그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런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말에, 바리다스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 오는 레몬과 렌의 등을 토닥여주며 입을 열었다.
“다음번에는 더 좋은 곳으로 가자.”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보여주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큰 오빠다운 말이네.
꼭 닮은 그들의 미소에 나 또한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나와 마찬가지로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번 휴가는 정말로 행복할 것 같다고.
앞으로도 이렇게 평화로운 날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