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바다와 신혼의 상하 관계.
“두 분은 금술이 정말 좋으시군요.”
마부의 말에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 나는 바리다스를 빠르게 밀어냈다.
“그런가요?”
벽으로 막혀있어 당연히 보일 리 없음에도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돌려 바리다스를 흘겨보자 그는 왜 그러냐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그렇죠.”
너한테 한 말 아니거든?
바리다스가 날이 갈수록 능글맞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공장소잖아요.”
손을 빼내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바리다스는 그런 내 손을 다시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 둘뿐이죠.”
그렇긴 한데, 맞는 말인데.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다시 붙잡힌 내 손을 바라보던 그 순간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좋은 타이밍이었다.
소리치며 잡힌 손을 빼내 마차의 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고 마차에 있는 바리다스를 의기양양하게 바라보았다.
“이제는 둘이 아니지요.”
여기서는 할 수 없을걸.
북적거리는 시장을 바라보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자 마찬가지로 마차에서 내린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밤에는 둘이고 공공장소도 아닐 텐데, 어떡하려고.”
그렇게 말한 그는 내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처럼 손가락 마디마디에 깍지를 낀 채.
…세상에.
어떻게 저런 오글거리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붉어지는 얼굴을 진정시켰다.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만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바리다스와 잡은 깍지에 힘을 주며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그건 제가 한, 할 말이에요.”
삑사리 났다….
안 어울리는 일을 하려 하니 몸도 거부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까보다 열이 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런 나를 보며 바리다스는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그만 웃어요.”
하지만 내 말에도 그의 웃음은 한참 동안이나 멈추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웃어라 웃어.
나는 회나 먹으러 갈란다.
내가 그를 두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그제서야 웃음을 멈춘 바리다스가 나를 멈춰 세우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각오할게요.”
그 말에 더 부끄러워지는 것은 왜일까.
각오하긴 뭘 각오해.
여기서 각오해야 할 건 삑사리 낸 내 입 말고는 없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다 걸음을 빨리했다.
아, 진짜 쪽팔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왜 하필 이런 말을 할 때 이러냔 말이야
“예린 화났어요?”
하지만 바리다스에게는 이런 내 모습이 다르게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차마 쪽팔려서 이런 거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예린이 귀여워서 웃은 거예요, 정말로요.”
네, 저도 화난 게 아니라 쪽팔려서 이러는 거예요. 창피해서!
하지만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는 그가 정말로 내가 화났다 생각할 것 같았다.
근데 어떡해 쪽팔리다고 말하기 쪽팔린걸!
그 뒤로도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바리다스의 표정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더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 화난 게 아니라.”
쪽팔려서.
말실수한 게 엄청 쪽팔려서.
근데 그것보다 쪽팔려서 바로 말하지 못했다는 게 훨씬 쪽팔려서 말하지 못했어요.
라고 당당히 말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실수한 게 민망해서 그랬어요.”
아쉽게도 이어진 나의 목소리는 개미 발걸음 소리만큼이나 작았다.
아니 개미도 이거보단 큰 소리로 걷는다고 항의할걸.
아, 나 오늘 왜 이래.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남편은 개미 숨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는 수준의 능력자였고.
내 작은 목소리를 어떻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으니 말이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제가 안 괜찮아요.
여러 의미로 많이 민망했다.
차마 말로는 대답을 할 수 없어 함께 걷던 그가 발을 멈춤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리다스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곳엔 시장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붉은색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말한 음식점, 여기 아니에요?”
맞긴 한데, 나 지금 뭐 먹을 기분 아닌 거 같아요.
“오늘은 연어 위주의 요리를 제공한다는데, 날것의 연어라 이건 저도 조금 궁금하네요.”
“가죠.”
이건 절대로 연어 때문이 아니었다.
바리다스가 먹어보고 싶다고 하니까, 궁금하다고 하니까 가는 거야.
절대로 내가 연어회를 가장 좋아해서가 아니라고.
그런 내 대답에 바리다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요.”
확실히 비싼 식당이 맞는지 안으로 들어가자 대부분의 자리를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가 등장해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무엇으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셰프 특선으로 부탁하네.”
그런 바리다스의 말에 웨이터 품 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슥슥 그어 그에게 내밀었다.
“결제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총 삼십 골드입니다.”
대부분의 레스토랑이나 식당에서의 결제가 후불이기에 바리다스도 의문이 드는 듯했으나 별말 없이 골드를 지불했다.
군말 없이 결재를 하는 바리다스의 모습을 보며 왜인지 안도한 표정을 짓는 웨이터를 보는 순간 나는 깨닫고 말았다.
설마, 먹튀 할 것 같아서 선불로 받은 건가?
물론 나와 바리다스의 차림이 조금 평범하긴 했으나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아니 어떻게 그냥 있어도 흘러나오는 저 기품을 보면서 먹튀 할 거라 생각하지?
물을 마시는 것조차 우아한 바리다스를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라스한테는 말하지는 말아야겠다.
알면 자존심 상해 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술이나 시켜 볼까.
아까 라스가 말한 라스라의 맥주는 꼭 마셔보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메뉴판을 넘긴 순간 내 시선을 잡아끄는 한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은 바로 동양주라는 이름의 초록색 병에 담겨있는 술이었다.
이거 설마, 소주 아니야?
어떻게 이곳에 소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건 소주가 확실하다고.
“마셔보고 싶어요?”
“네!”
내 말에 작게 바리다스는 추가로 그 동양주라는 술까지 주문해 주었다.
웨이터는 다시 한번 먼저 돈을 받아 간 뒤 술을 가져다주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런 식당은 선불제인가 보군요.”
아뇨, 우리 차림 때문에 선불제가 된 거예요.
하지만 그 말은 차마 내 입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오늘따라 나보다 느린 그의 눈치에 감사하며 나는 웨이터에게서 동양주와 맥주를 건네받았다.
“라스도 한 잔 마셔볼래요?”
책상 위에 세팅을 마친 나는 동양주를 까며 그에게 물었고 내 질문에 망설이던 그는 내게 잔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작은 크기의 술잔이 그의 손에 들려있으니 더욱 작아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잔에 천천히 술을 따라 주었고.
그렇게 내가 따라준 술이 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술을 마시는 것도 잊은 채 그의 반응을 기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맛없어요.”
단호한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표정을 구길 정도로 그가 싫어하는 음식은 처음이었기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써요?”
내 말에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린 술잔을 노려보며 바리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나는 그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 들었다.
“줘요, 남은 건 내가 마시게.”
바리다스는 고분고분히 내게 잔을 주었고 남은 술은 내 입 안으로 사라졌다.
알코올 맛과 쓴맛 단맛이 함께 느껴졌고 나는 깨달았다.
이 세계의 동양주는 소주가 맞다는 사실을.
누군지 모르겠지만 동양주를 만드신 분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동양주를 한 잔 더 마신 나는 함께 나온 커다란 잔에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기 시작했고 바리다스는 그런 내 모습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건 조금 나을 텐데, 마셔볼래요?”
내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적당한 비율로 두 술을 섞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내게서 잔을 받아 마시기 시작한 바리다스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괜찮네요.”
순식간에 한 잔을 비운 바리다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웃으며 그에게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그렇죠?”
평소보다 취하지도 않고 술도 맛있게 느껴지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한 잔을 더 따른 순간 웨이터가 정갈하게 세팅된 회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격 대비 적은 양이긴 했으나 전생에서나 볼 법한 연어 회와 초밥이 그 위에 놓여 있었다.
방금 잡아 손질한 것 마냥 싱싱한 모습에 나는 군침을 다셨다.
진짜 맛있겠다.
이게 얼마만의 회야.
다만 문제는 아직 이곳에 젓가락이 없어 포크를 사용해 먹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포크로 회를 겨우 들어 올린 나는 조심스럽게 연어 회를 입 안으로 넣었다.
“맛있어.”
오랜만에 먹는 연어 회는 리액션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전생에 먹던 것보다 맛있는 것 같아.
순식간에 입 안에서 사라진 연어 회의 여운을 느끼며 나는 회를 한 점 더 입 안으로 넣었고.
다시 한번 연어 회가 내 입안에서 사라졌다.
진짜 맛있다….
맛있는 회에 술까지 함께하니 기분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라스도 먹어봐요.”
내가 먹는 것을 구경하며 연어에는 손도 대지 않는 바리다스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연어를 향해 포크를 움직였다.
결국 그는 연어를 입에 넣었고 곧 그의 눈동자가 커지는 걸 보았다.
“이거 왜 맛있는 거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보며 묻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에요.”
혹시나 입맛에 안 맞으면 미안할 것 같았는데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빈 잔을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내가 술을 한 잔 더 따르려는 순간 바리다스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의 말이 맞긴 했다.
내 주량은 진작에 넘겼으니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진짜 오늘은 안 취할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간절한 표정으로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딱, 한 잔만 더. 어떻게 안 될까요?”
“… 진짜 마지막이에요.”
내 간절한 말에 바리다스는 당연히 허락을 해 주었고.
나는 당연히 그 잔을 마지막으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 정신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바리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오늘은 잘 자요.”
“앞으로 남은 휴가는 정말 각오해야 할 테니까.”
나는 첫날 취해 잠든 것에 대한 대가로 남은 휴가 동안 술을 금지당했고 잠 또한 늦은 새벽에나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