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바다와 첫사랑의 상하 관계.
실비아가 연애 상담으로 고민을 털어놓고 있을 때 루비아는 부모님의 걱정거리를 늘리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갔던 루비아는 다시 바다에 나가고 싶어 했다.
밤이 깊었으니 부모님은 당연히 허락해 주지 않으셨고 그에 굴하지 않은 루비아는 몰래 호텔에서 빠져나와 바다로 향했다.
오늘 들어가면 언제 다시 바다에 올 줄 알고 이 기회를 놓쳐?
환상이나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인어가 현실에 존재한다는데 어떻게 호텔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냔 말이야.
주위가 이렇게 환한데,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어?
안일한 마음으로 바다에서 인어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루비아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공작 가의 아이들이 호텔로 들어감과 동시에 기사들도 조명을 들고 철수해 바닷가는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길과 그곳을 환하게 비추는 가로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어둠은 루비아를 두렵게 만들기 충분했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바다를 보던 루비아는 조금 빛과 가까운 곳으로 가 인어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 이 정도로 어두우면 인어도 안 보일 거야, 절대로 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안 보여서 가로등 앞으로 가는 거야.
루비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발길을 돌린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악!!!!!”
깜짝 놀란 루비아는 질색하며 어깨 위의 손을 쳐내며 반대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계속해서 루비아를 쫓아왔고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루비아는 더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루비아 인생에서 이렇게 열심히 뛰어본 적은 정말로 처음일 것이었다.
“영애!”
그 순간 들려온 부름에 루비아가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붉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루비아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멈춰 설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멈추려고 했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힘이 빠진 루비아는 넘어질 듯 무너져 내렸고.
그런 그녀를 토마가 가까스로 떠받쳤다.
“우와, 고마워요.”
자신과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음에도 가볍게 자신을 받아 든 토마가 신기한 것인지 루비아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인사했다.
토마는 그녀를 세워준 뒤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저 때문에 놀라신 것 같은데 제가 죄송하죠.”
“아니에요.”
그 뒤로 잠깐의 정적이 찾아오며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정적을 깨며 먼저 운을 띄운 것은 토마였다.
“근데 이 시간에 왜 혼자 나와 계십니까? 밤바다는 위험합니다.”
솔직히 말해 중학생이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건 충분히 어른들이 걱정할 만하고 위험하긴 했다.
근데 너는 나랑 동갑, 아니 한 살 차이잖아.
루비아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토마의 스펙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너는 혼자 밤에 돌아다닐 만하구나.
“이제 딱 들어가려고 했어요.”
이렇게 된 거 토마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 인어를 찾아보자.
결론을 내린 루비아는 호텔 쪽으로 슬쩍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렇게 말하면 토마가 그냥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토마는 루비아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냐, 이런 친절 필요 없어.
이런 매너 가지지 말라고.
나는 인어가 보고 싶단 말이야!!
루비아는 토마가 내민 손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이렇게 된 이상 토마를 떨쳐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런 식이면 저는 제 말에 책임 못 져요.”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말에 토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모습을 보며 루비아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영식을 좋아하지 않겠다는 제 말에, 책임 못 진다구요.”
루비아가 꺼낸 방법은 바로 협박이었다.
토마는 지난번 자신의 고백을 거부했으니, 이렇게 말하면 분명 자리를 떠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토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다.
지난번에 루비아의 고백을 단번에 거절했던 것과는 반대로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태도였다.
루비아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고서야 토마의 입이 떨어졌다.
“그러셔도 상관없으니,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토마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루비아는 좌절했다.
이 협박까지 먹히지 않을 줄이야.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저, 인어가 보고 싶은데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요?”
바로 솔직하게 진실을 고백하는 것 말이다.
토마는 그제야 루비아가 했던 말의 뜻을 이해했다.
왜 저런 말을 하나 했더니, 자신을 돌려보내려 한 협박이었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토마는 왠지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하지만 서운하다는 생각보다 루비아의 협박이 귀엽다는 생각이 더욱 크게 들었고 토마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루비아의 궁금증만 더 커졌다.
그래서 더 있어도 된다는 거야, 뭐야?
“그런 이유라면, 저희와 함께 기다리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토마는 레이안과 메큐리, 자스민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지만 루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있는 곳 주변에는 어느새 마정석으로 빛나는 조명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렇게 빛나는 곳에 있다가는 금방 부모님의 눈에 띌 것이 분명했다.
“…저, 몰래 나왔어요.”
어차피 다 들킨 거 루비아는 모든 걸 털어놓았고.
그제서야 토마는 루비아가 왜 저런 말을 해서 자신을 돌려보내려 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루비아의 모습에 토마는 고민했다.
상태를 보아하니 자신이 호텔로 돌려보낸다 해도 다시 바다로 돌아올 것 같았고 그렇다 해서 어두운 밤에 혼자 돌아다니게 둘 수도 없었다.
자신과 함께 가자는 말도 거절하고 있으니 방법은 하나뿐 아닌가.
“그렇다면 제가 같이 있어 드리는 건 괜찮습니까?”
토마의 말에도 루비아는 멀뚱히 그를 보았다. 그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토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께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
“들킨다면 저희와 함께 있었다고 하면 되죠.”
“…….”
하지만 토마의 설득이 먹히지 않는 것인지 루비아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토마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걱정돼서 그래요, 안 될까요?”
그러자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던 루비아의 입이 떨어졌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저 정도로 말하는 사람의 말을 거절할 정도로 루비아는 매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토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리로 와요.”
토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비아는 그의 손을 붙잡고 근처의 거대한 바위로 이끌었다.
주위를 확인하며 몸을 숨기는 것 같은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린 토마가 입을 열었다.
“인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건가요?”
“아뇨? 부모님에게 들킬까 봐요.”
루비아는 호텔에서 바위가 잘 가려지는 각도인지 확인한 뒤 바위에 몸을 기대고 걸터앉았다.
그리고 토마를 한 번 돌아보더니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영식도 앉아요.”
그녀 딴에는 귀하게 자란 토마를 배려한 행동이었지만 토마는 귀족이기 이전에 기사였다.
이런 맨바닥에 앉는 일 정도는 자주 있었다는 말이다.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루비아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토마는 그녀를 가볍게 들어 손수건 위로 옮겨준 뒤 겉옷까지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밤바다가 춥습니다.”
“…어, 저는 괜찮은데. 고마워요.”
그제서야 토마가 기사라는 사실을 떠올린 루비아는 조금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호의를 받았다.
여기서 거부하는 것은 기사에게 실례인 행동이라는 걸 소설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소설의 내용을 떠올린 루비아는 토마가 건넨 겉옷을 양손으로 잡았다.
토마는 그런 루비아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언제까지 계실 예정입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거짓말을 해도 그는 자신이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함께할 것이 분명했다.
루비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인어를 볼 때까지요.”
단호한 대답에 토마는 생각했다.
적당히 어울려 주다가 더 늦으면 데려가야겠다고 말이다.
아무리 라스라에서 인어를 볼 수 있다지만 인어가 쉽게 나타나는 생물도 아니니 어지간해서는 인어를 보기 힘들 터였다.
적당한 말을 고르던 토마가 바다 쪽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구름에 달이 가려짐과 동시에 파도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했지만 토마는 느끼고 말았다.
인어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물고기와는 다른 특별한 생명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루비아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을 확인한 토마는 검에 손을 얹고 그 방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두운 바닷속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루비아, 저기.”
여자가 나타난 방향을 가리키며 작게 소곤거리자,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루비아는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드리워진 달빛 아래, 검은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다.
인어라고 하기에는 두 다리가 있었고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가 맴돌았다.
그 여자는 두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한 것인지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렐라.”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여자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루카!!”
소리치며 남자에게 달려간 여자는 방금까지 헤엄을 치고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물기 하나 없이 단정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고.
점차 과격해지는 두 사람의 애정 행각에 토마는 빠르게 자신과 루비아의 눈을 가렸다.
루비아 또한 인어를 보고 싶은 것이었지, 저런 것까지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발걸음을 옮겼고.
아렐라라 불린 여자는 그의 뒷모습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다 다시 바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바다로 들어갈수록 검은 머리는 푸른색으로 물들었고.
그녀의 하반신이 완전히 바다로 들어갔을 때는 달빛 아래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확인한 아렐라는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두 사람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아주 애절하고 슬픈 노래를.
아름답고 청아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홀린 듯 멍하니 그녀의 노래를 감상했다.
노래를 끝낸 뒤 마지막으로 남자가 있는 곳을 바라본 아렐라는 단번에 바다로 뛰어들었고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기 직전.
두 사람은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생긴 아름다운 푸른색의 꼬리를.
두 사람은 그 뒤로 한참 동안이나 여운을 떨쳐내지 못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루비아였다.
“저희 방금 본 것은 비밀로 하는 것이 어떨까요?”
“여기서 목격담이 더 생겨나 인어가 정말로 라스라의 바다에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분명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어려워질 거에요.”
루비아는 환하게 웃는 아렐라와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방금 보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으로 보였다.
애초에 딱히 말하고 다닐 생각은 없었던 토마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스민에게 알려주지 못하는 것만이 조금 아쉬웠다.
그런 그의 대답에 루비아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그 순간 다시 드리워진 달빛이 루비아와 토마를 비추었다.
그녀의 짙은 회색빛 머리가 등 뒤의 바다와 달빛의 색을 받아 신비로운 색으로 반짝였다.
홀린 듯 루비아를 보던 토마는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말았다.
자각과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를 잡아먹을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