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77)화 (177/207)

39화. 토마가 하지 못하는 것.

“…일 학년 토마 차일드입니다.”

토마의 자기소개가 시작됐고.

루비아는 할 수 있다고 응원하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토마는 그제서야 뒤늦게 자신의 이미지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해명하기엔 이미 늦은 뒤였다.

자기소개라도 잘해서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토마는 집중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전 과목 모두 자신 있으며, 좋아하는 것은….”

하지만 그 이후로 토마는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자 머릿속에 루비아 말고 다른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간 자신이 낯을 가리며 소심하다는 루비아의 생각에 힘을 실어줄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토마의 머릿속에 루비아가 좋아하는 것이 스쳐 지나갔다.

“민트초코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레이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루비아는 그가 민트초코를 좋아한다는 말 보다 자기소개를 잘 끝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렇게 모두의 자기소개가 끝이 났고 루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앞으로 잘 지내봐요!”

이 멤버로 공부를 한다면 정말 성적이 잘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렌을 위해서라도 두 명 정도만 더 여자부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루비아는 진심으로 렌이 조금이라도 더 학창 시절을 즐기길 원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른 친구가 필요했다.

페이든은 이미 렌과 친해지기 글렀으니 말이다.

다른 부원이 없으려나.

가장 적당한 사람으로 따지자면 테일라이지만 그녀는 이미 다도 부에 가입되어 있었다.

루비아가 그렇게 마지막 부원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던 그때 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정식 부서가 됐으니 동아리실부터 받으러 가는 건 어떤가, 영애?”

그 말에 루비아의 머릿속에서 방금까지 하고 있던 고민은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다.

“저희는 인원이 겨우 다섯 명뿐인데, 동아리실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귀여운 질문에 레이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루비아는 아직도 자신의 동아리에 누가 들어와 있는지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루비아가 동아리 인원 한 명을 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레이안의 말 한마디라면 바로 정식 동아리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지만.

“당연하지, 저희도 이제 명백한 동아리인걸요.”

레이안의 말에 루비아의 눈이 예쁘게 접히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와아. 동아리실이라니, 그건 진짜 기쁜걸요.”

귀여운 반응에 레이안의 입꼬리에도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라이온 아카데미는 성적순으로 방을 배정해주니, 아마 꽤나 좋은 곳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제가 빠르게 선생님에게 다녀올게요!”

그렇게 말한 루비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레이안은 토마를 바라보며 눈치를 주었다.

같이 다녀오라는 의미를 담아.

하지만 눈치를 줘도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토마와 다르게 먼저 입을 연 두 사람이 있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저랑 같이 가요.”

그제서야 토마는 레이안이 왜 자신을 저런 시선을 봤는지 이해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토마가 낄 틈도 주지 않고 두 사람이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희 둘이서 충분한데요.”

그녀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페이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싱거운 엔딩이었다.

페이든이 굴하지 않고 따라간다고 우겼다면 토마도 자연스럽게 따라가려 했을 텐데.

저렇게 쉽게 포기해 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교무실로 향했고.

레이안은 저 쉬운 기회를 놓친 토마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아리실의 열쇠를 받은 루비아와 렌이 손을 잡고 뛰어왔다.

토마와 레이안, 렌이 동아리를 만든다는 사실이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이미 퍼져있어 미리 동아리실을 구비해 둔 덕에 열쇠를 빠르게 받아올 수 있었다.

“저희 빨리 가봐요!”

천진하게 웃는 루비아의 모습을 본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 함께 동아리실로 향했다.

그들은 아카데미의 신축 건물에 있는 꼭대기 층의 방을 받았고.

동아리실 자체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었지만 시설은 아카데미 동아리 방 내에서 가장 좋은 편에 속했다.

“아니, 이렇게 좋은 방을 받아도 괜찮아요?”

루비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고.

다른 아이들은 동아리실 보다 루비아의 귀여운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죠, 루비아.”

렌은 루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고 루비아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것인지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동아리 방을 둘러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근데 저희 이제 뭐 할까요? 그래도 첫 번째 동아리 모임인데, 무언가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공부를 위해 모인 동아리긴 한데. 첫 모임부터 공부하자고 하긴 좀 그렇잖아.

“공부나 하죠.”

“공부하는 건 어떨까요?”

그 순간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페이든과 렌이 동시에 입을 열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다 루비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른 걸로 하죠.”

또 다시 동시에 말하는 두 사람을 보며 루비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좋아하진 않아도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영애.”

“네?”

그 순간 들려온 레이안의 부름에 루비아는 그를 돌아봤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레이안은 입을 열었다.

“이제 같은 동아리 부원인데,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어떤가?”

레이안의 말에 루비아는 토마와 렌, 페이든의 눈치를 봤다.

렌이야 그녀가 허락만 해 준다면 편하게 말을 놓을 수 있었지만 그에 비해 다른 세 사람은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전생에서야 한 두 살 차이가 친구였지 이곳의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나이만 아니라 신분의 차이도 있으니 함부로 말을 놓기 더 어려웠다.

루비아가 고민하고 있던 그때 렌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는 루비아가 허락만 해 준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렌의 허락이 떨어졌고.

“제가 선배이긴 하나, 불편함 없이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뒤이어 페이든도 입을 열었다.

하지만 편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두 사람에 비해 토마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저도,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갑자기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잠시 머뭇거리던 루비아는 네 사람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음, 다들 괜찮다고 하니까 그렇게 할게. 나는 루비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아직 어색한 듯 존대와 반말을 섞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토마는 작게 미소를 지었고.

그 생각은 모두가 같았는지 렌 또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루비아를 바라봤다.

“좋아, 루비아. 앞으로는 편하게 말해 줘.”

보기 드문 렌의 미소와 다정한 말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레이안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는 렌에게 말을 편하게 하는 반면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와 리리안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신분과 나이 차이가 있긴 했으나, 레몬과 자스민까지도 그에게 반말을 하는데 말이다.

렌은 나이가 많은 적든 가족을 제외한 모두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런 렌의 마음을 저렇게까지 녹이다니.

다시 한번 루비아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 렌.”

조금은 어색한 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루비아의 모습에 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루비.”

그렇게 렌과의 대화를 끝낸 루비아는 다시 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금 망설이는 듯 머뭇거리던 루비아는 그들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을 긋는다던가, 그런 건 아닌데. 세 분은 저보다 나이가 있으니까, 조금은 익숙해진 다음에 천천히 말을 놓을게요. 그리고 …오빠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혹시나 세 사람의 기분이 상했을까.

계속해서 눈치를 보는 모습이 겁먹은 강아지 같았다.

“나야, 상관없지. 편한 대로 해. 루비.”

“나도 그래, 신경 쓰지 마.”

바로 허락을 해 준 두 사람에 비해 토마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루비아의 입에서 나온 오빠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저 단어가 저렇게 듣기 좋았는가.

렌과 레몬, 자스민에게서 항상 듣는 말이었을 텐데.

왜 루비아에서 들려오는 저 호칭은 이렇게 특별하고 다르게 느껴지는 거지?

잠시간의 혼돈 끝에 토마는 입을 열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그의 말에 루비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고.

그 모습에 토마는 용기를 얻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루비.”

웨일즈 영애라는 호칭이 아닌, 처음으로 루비아의 이름을 애칭을 입에 담는 순간이었다.

그의 부름에 루비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밝고 환한 미소에 그의 얼굴에 또한 미소가 걸렸고.

그제서야 토마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루비아와 관련된 일에만 계속 망설이게 되던 이유.

별것도 아닌 일에 계속 루비아가 생각나는 이유.

안 하던 짓을 계속하게 되는 이유는 모두, 이 감정 때문이었다.

토마는 그제서야 정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자신이 루비아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여름의 끝자락에 다가온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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