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81)화 (181/207)

43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토마의 이야기가 쓰인 외전이 있었다.

단행본 반 권 정도의 분량으로 그 이야기에서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토마였다.

원래의 장르가 로판인 만큼 토마의 이야기 역시 로맨스가 주된 장르였는데.

그 이야기에 등장하던 토마의 여자 주인공 엘리아네, 그녀가 지금 루비아의 앞에 서 있었다.

루비아의 기억하기로 원작 소설 속 토마와 엘리아네는 분명 성인이 되고 만났는데 말이다.

대체 무슨 얘기를 들었다는 거지.

불안함을 감지한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환하게 미소 지은 엘리아네가 입을 열었다.

“성녀님이, 너도 나와 같다고 하더라고.”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루비아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너도 빙의자구나.

예전 같았으면 반갑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겠지만 가슴 한편에 계속 차오르는 묘한 불안감에 루비아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렇구나, 잘 부탁해.”

환히 미소 지은 엘리아네는 루비아의 손을 붙잡았다.

“학교, 아니. 아카데미 소개 부탁해도 될까?”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음에도 루비아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알겠어, 점심시간 때 같이 가자.”

루비아는 심성이 고운 아이였다.

불안하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직까지 그녀가 착해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고마워, 밥도 같이 먹는 거지?”

“그러자.”

루비아의 말에 환하게 미소 지은 엘리아네는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녀의 행동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렌이 표정을 구겼다.

“고마워, 너 되게 좋은 아이구나.”

그 순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루비아의 옆자리에는 렌이 앉아 있기에 엘리아네는 맨 뒷자리에 책상으로 향했다.

“루비아, 저분이랑 아는 사이야?”

엘리아네가 사라지기 무섭게 루비아에게 달라붙은 렌이 그녀를 경계하듯 입을 열었고.

망설이던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오늘은 따로 식사해야 할 거 같아.”

루비아와 토마, 레이안, 렌 네 사람은 대부분의 식사를 함께했기에 미리 말을 꺼내두었다.

루비아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렌은 입을 열었다.

“저분이랑 먹으려고?”

“그렇지.”

“나는 셋이서 먹어도 괜찮으니까 같이 먹어, 안내도 도와줄게.”

쉽게 볼 수 없는 렌의 호의였으나 루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는 빙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 분명하기에 렌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루비아가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렌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미안해, 딱 하루만 따로 다니자.”

루비아의 말에 렌은 내키지는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의 소개인 것 같던데 거절하기 힘들겠지.

두 사람이 처음 인사할 때 옆에 있던 렌은 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랬기에 대충이나마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알겠어, 근데 내일은 꼭 나랑 먹어야 해?”

“응, 약속할게.”

루비아가 확실히 말하는 걸 듣고서야 안심한 렌은 엘리아네를 바라봤다.

렌은 엘리아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비아가 자신보다 그녀를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서.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었고 루비아는 엘리아네와 함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고맙게도 엘리아네가 먼저 입을 열어주었다.

“너는 몇 살이었어?”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저게 무슨 질문인지 의도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었다.

몇 살이냐 묻는 것도 아니고 몇 살이었냐니.

하지만 빙의자인 루비아에게 저런 질문은 당연하게도 익숙했다.

“열세 살, 너는?”

“나랑 동갑이네! 나도 열세 살이었어.”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미소 지은 엘리아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원래 이름은 이주연이야, 너는 그렇게 불러도 돼.”

거기까지 말한 엘리아네는 루비아가 이름을 가르쳐 주길 바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최아영이라고 해.”

오랜만에 말하는 본명이 조금 어색하다고 생각하며 루비아는 입을 열었고.

소개가 끝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엘리아네는 궁금하지 않아 물은 적도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성녀님에게 부탁드려 이곳에 입학했어.”

거기까지 말한 엘리아네는 아차 싶었는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성녀님은 도움만 주셨을 뿐, 시험은 내가 치렀어.”

“그래, 그런 걸 도와주실 분은 아니지.”

루비아의 말에 안도한 표정이 된 엘리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루비아의 눈치를 보던 엘리아네는 푸른색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토마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입학했어.”

로판 소설을 많이 읽었다 자부하는 루비아로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말 중 하나였다.

이제는 그와 이어지게 된다면 엔딩을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하겠지.

잘근.

마시고 있던 음료의 빨대를 씹으며 루비아는 생각했다.

남겨진 토마는 어쩌라고 저런 소리를 내뱉는지.

“그렇구나.”

아까부터 들었던 묘한 불안감의 정체를 루비아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엘리아나, 아니 이주연은 이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이곳을 소설 속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루비아는 이곳이 또 다른 세계임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삶이 있으며 모든 것이 소설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빙의자들 중에서는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던데 너는 읽은 것 같더라고.”

이어진 주연의 발언은 루비아를 더 확신에 차게 만들었기에.

더 들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전의 여주인 내가 토마와 이어진다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럼 남은 토마는?”

그냥 듣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참지 못하고 본심이 나와버린 루비아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주연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루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몸을 되찾은 엘리아네와 행복하게 살겠지.”

“만약 너희가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토마가 사랑한 건 엘리아네가 아니라 너일 텐데?”

루비아의 말에 주연의 표정이 굳어갔다.

아무래도 루비아가 당연히 자신을 도울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토마의 여자 주인공은 엘리아네인데.”

답답하다는 듯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주연이 말했고.

루비아는 처음으로 유아가 밉다고 생각했다.

왜 얘한테 이 세계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은 거예요?

속으로 유아를 조금, 아주 조금 원망하며 루비아는 입을 열었다.

“너는 정말 그렇게 될 거라 생각해?”

루비아에게는 이 세계가 원작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엄청난 증거가 있었다.

바로 바리다스와 피오라가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

“공작, 아니 바리다스가 누구와 이어졌는지 알고 있어?”

공작님을 이름으로 부른 것에 대해 속으로 사과를 백 번쯤 건네며 루비아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연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악녀인 피오라.”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린 주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원래 세계를 포기하고 이런 활자 속에서 살기 위해 사랑을 택할 수 있지?”

그녀의 말에 루비아는 깨달았다.

유아는 그녀에게 이 세계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이건 주연이 눈과 귀를 막고 이 세계는 그저 소설일 뿐이며 원작대로 자신과 토마가 이어진다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현실을 부정해 온 것이었다.

그만큼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거였다.

유아는 루비아의 생각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해보아도 전혀 듣지 않는 주연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현실을 깨닫는 것뿐이라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 주연을 토마가 있는 아카데미에 보낸 것이었다.

유아가 본 몇 가지 미래 중에서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루비아는 주연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가 안쓰러웠고 이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여긴 소설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각자의 자아와 삶, 감정이 있는 또 다른 세계란 말이다.

루비아는 유아가 왜 그녀를 이곳에 보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 세계에서도 운명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건 전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걸 알려 줘야겠지.

“그래, 알겠어. 토마와 이어지게 도와 달라는 거지?”

루비아의 말에 주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정말로 돌아가고 싶어. 내가 토마와 이어져 여자 주인공이 된다면 분명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이미 그녀의 주위에서는 주연에게 현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했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너야.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 세계에 여자 주인공이나 남자 주인공은 없어, ‘나’라는 주인공 말고는.”

“그런 게 어디 있어? 토마와 엘리아네는 운명일 텐데.”

하지만 끝까지 주연에게는 루비아의 말이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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