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바다와 첫사랑의 상하 관계.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자마자 우리는 모두 함께 바다로 나갔다.
어제는 너무 늦게 도착해 바다에 가기엔 시간이 애매했기에 오늘에서야 바다에 온 것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무섭게 미리 대기하던 시종들이 커다란 황실 문양이 그려진 흰색 파라솔들을 해변가에 설치했고 그 아래에는 주위에는 의자와 테이블이 놓였다.
…와우.
나는 순식간에 고급스러운 카페처럼 변한 해변가를 바라보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이런 대우에는 이제 익숙한 것인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는 어색하게 바리다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 모두가 자리에 앉자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차.”
간단명료한 한 마디에 삼단 트레이에 담긴 애프터눈 티 세트와 찻잔, 주전자가 빠르게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절대 적응 못 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니 주변에 깔린 마정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또 뭐지, 근처에 다가오면 알려주는 경보기인가?
리리안과 레이안의 신분을 생각하면 맞는 것 같았다.
내가 마정석의 용도를 고민하고 있을 때 그린이 입을 열었다.
“저 마정석은 무슨 용도야?”
“모래랑 바람 막으려고.”
그건 그냥 투명한 텐트잖아.
그런 용도로 써도 되는 거 맞아?
왠지 여기 앉은 이후로 바람이랑 모래가 안 날리더라.
어떻게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카페를 차리나 했어.
마정석의 용도를 듣고 놀란 나와는 다르게 그린과 리리안은 담담해 보였다.
“바람이 안 들어오는 건 책 읽을 때 편하겠네.”
“마음에 들면 하나 줄게.”
“그러면 고맙지.”
평민의 한 달 정도의 생활비가 아이들의 가벼운 선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니, 어떻게 갈수록 돈을 쓰는 스케일이 과해지는 거야?
조금 적응하면 더 쓰고 또 적응할만하면 더 쓰고.
내가 혼란스럽든 말든 아이들은 익숙하다는 듯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차에 손도 대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진정이 되려던 차에 가장 먼저 찻잔을 비운 자스민이 날 보며 입을 열었다.
“형수님, 물에 들어가 봐도 돼?”
그녀의 질문에 나는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지구에서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들어가도 괜찮지만, 여기서는 어떤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발 정도는 괜찮을 거란다.”
바리다스의 말에 활짝 미소 지은 자스민은 바로 신발을 벗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다에 들어간 자스민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파도가 다리에 살랑거리고 있어.”
어떻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렇게 귀여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첨벙거리며 장난을 치는 자스민을 바라봤다.
“너무 깊게 들어가면 안 된단다.”
하지만 이미 자스민에게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미 그녀는 같이 들어온 레몬, 리리안과 함께 바다에서 장난을 치며 웃고 있었으니 말이다.
토마와 레이안은 바다는 충분히 봤다며 조금 떨어진 모래사장에서 대련을 하기 시작했고 그린과 렌은 바다에 들어가 보고는 싶었지만 눈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너네도 아직 애들인데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지. 왜 눈치를 봐!
물론 나야 여러 이유로 바다에 들어갈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랬기에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였으면 훨씬 더 재밌게 놀 수 있을 텐데.
워터파크도 가고 야외 수영장도 가고 해수욕장도 가고!
하지만 아직 이 세계가 그런 문화를 받아들이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지금 이곳은 조선 시대와 비슷한 시대이니 말이다.
“그린, 너도 들어와.”
“언니도!”
그때 리리안과 레몬이 두 사람에게 각자 손을 내밀었고 머뭇거리던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들어갔다.
여분 옷과 수건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해서 다행이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 다 함께 물장구를 치며 놀기 시작한 아이들을 바라봤다.
“예린은 바다에 가본 적 있어요?”
나야 많이 가 봤지.
매년 여름마다 친구나 가족들과 한 번씩은 안 빼고 꼭 갔으니까.
“저야 많이 가 봤죠.”
“그곳의 바다는 어때요?”
이어진 바리다스의 말에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 놀려줄 수 있겠는데?
지구야 수영복이나 반바지 민소매 같은 것들을 바다에서 별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수 있지만 이곳은 아니니 말이다.
나는 아이들이 들을 수 없도록 고개를 숙여 바리다스에 귓가에 소곤거렸다.
“제가 살던 곳은 팔과 다리를 다 드러낸 옷을 입고, 다 함께 물에 들어가서 놀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익숙한 바리다스에게는 놀라운 이야기일 것이었다.
지구에서도 근 몇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옷과 머리를 단속했으니 말이다.
“…개방적인 곳이네요.”
한참을 고민하던 바리다스에게서 들려온 대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현대 사회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해주었고 바리다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엄청나게 개방적인 곳이네요.”
결론은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 이 사회 사람들이 보면 개방적인 분위기가 맞기는 하지.
나도 책에서 미리 접해봤기에 문화가 다른 이 세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님 이거 봐봐, 되게 예쁘지!”
그때 우리에게 다가온 레몬이 커다란 소라고둥을 내게 보여주었다.
성인 남자의 주먹 정도 크기인 소라고둥은 푸른색의 빛을 내며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니, 여기는 무슨 그냥 바다에 널려 있는 소라가 이렇게 예뻐…?
정말로 사진 속에서나 볼 법한 예쁜 색이었다.
잠시 감탄하다 소라고둥의 속이 빈 것을 알게 되었다.
“귀에 대보렴, 바닷소리가 들릴걸?”
내 말에 레몬은 눈을 반짝이며 소라고둥을 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진짜네, 우와!!”
레몬의 말에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 또한 돌아가며 소라고둥의 소리를 들었고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공명 소리가 파도처럼 들리다니, 신기하네요.”
기대하지 않았던 그린 또한 다른 의미로 눈을 반짝였다.
“나도 가지고 싶어!”
“나도, 나도!”
그렇게 아이들은 다시 바다를 향해 달려가 이야기를 나누며 소라고둥을 줍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순수하고 맑은 미소에 나 또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로, 라스라에 오길 잘한 것 같았다.
* * *
그 시각, 토마와 레이안은 멀리 떨어진 해변가에서 다른 기사들과 함께 대련을 하고 있었다.
토마가 수도에서 지내던 시절 황실 기사들과 자주 대련을 했기에 그들 대부분은 두 소년을 동생처럼 아껴주었다.
그리고 그들 중 두 아이와 가장 친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도 기사단장 메큐리였다.
“실력이 많이 느셨군요, 공자님.”
메큐리의 칭찬에 토마는 뿌듯하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차일드 가에서 한 대에, 이렇게 뛰어난 검사가 두 분씩이나 나오다니. 정말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 토마는 홀린 것처럼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났고 침묵을 깬 것은 바로 레이안이었다.
“메큐리, 너무 그런 식으로 토마만 칭찬하면 나 서운해?”
하나도 서운해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뻔뻔한 레이안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메큐리는 수염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남의 제자가 더 뛰어나 보이는 법입니다.”
그의 말에 레이안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다른 스승을 알아봐야겠군.”
레이안의 능청스러운 말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 또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넘어온 틈을 타서 레이안은 빠르게 토마의 시선이 향한 곳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방향에는 루비아와 실비아가 바닷가에 들어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직도 멍하니 루비아를 바라보고 있는 토마의 모습에 레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기는 뭘 몰라.
어제 자신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멀뚱히 뜨고 바라보던 토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너 그거 웨일즈 영애 좋아하는 거라고.
보는 자신이 답답해서, 소리치며 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런 건 자기가 자각해야지 남이 알려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의 첫사랑이 그러했다.
첫인상은 좋지 못했지만 천천히 스며들었고 자각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자각한 뒤에는 이미 너무 깊게 빠져든 뒤였다.
과거 자신의 흑역사와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머리를 쓸어넘긴 레이안은 토마를 바라봤다.
자신이야, 안 될 것임을 알았기에 깨닫자마자 포기했으나 토마는 그게 아니니 어서 좀 깨달아주길 바랐다.
레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한참을 바다에서 놀던 루비아가 시선을 돌려 그들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루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해 준 레이안이 시선을 돌려 토마를 바라보았다. 그의 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인사를 마친 루비아는 다시 시선을 돌려 실비아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조금 정신을 차린 것인지, 토마는 입을 열었다.
“레이안, 나 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나 봐. 심장이 쿵쿵 뛰어.”
아니, 이 정도면 좀 알 수 있잖아.
레이안이 짜게 식은 눈으로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던 그때, 메큐리가 입을 열었다.
“그거 부정맥입니다, 열심히 운동하다 보면 한 번씩 그럴 수 있어요.”
능력도 있고 잘생긴 그가 왜 아직도 노총각인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레이안은 생각했다.
이러다 내가 여기서 제일 먼저 장가가겠어.
리리안이 듣는다면 코웃음 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