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63)화 (163/207)

25. 바다와 첫사랑의 상하 관계.

예린과 아이들이 라스라에 도착한 그 시각, 레이안과 리리안은 먼저 도착해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잔잔하게 부는 바람과 푸르게 빛나는 바다, 새하얀 모래사장 위에 서 있는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까지.

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많은 수의 호위를 데리고 다니는지, 의문을 가진 귀족들은 그들이 있는 방향을 힐끔거리다, 황실의 문양을 보고 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휴가를 나온 것으로 보이는 황태자와 황녀에게 말을 걸어봤자, 좋은 인상을 심어줄 리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두 사람을 연예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기하게 바라보며 힐끔거릴 뿐이었다.

휴양지로 유명한 라스라이기에 그들을 보는 사람들은 한두 명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황태자와 황녀의 신분인 두 사람에게 이 정도 관심은 이미 익숙했다.

“이제 곧 도착할 시간이니, 우리도 호텔로 돌아가 있을까?”

라스라의 가장 유명한 카페의 파르페를 먹으며 리리안이 입을 열었고 레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러면 가자.”

리리안이 일어나려 하자 레이안의 손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리리안의 얼굴에 묻은 딸기 시럽을 닦아준 레이안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리리안은 소름 돋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이런 거 좀 하지 마.”

기겁하며 자신의 팔을 쳐내는 리리안의 모습에 레이안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서 크레센트의 황녀가 칠칠치 못하다는 소문을 낼까 봐, 두려워서.”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네.”

레이안의 손이 닿은 뺨을 자신의 손으로 비비며 리리안은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는 표현이 더 확실할 것이었다.

리리안이 등을 돌리자 그녀의 얼굴 쪽으로 강한 바람을 타고 흰색 모자가 날아왔다.

“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모자를 붙잡은 리리안은 바람 때문에 망가진 머리를 정리하며 근처에 서 있던 기사 중 한 명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주인을 찾아 줘.”

하지만 그녀에게서 모자를 받아든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안이었다.

그리고 그는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손을 높이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레이안을 보고 차일드 가 사람들이 도착했다고 생각한 리리안은 활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기대했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누군가를 닮은 회색 머리의 영애만 있었다.

“감사합니다, 태자 저하!”

그렇게 말하며 영애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처음 봤을 때는 평범하다 느꼈지만 환하게 웃는 얼굴은 눈이 높은 리리안도 예쁘다고 생각할 정도로 화사하게 반짝였다.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리리안이 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레이안이 회색 머리 영애에게 모자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웨일즈 영애, 방학은 잘 보내고 계십니까?”

아, 실비아 언니의 동생인가.

리리안 또한 실비아를 알고 있기에 루비아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네, 태자 저하는 잘 보내고 계신가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라스라에는 가족 여행으로 오신 건가요?”

오빠가 저 정도로 대화를 이어 나가다니, 꽤나 친한가 보네.

딱히 둘의 대화에 끼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기에 리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렇죠, 그런데 일정이 조금 꼬이게 되어서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 같아요.”

루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런,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루비아의 가족 여행이라면 분명 실비아도 같이 왔을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레이안 또한 아카데미에 입학할 당시 여러 조언을 받았기에 두 사람이 곤란하다면 도와줄 의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호텔 신리를 몇 주 전에 예약했는데, 갑작스럽게 예약이 취소되어 버렸어요.”

그거 우리 때문인 것 같은데.

레이안이 힐끗 리리안을 바라보았고 그녀 또한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예약이 취소된 것은 그들의 여행 때문이었다.

“호텔 측에서 몇 배의 금액을 배상해 주긴 했으나,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말하는 루비아의 표정은 정말로 아쉬워 보여, 레이안은 그녀에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안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들은 현재 신리 호텔 전체를 예약했다.

수용 가능한 인원의 수가 오십 명 정도인 호텔 전체를 굳이 예약한 이유는 그들을 호위하고 보좌하기 위해 따라온 기사와 시녀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물론 황태자와 황녀가 머무는 호텔이니, 안전상의 문제도 있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 모두가 인원에 맞춰 방을 배정받아도 남는 방이 존재했고 레이안은 그들에게라면 방을 양도할 의향이 있었다.

애초에 자신의 책임도 있었으니 말이다.

두 개 정도는 방이 남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생각한 레이안이 루비아를 포함한 웨일즈 가에게 의사를 묻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루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를 가도 이 빈부격차는 줄어들지가 않네요.”

그건 평범한 열네 살이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상당히 어른스러운 말에 왜인지 리리안이 겹쳐 보여 레이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웃음에 루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봤고, 그런 시선에도 개의치 않은 채 레이안은 한참 동안 웃다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제서야 루비아는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

방금 그녀의 발언은 빈부격차의 최정상에 위치한 사람이자, 격차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황태자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런 의도로 하려 한 말은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자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루비아를 보며 레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틀린 말도 아닌걸.”

레이안이 시선을 돌려 리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흥미가 생겼는지 루비아를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루비아가 아니라면 세상 누가, 황태자와 황녀 앞에서 빈부격차를 논할 수 있을까.

괜찮다는 말에도 루비아는 여전히 그들의 눈치를 보았고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레이안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것보다 영애, 내가 마침 신리 호텔에 남는 방이 있는데. 괜찮다면 받아두지 않겠나?”

그의 말에 방금까지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잊었는지, 루비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의 순간이었다.

방금까지 말하고 있던 호텔 예약 취소의 원인이 바로 앞에 있는 황태자라는 사실을 깨달아 루비아는 금세 사색이 되었다.

“아니, 그, 저기…”

항상 당당하던 루비아도 이런 말실수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더듬거리며 그녀는 레이안과 리리안에게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려 했다.

“괜찮으니까, 받아두세요. 영애.”

그런 루비아를 진정시킨 것은 다름 아닌 리리안이었다.

리리안 또한 웨일즈 가에 대한 애정이 깊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민트초코 때문이었다.

바리다스 못지않게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리리안은 민트초코를 처음 만들어 유행시킨 것이 웨일즈 가의 백화점이며 그들에게 판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리리안도 웨일즈 가에게 이 정도 호의는 베풀 의향이 있었다.

물론 그녀도 웨일즈 가의 가족 여행을 방해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고 말이다.

“아뇨, 그래도 이건 너무 부담스러운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루비아는 고개까지 저어가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그들의 제안은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는데.

신리의 하루 예약 비용은 일반 평민의 한 달 생활비, 그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 정도 거절에 굴할 리리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더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선물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거든요. 하나는 영애와 가족분들의 일정이 망가진 데에는 저희의 책임도 있기 때문이고 남은 하나는 제 사심 때문이에요.”

루비아는 리리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리리안은 미소지으며 이유를 입에 담았다.

“저는 웨일즈 가의 민트초코를 사랑하거든요.”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 있는 말이지만, 리리안의 말은 루비아를 더욱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루비아가 바로 민트초코를 이 세계로 가져온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민트초코가 시작된 백화점부터가 루비아가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꺼낸 아이디어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백화점이라는 아이디어로 아버지에게 신뢰를 얻은 루비아가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바로 카페 메뉴에 민트초코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루비아는 민트초코를 좋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루비아의 가족 중 그 누구도 민트초코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런 루비아의 앞에 민트초코를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절친한 친구인 렌을 제외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민초단에 루비아는 결국 환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건 정말로 기쁘고 보람찬 말이네요.”

그런 루비아의 웃음에 리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저 말의 뜻은 아무리 봐도 그녀가 민트초코를 만들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혹시, 영애가 민트초코를 만들었나요?”

리리안의 말에 루비아는 머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네. 완전히 제가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럴 거예요.”

지구에서 있던 제품의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뿐이었기에, 루비아는 차마 당당하게 그렇다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아뇨, 전생에서 보고 따라 했어요.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랬기에 루비아는 최소한의 양심을 지켜가며 대답했고 그녀의 대답에 리리안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황후 관심 없지 않으세요? 저희 오빠 드릴 수 있는데.”

“그건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아까처럼 부담스럽다는 말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하는 루비아의 모습에 레이안은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고급 호텔보다 거절하기 쉽나.

왜인지 씁쓸해지는 레이안이었다.

그 뒤로도 리리안은 포기하지 않고 루비아에게 호텔에서 머물라 권유했고 결국 루비아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길로 웨일즈 백작을 찾아간 두 사람은 상황을 설명함과 동시에, 웨일즈 백작에게 두 개의 객실 열쇠를 건넸다.

“부담가지지 말고 편하게 지내도 됩니다.”

“네, 저희의 친우인 두 영애의 일정을 망친 것에 대한 죄책감이니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휴가 도중 황태자와 황녀를 만나게 된 것도 신기한데, 그들에게 객실까지 양도받다니.

루비아와 실비아의 아버지, 웨일즈 백작은 아직도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딸들이 언제 저런 거물들과 친해졌는지.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황태자와 황녀에게 객실을 양도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실비아와 웨일즈 백작 부인은 좋아했으니 이 정도 부담감은 괜찮아했을 것이었다.

* * *

웨일즈 가가 호텔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뒤.

차일드 가 또한 호텔에 도착했다.

아직 차일드 가도 함께 호텔에 머문다는 사실을 모르는 루비아는 혼자 호텔을 구경하고 있었고.

가장 먼저 짐을 정리하고 마찬가지로 호텔을 둘러보고 있던 토마는 루비아를 발견했다.

생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루비아를 보는 순간 토마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그녀가 레이안이나 아카데미에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누었던 다른 친구였다면 그냥 평범하게 인사를 건넸을 텐데.

토마는 그럴 새도 없이 반대 틈으로 몸을 숨겼다.

루비아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왜, 자신이 그녀를 피한 것인지.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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