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진짜 가을이네.
자스민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정원에 앉아있던 나는 잠든 자스민을 확인하고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자스민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날이 너무 좋아 망설였다.
맑은 하늘과 적당히 따사롭게 쏟아지는 햇살 그리고 선선하게 부는 바람까지.
나는 그것들을 느끼며 살짝 눈을 감았다.
너무 좋은 날씨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평화롭네.
여름휴가가 끝나고 수도로 향했던 레몬과 그린은 리리안이 외로워 한다는 이유로 여전히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
자스민은 나와 바리다스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델아트로 돌아왔으나.
쌍둥이는 우리가 보고 싶지도 않은 것인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조금 서운하긴 했으나 어쩔 수 없지.
나는 별말 없이 쌍둥이를 돌봐주고 있는 아킬레스와 아필레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둠이 내려앉고 있던 뒤였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몸을 일으킨 순간 무릎 위에 덮여 있던 겉옷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익숙한 박하 향이 코끝을 찔렀다.
뒤를 돌아보자 나무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바리다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왔대.
깨울까 고민하다 답지 않게 푹 잠든 것 같은 모습에 가만히 그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해주었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자스민 또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똑 닮은 남매가 귀여워 나는 웃음을 참다 두 사람의 뺨을 쓰다듬었다.
언제쯤 일어나려나.
둘 중 한 명이라도 일어나면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해야겠다.
하지만 원래 그런 건 대부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깨길 기다리던 나는 다시 잠들어버렸고 눈을 떴을 땐 이미 바리다스의 품 안이었다.
양팔에 나와 자스민을 들고도 무겁지 않은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걷고 있던 그는 내가 깬 것을 눈치채자마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후광이 비출 것만 같은 밝은 미소에 나 또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잘 주무셨습니까?”
다정하게 속삭이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춘 바리다스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주셔도 괜찮은데.”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이미 내 팔은 그의 목을 껴안고 있었다.
그 사실을 바리다스 또한 눈치챈 것인지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는 자세를 고쳐 안았다.
“저녁은 뭐로 준비하라고 할까요?”
그러고 보니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됐구나.
근데 차일드 가의 식탁에는 먹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올라왔는걸.
하지만 그렇다 해서 먹고 싶은 음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크림 파스타.”
단호한 내 대답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늘 식사는 이탈리…나 식으로?”
조금 어색한 발음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여름휴가에서 회의 맛에 빠져버린 바리다스는 민트초코까지 지구의 문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내게 지구의 식문화에 대해 묻는 일이 잦았다.
그랬기에 전생에서 주로 먹었던 대로 한식, 중식, 일식 등 여러 나라의 식사와 음식들을 알려 주었고.
바리다스는 요식업으로도 진출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내게 세계 각국의 음식들을 배워갔다.
“이탈리아, 식으로.”
살짝 정정해주자 바리다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빠네라는 것도 같이 준비해 드릴까요?”
“좋아요.”
현재 일식과 양식 두 종류의 요리들을 내게 배워가고 있었고.
그것들 중 바리다스가 회 다음으로 마음에 들어 한 것이 바로 빠네였다.
아이디어와 상품성 그리고 맛까지 모든 걸 잡은 음식이라고.
다만 나는 조금 아쉬웠다.
아직까지 이 세계는 밥과 쌀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한국인은 밥심인데 말이다.
바리다스가 추진하고 있는 요식업이 조금 더 발전하게 되면 그때 한식도 추진해달라고 말해 봐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
요즘 저 일을 도와주느라 너무 많이 먹었더니.
살이 쪘다.
엄청나게.
깜박 잊고 있었던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어서 그의 품 안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이제 와 내려달라 하기는 애매했기에 나는 어서 저택에 도착하길 바랐다.
하지만 저택에 도착하면 내려놓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바리다스는 나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가 탈인간급 힘을 가지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 몇 킬로 쪘다고 눈치챌 정도로 예민하지 않을 거 아니야.
“예린, 식사가 준비되면 부를 테니 더 자고 있어요.”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다이어트를 해야겠다 결심하며.
하지만 그건 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을이 살이 찌는 계절인 것은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들려온 바리다스의 말에 나는 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예린이 알려준 코스 요리로 준비 해 봤어요.”
딱 하루만 더 먹을까.
바리다스가 나한테 배운 걸로 열심히 준비해 온 건데 거를 수는 없잖아.
원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라 했다.
바리다스는 오늘 메뉴가 양식인 김에 그 코스 요리를 우리의 식사에 대입한 모양이었다.
나 또한 전생에서 레스토랑을 많이 다녀 본 편이 아니기에 그렇게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너튜브에서 먹방을 자주 찾아본 덕에 그래도 기초적인 것은 알고 있었다.
코스 요리의 기본은 전채 요리, 그러니까 애피타이저와 메인 메뉴, 디저트로 이루어져 있어야 하며.
전생에서는 주로 파인다이닝이라 불리는 레스토랑에서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이 세계에는 기초적인 틀은 잡혀 있었으나 확실한 방식과 규칙이 잡혀 있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정해줌과 동시에 그에게 알려 주었다.
가장 먼저 애피타이저인 생 연어샐러드와 절인 토마토 그리고 작게 구워진 고기가 함께 나왔다.
맛있어.
우물거리며 애피타이저를 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죄스러운 맛이라고.
다음 차례로 수프와 식전 빵이 나왔고 나는 잘 구워져 따끈한 빵을 수프와 버터를 곁들여 먹었다.
시범을 보여주지도 않고 어떤 방식인지 알려만 줬음에도 훌륭하게 만들어냈다는 게 대단했다.
하지만 아직 자스민에게는 어색한 방식인 모양이었다.
오늘의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자스민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고기 먹고 싶은데.”
귀여운 모습에 나는 그녀의 빵에 버터를 발라주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제 곧 나올 거야.”
내 말에 자스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받아 들었다.
아무래도 코스 요리는 어린아이가 즐기기에는 조금 힘든 감이 있긴 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빵을 오물거리는 자스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음은 생선 요리.
잘 구워진 랍스터가 올려진 접시가 나왔고 그제서야 자스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리다스는 최근 거금을 주고 신리의 셰프 리차드를 데려왔는데 그에게 새 레스토랑의 총괄을 맡기겠다고 했다.
나 또한 그의 요리를 좋아했으며 아이들 중 특히 자스민이 그의 요리를 좋아했다.
치즈가 가득 올라간 리차드의 랍스터구이는 최근 자스민이 가장 자주 먹는 요리 중 하나였다.
그다음으로 나온 요리가 바로 스테이크와 크림 파스타였다.
스테이크를 굽는 방식은 이곳에도 존재했기에 그렇게 많이 신경을 쓸 부분은 없었다.
맛있다.
정말 녹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부드러운 스테이크와 크림 파스타를 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진짜 딱 오늘까지만 먹고 살을 빼겠다고.
그 이후로 남은 것은 샐러드와 디저트.
이것 또한 딱히 알려줄 부분 없이 이 세계에서도 많이 발전한 음식들이기에 마찬가지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원래는 샐러드만 먹으려 했었다는 생각이 들자 착잡해졌지만.
마지막으로 나온 마들렌과 아이스크림을 함께 곁들여 먹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먹고 나서 후회가 되었다.
그냥 안 먹을걸.
정말 안 먹을걸.
샐러드만 먹을걸.
과거로 시간을 돌린다면 정말 안 먹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입 안으로 넣었다. 달콤함이 시원하게 입안에 퍼져갔고 그제야 깨달았다.
아이스크림이 아까보다 더 죄스러운 맛이었다.
평소라면 이제 강아지들과 산책이라도 하겠지만 루이와 리리, 라라 모두 아이들을 따라 수도와 아카데미에 가 있었다.
혼자서라도 나가서 운동해야겠다.
내가 테이블 아래로 튀어나온 배를 만지고 있던 그때.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어땠나요?”
하지만 그의 말에 대답을 한 건 내가 아닌 자스민이었다.
“이렇게 따로따로 나오는 거 감질나서 별로야.”
단호한 말에 바리다스와 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이런 방식은 자스민에게 조금 이르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민은 앞으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렴, 그것부터 차려 줄 테니.”
그 순간 들려온 바리다스의 말에 자스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코스요리는 자스민의 취향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린 아이의 성격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저는 괜찮았어요.”
내 평가에 바리다스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이네요.”
“이런 식으로 메뉴와 컨셉을 정해서 준비하면 분명 잘 될 거예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네, 고마워요.”
하지만 그 뒤로도 바리다스는 내게 코스 요리를 평가해 달라는 명분으로 여러 가지 음식들을 내게 맛보길 권했고.
나는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절대로 내 의사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결국 내 다이어트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건 정말 내 의사가 아니었다.
바리다스가 끊임없이 음식을 맛보길 권했고 리차드의 요리와 피터의 디저트가 너무 맛있었던 탓이다.
왜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자꾸 올라오는 거야.
가장 선호하는 양식 중 하나인 크림 리조또를 입 안으로 넣으며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그런 예린의 모습을 보는 바리다스는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바리다스는 최근 예린이 전생에서 먹었던 여러 요리들과 식문화에 대해 알려줄 때 예린의 평가가 어땠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예린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무엇인지 거의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살이 찐 것은 예린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