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바다와 첫사랑의 상하 관계.
“이거 두 분한테 드리고 싶어서, 선물이에요!”
루비아가 꺼낸 것은 바로 핸드크림이었다.
두 사람 모두 검술을 연습하느라 손이 항상 터 있기에 나름 좋은 선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고맙네.”
두 사람의 인사에 루비아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루비아는 레이안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별것 아닌데요.”
그 둘의 미묘한 시선 교환에 나는 생각했다.
이건 무조건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이 있어.
이건 확실한 주식이라고.
내 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차일드 영식도 이번 기말고사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별것 아닙니다.”
레이안과의 대화 이후에 루비아는 토마와도 비슷한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으나.
앞 대화에 내용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이미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내게는 루비아와 레이안이 이어질 수 있는 과정과 결과까지 수 가지의 가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황태자와 빙의자….
클리셰상 이건 충분히 될 만한 주식이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에 빠진 유아에게 몇 권 추천을 받아 읽었기에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는 알고 있었다.
제목은 엑스트라였던 내가 황태자의 약혼녀…?
나 이미 소설 한 편 다 봤다.
완결까지 십 년 정도 남은 소설.
이미 내 안에서 성인이 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치르고 있었다.
나 줄거리도 짤 수 있을 것 같아.
소설 속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엑스트라에게 빙의한 내가 가족의 사업을 부흥시키고 남자 주인공 동생의 절친인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듯한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유아에게 소설 이야기 너무 들었나 봐…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또 뵈어요!”
잡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루비아가 모두에게 선물을 전달한 루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서 들어가렴.”
내 말에 루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다시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루비아가 혼자 돌아가긴 너무 어두운데, 누가 바래다주고 올래?”
노을이 모두 지고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해변가는 어둡긴 했다.
우리가 있는 곳을 제외하면 말이다.
아까 설치한 마정석 조명 덕에 우리의 주변은 여전히 낮처럼 밝았으니까.
마정석의 성능이 꽤 좋은 것인지 먼 곳까지 밝게 비추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도 바로 가로등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잘못 생각했다…. 하나도 안 어둡구나.
두 사람을 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설득력이 있는 주장을 하지 못했다.
나는 도와달라는 의미를 담아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눈치 빠른 그라면 분명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꼈을 거라 생각하며.
“이 시간에 영애를 혼자 보낼 순 없지, 내가 호텔까지 데려다줘도 괜찮겠니?”
그게 아니야.
솔직히 말해 이제 막 중학생인 애들이 데려다주는 것보다야 바리다스가 데려다주는 게 확실하겠지만!
내 목표는 루비아의 안전한 귀가…도 물론 중요하지만!!
진짜 원하는 건 레이안과 루비아 둘이 있을 시간이라고!!!
“아뇨,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
그 순간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이안이었다.
생각보다 적극적인 그의 태도에 나는 다시 생각했다.
이건 확실하다고.
“엥, 아니에요! 호텔까지 얼마 멀지도 않는데. 괜히 수고하실 필요 없어요.”
“그럼 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영애님.”
메큐리 경의 행동은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그는 현재 우리의 경호를 맡고 있었고 그의 윗사람인 황태자나 공작인 바리다스가 가는 것보다 낮은 직급의 그가 가는 것이 맞았으니까.
게다가 레이안이 그녀를 바래다준다고 가정하면 경호하고 있던 기사들 또한 움직여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공적인 경우였다, 이건 레이안의 사적인 일이라고.
눈치 없이 왜 끼어들어요, 메큐리 경은 빠져 있어!
속으로 몇 번씩이나 메큐리 경에게 소리치며 나는 루비아를 바라봤다.
루비아 말해, 레이안과 가겠다고 말하라고.
하지만 루비아는 나 못지않게 눈치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메큐리의 말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루비아 또한 귀족이기에 기사의 호위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이 왜인지 오늘따라 아쉽게 느껴졌다.
그렇게 루비아는 메큐리 경의 호위를 받으며 호텔로 향했고 나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저희도 슬슬 돌아가죠.”
루비아를 바래다준 메큐리가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다스가 꺼낸 말이었다.
금방이라도 해가 완전히 저물 것 같았으니 그전에 돌아가자는 바리다스의 말에 동의했다.
바리다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개를 줍고 있던 자스민과 레몬을 불러왔다.
자스민은 바다에서 더 놀고 싶은 것인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 놀면 안 돼?”
그런 그녀의 말에 바리다스는 어둡게 변한 바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더 어두워지면, 저기서 괴물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전직 어린이집 교사로서 평가하자면 꽤나 뛰어난 임기응변이었다.
“세상에 괴물이 어디 있어.”
하지만 아쉽게도 자스민은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었다. 바리다스의 말에 피식 웃은 자스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으니 말이다.
자스민은 이제 그런 말에 속을 정도로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그 괴물이라면, 저도 들어본 적 있어요.”
그 순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렌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의 말에 동의했다.
“어두운 바닷속에서 나오는 그 괴물을 말하는 거군요.”
자스민은 우리의 말을 믿지 않는 척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는 보고 말았다.
자스민의 어깨가 잦게 떨린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스민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특별히 그만 놀아 줄게. 나는 괴물 같은 거 안 믿지만. 큰 오빠야랑 형수님이 믿는 거 같으니까. 걱정 안 끼칠게.”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안아달라는 듯 팔을 벌리고 내게 다가오는 자스민의 모습이 귀여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고마워.”
그녀를 안아주며 말하자 자스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호텔까지 멀지 않았음에도 열심히 노느라 지쳤던 것인지 자스민은 내 품 안에서 잠들었고 바리다스가 내게서 그녀를 받아들었다.
확실히 자스민이 많이 자라긴 한 모양이었다.
자스민을 안고 있던 건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어깨가 저려 왔다. 어깨를 주무르고 있자니 뒤쪽에서 리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진짜로 괴물 있어?”
눈치껏 자스민이 깨어 있을 땐 묻지 못했지만 이제 편하게 물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질문이 향한 대상은 그린이었고 그는 뭘 그런 걸 묻냐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있겠습니까?”
그린의 말에 리리안의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다.
“에이, 아쉽네. 직접 보고 싶었는데.”
…나는 이제 리리안이 순진한 건지 조숙한 건지 모르겠어.
어쩔 땐 가장 성숙하면서 이럴 때 보면 가장 어린아이 같았으니 말이다.
“전부터 말씀하시던 크라켄을 말씀하시는 거면 얕은 바다에서는 거의 출몰하지 않습니다.”
아니, 바다 괴물이 진짜로 있던 거였어?
잘 생각해 보니 마법이랑 드래곤도 있는데 크라켄도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바다에 가기 조금 무서워졌다.
“아니 걔 말고 인어 보고 싶었어.”
리리안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그린은 입을 열었다.
“인어라면 보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간간히 라스라에서는 목격담이 들려오니 말이죠.”
“맞아, 여기 유명하잖아. 인어를 보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미신.”
“저는 그런 미신은 믿지 않습니다, 당장 가장 유명한 인어만 보더라도 사랑이 이뤄지지 않아 물거품이 되었으니 말이죠.”
여기는 인어공주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 수필이나 일기구나.
다시 한번 이 세계관이 판타지라는 것이 체감되었다.
인어라면 나도 보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내게 잠시 생각에 잠긴 순간 레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린은 너무 낭만이 없다니까, 그렇게 살다가는 평생 연애 못 해 너.”
“어쩌라고, 나는 혼자 살 거야.”
단호한 대답에 레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원래 그런 말을 하는 애들이 가장 먼저 결혼 하는 거야.”
레몬, 너는 그런 말 어디서 들은 거야…
나는 이제 슬슬 아이들의 동심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의 걱정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 뒤로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럴수록 내 걱정은 더 깊어져만 갔다.
호텔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바로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고.
나는 자스민을 방에 눕혀준 뒤 돌아온 바리다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라스도 느꼈죠.”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전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역시 눈치가 빠른 그답게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알아들은 듯했다, 그의 답에 이제 정말 확신이 들었다.
나는 자신감의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비아와 레이안이 서로 좋아하는 거 같죠?”
“네… 아니, 네?”
바리다스는 왜 그런 생각을 하냐는 듯 내게 되물었고 나는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됨을 눈치챘다.
“아닌가요?”
내가 역으로 되물어도 그는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웃던 바리다스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단호한 대답이었다.
아니, 근데 그 분위기는 아무리 봐도 양쪽의 호감이 있는 것 같았는데.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바리다스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아이들의 일이니까, 너무 신경 안 쓰는 게 좋아요.”
맞는 말이었다.
조금 궁금하긴 했으나, 이제 내가 아이들이 사생활에 간섭받을 나이는 아니었으니까.
“알겠어요.”
내 대답에 바리다스는 내게 작게 입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나한테나 더 신경 써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