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바다와 첫사랑의 상하 관계.
바리다스와 호텔로 돌아갔을 때 한 방향을 주시하며 수군거리는 기사들을 목격했다.
그들이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후드를 덮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수상한 차림이라 남자를 주시하고 있던 그때 그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를 쫓아 시선을 옮기니 그 끝에는 나도 잘 알고 있는 회색 머리의 소녀가 서 있었다.
바로 실비아 말이다.
실비아의 친구인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실비아의 친구라면 이상한 사람은 아닐 테니 경계를 풀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안심해도 될 거라 전하려 기사들을 바라보니 그들도 이미 실비아를 발견하고 경계를 푼 듯했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네.
다시 실비아에게로 시선을 옮겼지만 두 사람은 그새 사라져 있었다.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마냥 빠른 속도였다.
뭐,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설마 남자 친구인가.
실비아는 현재까지 약혼자가 없으니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실비아도 그럴 나이지.
사라진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서 시선을 떼고 발걸음을 옮겼다.
슬슬 아이들을 데리고 호텔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나는 주위의 기사들에게 부탁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들 모두 아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큰 반박 없이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자.”
“저는 조금만 더 있다가 가도 될까요?”
아이들을 모두 모아 호텔로 돌아가자 말했지만 토마는 더 남아있길 바라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토마가 다 큰 나이이고 혼자 둬도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늦은 시간에 혼자 두는 것은 좀 걱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밤에도 밖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기사분들이 같이 있었던 덕분이니 말이다.
“저도 같이 있을게요.”
그 순간 레이안이 말했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 애 하나에서 둘이 되면 그냥 보호해야 할 사람이 두 명으로 늘어난 거잖아.
아닌가, 레이안이랑 토마니까 조금 다르려나.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둘의 신분을 생각하면 또 아니었다.
기사 중 한 명을 골라 부탁하는 것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 모두 하루 종일 땡볕에서 고생해주었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허락을 해주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곁으로 다가온 메큐리 경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두 분의 호위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안심이죠.”
“당연히 해야 할 일 입니다.”
황실에서 주는 월급이 얼마인지는 모르겠는데 보통 이 시간이면 대부분 쉬러 들어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메큐리 경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그런 내 인사가 부담스러운 것인지 메큐리 경은 손을 들어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말로 해야 할 일인걸요.”
그 순간 자스민이 우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러면 나도 더 있을래!! 오빠들이랑 있을래!!!”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했기에 당황한 내가 메큐리 경을 바라보자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스민과 시선을 맞췄다.
“대신 저희 곁에서 멀어지시면 안 됩니다.”
“응! 응!!”
이건 정말로 감사 인사를 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어린아이를 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자연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걱정되는 마음에 호텔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먼발치에서 토마와 레이안의 손을 잡고 있는 자스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들, 아니 자스민이 메큐리 경을 힘들게 하면 어떡하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자스민이 메큐리 경의 목 위에 올라타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냥 데려올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리리안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메큐리 경이 아이들을 좋아해서 그러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오빠 어릴 땐 기사단장 자리도 내려놓고 호위 기사가 되어 업고 다녔어요.”
“그렇구나.”
“정말로 오빠가 예전에 철없었던 거, 반은 메큐리 경 탓이에요.”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끝낸 리리안은 다시 레몬의 곁으로 돌아갔다.
근데, 리리안 너는 누구한테 배워서 그렇게 됐니.
누구한테 인생과 그런 말들을 배운 거야, 나도 좀 알자.
그래도 리리안의 말 덕에 조금은 안도가 되었다.
그녀는 내 부담감을 덜어주겠다고 거짓말을 성격은 아니니 말이다.
메큐리 경이 괜찮다면야 상관없겠지.
호텔 안으로 들어와 아이들을 각자의 방으로 들여보낸 뒤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나도 쉬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실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공작부인.”
“무슨 일이에요, 실비아?”
슬프게 느껴질 정도로 진지한 표정의 실비아는 내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
“상담이 필요한 일이 있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그래요.”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내 수락에 실비아의 표정이 잠시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졌다.
“…고마워요.”
항상 씩씩하고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던 실비아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걱정이 되었다.
카페로 내려가려 했으나 우리의 발길을 막은 목소리가 있었다.
“저도 같이 들어도 괜찮을까요?”
뭐야, 다 방으로 들어간 거 아니었어?
평소와 같은 새침한 표정으로 다가온 리리안은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실비아를 바라봤고 나는 거절할까 고민하다 당사자인 실비아가 선택하는 것이 맞다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네, 괜찮아요.”
그녀의 태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리리안의 신분 때문에 승낙한 것 보다는 그냥 어린아이로 보는 것 같았다.
그냥 어린아이로 생각하면 안 될 텐데.
당사자가 괜찮다니까, 뭐 상관없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소녀와 함께 아래층의 카페로 향했다.
우리는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각자 하나씩 음료를 주문했다.
“공작부인은 팬으로써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팬… 이라면.
나도 고등학생 때와 중학생 시절 좋아한 아이돌이 있긴 있었다.
그 그룹에서 가장 인기 많았던 멤버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탈덕하긴 했지만.
실비아가 저런 말을 할 사람이라면 한 명뿐일 텐데.
그녀가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극단 배우인 엘시디어스 말이다.
그의 이름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엘시디어스가 사고를 친 건가?
그렇다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던 실비아의 진지한 표정 그리고 팬으로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있냐는 질문.
분명했다.
엘시디어스가 커다란 사고를 친 것이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혼자 결론을 내린 나는 입을 열었다.
“저도 당연히 있죠.”
일단은 엘시디어스가 무슨 사고를 쳤는지 들어보고 상담을 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만약 결혼 전으로 돌아가, 팬으로써 응원하고 좋아해 오던 사람이 공작부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하지만 이어진 질문은 내 예상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유부녀에게 할 질문도 아닌 것 같았고 말이다.
예상과 다른 질문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으니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팬으로서 좋아하고 있던 분에게 고백받으셨나요?”
그녀의 질문에 눈을 크게 뜬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고긴 한데, 다른 의미의 사고네.
그렇다면 아까 내가 본 남자가 엘시디어스였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다.
들켰으니 더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실비아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는 엘시디어스를 좋아해요. 팬으로써 계속 응원해 왔고 늘 그가 최고의 배우라 생각해 왔어요. 근데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실비아는 어떻게 만났는지 언제 고백을 받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었고 나는 진지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엘시디어스와 실비아가 처음 만난 건 그녀의 생일 파티부터였다. 그 뒤로 간간이 만남을 이어 나가다, 오늘 라스라의 바다에서 고백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 실비아의 생일 파티에서 본 사람이 진짜 엘시디어스가 맞았구나.
그냥 닮기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저는 팬심과 사랑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팬으로 그를 좋아하던 제가 그와 만나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 관계의 선택권은 실비아에게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실비아가 행복하고 기쁘길 원했다.
“저는 그런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건 실비아의 마음인걸요. 실비아가 생각해야 할 건 어떤 선택을 해야, 가장 행복할 수 있을지 그거뿐이에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리안 또한 입을 열었다.
“왜 고민해요? 그냥 만나보면 되는 거지. 영애의 그 감정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봐요. 이 관계에 대한 선택권은 영애에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양해를 구해요. 나는 이런 마음인데 괜찮겠냐고.”
내 말이 실비아의 입장에서 그녀의 행복을 위해 하는 말이라면, 리리안의 말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가장 좋은 방법을 제시해 준 것이었다.
실비아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리리안을 바라봤다.
정말로 리리안은 인생 2회차가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두 분 다 조언 감사해요. 저 엘시디어스를 만나보고 싶어요. 덕분에 용기가 생겼어요. 고마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한 실비아는 건들지도 않은 음료수를 내버려 둔 채,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그녀의 표정에 나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참 전에 서빙된 음료를 마시기 시작했다.
근데 나 탈덕한 거 연애설 터져서 그랬는데.
…깊게 생각하지 말자 실비아가 좋다면 좋은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