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75)화 (175/207)

37화. 토마가 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지금, 그런 신생 동아리에게 태자 저하를 빼앗겼다는 건가요?”

다음 날, 레이안의 탈퇴 서류를 전달받은 이렌은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렌과 토마를 가입시켜도 모자랄 판에 레이안까지 탈퇴하다니, 이대로라면 동아리의 위상이 무너질 것임이 분명했다.

“네, 같이 다니던 그 영애가 만든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영애, 라는 말에 이렌의 표정이 구겨졌다.

루비아 웨일즈.

최근 잇따른 사업의 성공으로 엄청난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는 웨일즈 가의 둘째 딸이자 이번 시험의 두 수석 중 한 명.

평소대로라면 첫 번째로 동아리 가입 제안을 했을 정도로 그녀의 수준이 높았지만, 이번 연도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루비아의 배경과 성적이 뛰어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서 토마와 렌, 레이안에 견줄 바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대체, 왜 우리 동아리를 거부하고….”

이렌이 동아리에 가지고 있던 자부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으득, 이렌은 루비아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녀는 지금껏 쌓아온 정치와 문학 동아리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그렇기에 현재 상황을 자신의 동아리에 들어오기 위한 루비아의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레이안과 토마와 렌을 인질로 잡고 이렌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도 가입 제안을 받기 위해서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이 없다고 말이다.

“웨일즈 영애에게도 가입 문의를 보내세요.”

“네? 하지만 저희가 지금까지 지켜온 전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뜬 부원이 그녀의 말에 반박했지만 이렌의 눈빛을 본 그는 말을 더 이상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전통보다 현재 동아리의 위상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녀의 말에 동의한 것인지 동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다른 부원들은 입을 다물었고.

이렌은 정치와 문학의 이름이 적힌 가입 신청서를 적어 내렸다.

“이걸 웨일즈 영애에게 전해 주세요.”

그녀의 옆에 있던 부원이 신청서를 받아 들었고 멀어져가는 부원의 뒷모습을 보며 이렌은 이를 갈았다.

자신의 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선택한 루비아가 치졸했다.

하지만 그건 이렌의 착각이었다. 루비아는 정치와 문학 동아리에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루비아가 만든 동아리는 스터디 모임이었다.

나서는 것도 관심받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루비아가 동아리를 만들겠다 결심한 이유는 바로 성적 때문이었다.

과거 전생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을 때의 성적이 가장 좋았던 루비아는 그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동아리를 만들겠다 결심했고.

별생각 없이 학과에서 운영 중인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렌과 토마에게 가입 문의를 한 것이었다.

레이안까지 있던 동아리를 탈퇴하고 자신의 동아리에 가입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자신으로 인해 아카데미에 얼마나 큰 파장이 일었는지 알 수 없는 루비아는 언제나처럼 렌과 함께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부원은 누구로 하죠?”

동아리의 최소 인원인 다섯 명을 재우기 위해, 마지막 부원을 고민하며 말이다.

애초부터 많은 사람을 받을 생각이 없었던 루비아는 최소 인원에 맞춰 다섯 명만 채울 생각이었다.

그들과 수준이 비슷한 전교권 학생 대부분이 이미 동아리에 가입한 뒤라, 마땅한 사람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루비아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렌은 표정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저는 딱히 추천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는 렌이 가입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걸요.”

그런 렌의 사과에 루비아는 손을 저으며 말했고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렌은 작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순진한 루비아는 분명 아무나 가입을 받아줄 테지.

공부가 목적인 동아리긴 하지만 성적보다 착한 학생을 받는 편이 좋을 텐데.

렌은 현재 아카데미에서 그들의 위치가 어떤 수준인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루비아를 자신들과 친해지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은 절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사람들 말이다.

렌은 마침 어딘가 기분 나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학생을 지나치며 생각했다.

“루비아 웨일즈 영애 맞으신가요?”

그 순간 그 남학생의 입이 떨어지며 루비아의 이름이 언급되었고.

불안함을 감지한 렌은 표정을 구긴 채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렌의 까칠한 표정에 그의 눈빛이 조금 떨렸으나, 곧이어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차일드 영애가 아닌, 웨일즈 영애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계속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었으면서 발뺌하는 모습에 기가 찬 렌이 헛웃음을 지었다.

“계속 저를 보고 계시길래, 당연히 저를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단호한 렌의 대답에 남학생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고.

아직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루비아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 사이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서로 차게 식은 시선만을 교환했고.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만 같은 분위기에 결국 루비아는 렌을 막아서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가 얘기할게요, 렌.”

일단 말리기 위해 둘 사이에 끼어들긴 했으나, 루비아는 알고 있었다.

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슨 일이신가요?”

루비아의 부름에 헛기침을 한 남학생은 그녀에게 둘둘 말려 붉은색의 실링 왁스가 찍혀있는 종이를 내밀었다.

“저는 정치와 문학 동아리 소속의 페이든 이라고 합니다.”

자신만만한 미소로 이야기를 꺼낸 페이든은 자신의 동아리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묻지도 않은 동아리의 역사와 장점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동아리 자랑을 한 그는 만족한 것인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동아리에 가입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없는데요.”

하지만 루비아는 그런 건 다 관심 없었다.

렌이 싫어한다는 부분에서 이미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미 그녀에게는 토마 렌 레이안과 함께 만든 동아리가 있기에 황제가 찾아와 가입하라고 해도 다른 곳에 갈 생각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페이든의 표정이 굳어갔다.

그 또한 그녀가 정치와 문학 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해 토마와 렌, 레이안을 강제로 가입시켰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왜 거부하시는 겁니까? 그 어떤 동아리도 저희보다 좋은 성적을 받으실 수 없을 겁니다.”

“그야, 전 이미 동아리가 있으니까요?”

이건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간단한 문제였다.

다른 목적이 아니라 정말로 토마와 렌, 레이안과 친해 그들과 동아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페이든 또한 누구보다 성적을 중요시하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교우 관계란 미래를 위해 다져둔 대외적인 사이를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페이든은 루비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동아리에서는 높은 성적을 받으실 수 없을 겁니다. 이번 중간고사에서는 수석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자신들의 동아리를 무시하는 듯한 그의 말에 화가 난 렌이 입을 열기 전 루비아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신의 일을 친구인 렌에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성적만이 학교에 다니는 이유라 하는 페이든을 불쌍하게 느꼈다.

“네, 학교. 아니 아카데미에서는 성적보다 중요한 것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페이든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대체 성적보다 중요한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건 애초에 근본적인 생각부터 달랐다. 하지만 페이든은 이를 깨닫지 못했고 이해되지 않는 루비아의 행동에 의문만 가졌다.

“높은 성적을 받으실 수 없을 텐데도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을 보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의 모습에 루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카데미에서에서 성적도 중요하죠, 그건 당연해요. 그렇지만 아카데미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한 루비아는 웃으며 렌을 돌아보았다.

“친구와 학창 생활 말이에요.”

그 말은 페이든에게 함과 동시에 렌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루비아는 알고 있었다.

렌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는 고사하고 이야기조차 나누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은 렌에게 몇백 명의 친구보다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었다.

그건 당당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렌이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만들며 좋은 사이가 되길 바랐다.

이것에 관해서는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었고 강요하고 싶은 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평생의 한 번뿐인 학창 생활을 각자의 이유로 포기한 두 사람을 설득해 보고 싶었다.

이 아카데미에서 우리가 함께할 십 대의 시간은 그냥 넘겨 버리기엔 너무 아까우니 말이다.

“아카데미에서의 성적도 중요하죠, 그 마음은 저도 이해해요. 하지만 저희는 아직 어리고 많은 것을 겪어봐야 해요. 그리고 저는 그러기 위해서는 친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카데미는 무언가를 배우러 오는 곳 아닙니까?”

페이든은 갑자기 자기보다 어린 루비아에게 무언가를 가르침 받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루비아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루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지식만이 아니에요. 인간관계와 사회생활도 배울 수 있죠.”

페이든과 렌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는 그저 성적과 앞으로 있을 사교 활동을 위해 다니는 것이었고 친구는 귀찮기만 한 존재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배움의 다른 종류라면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비아의 의도와 맞다고는 할 수 없는 결론이었으나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뿐인 학창 생활이고, 십 대 시절인데, 성적에만 매달려 보내고 있기는 아깝지 않나요?”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군요.”

그의 말에 루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페이든이 자신의 말에 설득되어주었다고.

“그러시면 한 번 고민해 보세요, 겨우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아카데미를 다니고 계시는 건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 페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생활 또한 배움이다.

나쁘지 않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갑작스럽게 찾아와 이런 얘기를 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 대답을 끝으로 페이든은 자리를 벗어났고 루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그렇게 복도에는 렌과 루비아 만이 남았다.

“저도 만들어 볼게요, 다른 친구.”

“정말요?”

“네, 루비아의 말이 맞아요. 그것 또한 배움이니까.”

렌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루비아의 손을 잡았고.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루비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냥 넘어가자고 생각했다.

그래, 렌이 친구를 만들겠다고 하는 거에서 만족하자.

그것보다 동아리 마지막 멤버부터 구해야지.

페이든처럼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신생 동아리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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