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
“안녕하세요, 새로 동아리에 들어오게 된 엘리아네라고 해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까지도 그녀의 시선은 토마에게 향해 있었다.
루비아는 주연에게 현실을 가르쳐주기 위해 스터디 동아리에 가입시켜 주었다.
원작에서 토마가 주연에게 반한 것은.
평민인 그녀에게서만 볼 수 있는 순수함과 밝음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랑스러움 때문에 엘리아네를 특별히 여긴 토마가 그녀에게 반하게 된 것이지 엘리아네가 토마의 운명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루비아는 믿고 있었다.
토마가 저런 모습의 엘리아네, 아니 주연에게 반할 리 없다고.
하지만 만약 토마가 주연에게 반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어쩌겠어, 성녀님께 찾아가 물어볼 건 물어본 뒤 전부 솔직하게 말해야지.
루비아는 원래도 대책을 세워두는 편이 아니었다.
자기소개를 완전히 마친 엘리아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토마 쪽으로 다가갔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그의 옆자리에 손을 올리며 내려온 머리카락을 살짝 내리는 주연은 마치 만화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 같았다.
아니, 이거 토마 넘어가는 거 아니야?
순간 걱정이 될 정도로 엘리아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네, 앉으세요.”
뒤이어 들려온 토마의 말은 루비아의 걱정이 더 깊어지게 만들기 충분했으나.
토마는 주연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기 무섭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앉은 곳은 다름 아닌 루비아의 옆자리.
─까지는 아니고 옆옆자리였다.
그녀에게서 한 칸을 띄고 앉은 토마를 보며 주연은 조금 분한 표정을 지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그렇게 루비아 혼자 불안감을 안고 시작된 동아리 모임은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엘리아네는 루비아의 생각보다 공부를 잘했으며 토마에게 신경 쓰느라 분위기를 망치거나 흐리는 행동 또한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동아리 활동을 똑바로 하겠다는 조건 하에 그녀를 받은 것이니까.
문제는 단 하나였다.
주연과 토마에게 신경 쓰느라 루비아 자신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부원을 한 명 더 받으려고 하긴 했지만.
엘리아네를 부원으로 받을 계획은 없었다고.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제지를 푸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주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루비아를 토마와 렌이 바라보고 있었다.
별 탈 없이 동아리가 끝나고 하나도 풀지 못한 문제지를 든 루비아는 기숙사로 돌아가려 했다.
토마와 렌이 동시에 그녀를 불러세웠다.
“무슨 일 있어?”
같은 질문을 한 토마와 렌은 서로를 한 번 바라보다가 루비아를 보았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다시 한번 같은 질문.
두 사람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루비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 일 없어요.”
“그런 것 치고는 집중을 아예 못 하던데.”
토마가 물었고.
“새로 들어온 부원 때문에 그러는 거야?”
렌의 걱정을 담은 물음이 이어졌다.
눈치 빠른 렌답게 루비아의 신경이 누구에게 쏠려 있었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들의 말에 고개를 저은 루비아는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냥 오늘따라 집중이 안 돼서 그랬어요.”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은 안도한 표정이 되었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주연은 천천히 그들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안 되겠다, 카페 가자 내가 민트초코 프라페 사 줄게.”
렌의 단호한 말에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같이 가자.”
“나도 같이 가.”
이어 토마도 입을 열었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루비아의 불안감은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들의 배려에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금방 주연이 끼어들어 루비아의 기분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조금은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며 질문하는 주연은 보고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주연은 사랑스러웠다.
순간적으로 루비아도 당연하죠, 라고 말할 뻔했으니 말이다.
“아뇨.”
하지만 이번에도 토마와 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두 사람의 닮은 붉은 색의 눈동자가 똑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건 두 사람이 루비아에게 단 한 순간도 보인 적 없었던 냉담한 시선이었다.
싸늘한 두 사람의 모습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주연은 입술을 짓씹었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말한 주연은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고 그녀가 사라짐과 동시에 두 사람은 루비아를 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도 루비아는 그런 두 사람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끼리 가자.”
렌의 말에 루비아가 돌아봤을 땐 아까 주연을 바라보던 그 시선은 사라진 뒤였으니까.
“응!”
그랬기에 루비아는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루비아가 토마와 렌을 보는 사이 주연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숨겨 루비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다음 날.
선생님의 부름에 렌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주연은 루비아에게 다가왔다.
“저랑 얘기 좀 해요.”
한눈에 봐도 짜증이 나 보이는 엘리아네의 모습에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 얘기를 하는지는 뻔하긴 했으나 들어라도 본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피할 수 있는 시비나 싸움은 피하는 편이었으나 주연을 상대할 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나이도 같고 원작을 아는 것도 같은데 자신과는 다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일까.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복도 끝으로 그녀를 데려간 주연은 루비아를 벽 끝으로 몰아세웠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가요?”
당당한 루비아의 태도에 어이없다는 듯 표정을 굳힌 주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와주길 바라진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방해는 안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상당히 뻔뻔한 말이었다.
루비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제가 뭘 방해했는데요?”
그녀의 질문에 주연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눈을 추켜세웠다.
“들러리면 들러리답게 계시면 안 되는 건가요? 왜 제 자리를 넘보시는 건지 저는 이해할 수 없네요.”
당당한 태도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들러리라, 너한테는 내가 그렇게밖에 안 보였구나.
“뭐 가요? 당신 말대로 진짜 주인공이라면, 제가 무슨 짓을 하든 토마는 그쪽과 사랑에 빠질 거잖아요?”
바로 주연이 루비아에게 어제 한 말이었다.
그러니 주연은 이에 대해 무슨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한 말이니까.
“그 자리는 제자리에요, 엘리아네의 자리라구요.”
그래, 하지만 너는 엘리아네가 아니지.
만약 진짜 엘리아네였다면 절대 너 같은 태도는 취하지 않았을 거야.
토마가 그녀를 왜 좋아했는데.
“그래요, 당신 논리대로 당신의 자리를 제가 뺏은 거라면 금방 되찾을 자신이 있으신 거 아니에요?”
원작에서의 순수하고 착한 엘리아네를 루비아 또한 좋아했지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주연은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청명하다 적혀 있었던 푸른 눈은 표독스러웠으며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루비아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는 주연을 바라봤다.
“설마… 저 같은 들러리에게 토마를 빼앗길까 봐, 두려운 건가요?”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살벌했다.
조금 심했나.
루비아가 주연의 눈치를 본 그 순간 주연이 그녀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면서, 어떻게 그런 태도를 취하실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조금 더 하면 진짜 한 대 치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루비아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알기야 하죠. 근데 그렇다 해서 제가 토마와 렌에게서 멀어져야 할 이유는 없어요.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 루비아의 모습에 주연은 다시 한 발짝 물러섰다.
“이기적이시네요.”
“이기적인 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이 무언가를 포기하길 원하는 그쪽이고.”
할 말이 없어진 것인지 주연은 루비아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반박할 수 없을 테니까.
솔직히 루비아도 알고는 있었다.
자신이 한 발짝 물러서서 자리를 피하고 그녀를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루비아의 배려일 뿐 꼭 해줘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왜 자신이 간절하다는 것을 이유 삼아 그런 배려를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는지 루비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건 친구인 렌과 토마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부탁이었으니까.
루비아는 원체 주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번의 행동으로 더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다.
“그래요, 그렇게까지 생각하시는지 몰랐네요. 마음대로 하세요. 저도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주연은 마지막으로 루비아를 한 번 노려본 뒤, 발걸음을 옮겼다.
꾸욱.
주먹을 강하게 쥔 루비아는 표정을 굳힌 채 교실로 향하며 어제 본 토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루비아를 바라보던 그 표정과 눈빛.
그건 절대 그냥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루비아가 눈치채지 못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루비아에게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주연은 알고 있었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토마 한 명이라는 것을.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주장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만약 토마와 이어지는 사람이 여자 주인공이 되어 소설의 엔딩을 보고 루비아 혼자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소설의 끝에 루비아와 자신까지 모두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왜냐면 빙의자가 둘 뿐이 아니었으니까.
유아에게 소개받은 수많은 빙의자들 중 한 명이 돌아갔다는 사실을 떠올린 루비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돌아가는 건 꼭 나여야 해.
주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쥐고 있던 주먹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