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그 뒤로도 몇 번씩이나 주연은 토마와 렌 앞에 나타나 그들과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들의 관심은커녕 싸늘한 시선만 받고 돌아갔고.
번번이 접근을 실패하자 주연의 원망은 모두 루비아에게 향했다.
물론 그런 루비아의 곁에는 늘 렌과 토마가 있었기에 티를 낼 순 없었지만 그들은 이미 눈치챈 뒤였다.
주연이 루비아를 이용해 자신들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렌, 너는 루비가 쟤를 왜 싸고도는지 알고 있어?”
주연에게 잡힌 루비아 때문에 먼저 동아리실에 도착 렌은 첫 번째로 도착해 있던 토마와 마주쳤다.
그 또한 렌과 마찬가지로 루비아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성녀님 소개래.”
“왜 저런 애를 소개해 주셨대?”
대놓고 짜증을 내는 토마의 모습에 그녀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게.”
요즘 들어 계속 자신을 찾아오는 엘리아네를 떠올린 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넘겼다.
목적이 있다는 것을 숨기려 하지도 않고 욕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가 토마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비아의 친구, 아니.
지인이어서 이 정도로 받아 주는 것이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두 사람을 떨어트릴 방법이 없나?”
렌답게 솔직한 마음을 내뱉은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루비아와 주연이 들어왔다.
“렌, 토마 오빠 안녕.”
“안녕하세요.”
오늘도 주연과 비슷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온 루비아는 피곤함을 숨기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연은 매일같이 루비아를 찾아와 빙의 이야기를 했다.
감정에 호소해보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으며.
도움을 얻기 위해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해보려 했으나.
루비아는 절대 주연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아 가면서도 루비아가 그녀를 상대해주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같은 빙의자니까.
그녀 또한 이곳에 오고 싶었던 것이 아니니까.
당연히 루비아는 주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안쓰러웠다.
얼마나 돌아가고 싶으면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하지만 이건 모두 주연의 계략이었다.
만약 루비아가 토마의 마음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신경 쓰여 그와 이어질 수 없게 만들려는.
일종의 가스라이팅과 같은 행위였다.
주연은 루비아의 생각만큼 착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생각보다 간절했다.
돌아가기 위해서라면 살인해야 한대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였다.
주연에게는 이 세계가 현실이 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루비아만이 주연에게 시달릴 뿐이었고.
“많이 피곤해 보여, 루비.”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루비아를 부른 토마는 포장지에 쌓인 작은 초콜릿을 내밀었다.
루비아에게 주기 위해 매일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 고마워.”
단 걸 먹으니 조금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요즘 주연의 말을 들어주느라 스트레스를 너무 받기는 했어.
그렇게 생각하며 루비아가 초콜릿을 오물거리던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레이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안녕.”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 그는 루비아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루비, 얼굴이 왜 그래?”
“네?”
“요즘 잠을 못 자? 되게 피곤해 보여.”
레이안의 말에 루비아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고사 준비 때문에 그래요.”
납득할 만한 대답이었지만 걱정이 안 될 만한 답변은 아니었다.
“몸 생각하며, 쉬엄쉬엄해.”
“네, 감사합니다.”
자신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비아를 보며 레이안은 미소를 짓다가도 너무 안 좋아 보이는 그녀의 상태에 표정을 굳혔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세 사람이나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안녕하세요.”
여러 이유로 동아리실의 분위기가 싸해지고 있던 그때, 마지막으로 도착한 페이든이 동아리실로 들어왔다.
눈치 없는 그는 동아리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사실은 느끼지 못한 듯했다.
“지난주에 몸이 안 좋아 불참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불참했어?
일이 너무 많아 페이든이 동아리에 안 온 지도 몰랐던 루비아는 그에게 조금 미안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죠, 이제는 좀 괜찮으셔요?”
“네, 근데 저보다 영애가 더 안 좋아 보이네요.”
보는 사람마다 저런 말을 하는 걸 보아하니 자신의 상태가 많이 심각하긴 한 모양이었다.
“시험 때문에 그래요.”
마찬가지로 같은 변명을 한 루비아는 납득한 표정이 된 페이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냥 더 상대해주지 말까.
솔직히 정말로 피곤했다.
알면서도 받아 주고 있는 거였지만 뭐라 해야지, 감정 쓰레기통 느낌?
그래, 오늘부터는 더 받아 주지 말아야겠다.
결론을 내린 루비아는 문제지로 시선을 옮겼다.
“근데 루비, 중간고사 끝나면 동아리 활동 발표가 있는 건 알고 있지?”
아뇨?
몰랐는데요.
아, 나 할 일 왜 이렇게 많아!
이제 다시는 주연의 말을 안 받아 주겠다 결심하며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고사가 끝나는 대로 준비하도록 할게요.”
“그래, 기간은 여유로운 편이니까. 천천히 해.”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주연이랑 대화는 더 하지 말아야겠다.
이러다간 스트레스받아서 성적이고 뭐고 안 나올 것 같단 말이야.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녀의 말에 레이안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한테도 편하게 말해도 좋아.”
그게 말처럼 쉽냐구요.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그냥 나이 한 살 많은 선배면 편하게 말하겠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황태자잖아, 미래의 황제.
우리 엄마, 아니 할머니도 존댓말 쓰는 사람한테.
어느 누가 허락해준다고 편하게 말하겠냐고.
“노력해 볼게요….”
귀여운 그녀의 반응에 레이안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토마가 좋아할 만하네.
확실히 루비아를 볼 때마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영애랑 좀 친해지고, 두 사람도 잘 됐으면 좋겠네.
그런 자신의 행동을 토마가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레이안은 그렇게 생각한 교과서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동아리 시간이 끝이 났고.
종이 울리기 무섭게 루비아는 주연에게 다가갔다.
“나랑 얘기 좀 해.”
저건 언제나 주연이 루비아에게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결의에 차 있는 루비아의 눈빛을 본 주연은 생각했다.
얘가 눈치를 챈 것 같다고.
평소라면 다른 핑계를 찾아 자리를 피하겠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이러면 거절 할 수 없잖아.
“그래.”
그렇게 대답하는 주연의 표정이 한순간 굳어졌다 빠르게 표정을 풀었다.
“무슨 얘긴데?”
주위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웃으며 입을 연 주연을 루비아는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빨리 끝내야지.
루비아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이들이 없는 복도로 가자마자 주연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에 루비아는 자신 또한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했다.
“이제 무슨 얘기 하자고 나 불러내지 마.”
루비아의 말에 주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러면 네가 얘기가 안 나오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뭘 했는데?”
“내 자리를 빼앗았잖아.”
망설임 없는 당당한 발언과 태도에 루비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자신의 자리가 뭐라고 생각하기에 저런 태도를 취하는 것인지.
“네 자리가 뭔데?”
“네가 지금 받고 있는 관심과 사랑 전부, 내 거인 거 너도 알고 있잖아?”
루비아는 기가 차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진짜 스트레스받아.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혈압을 느끼며 루비아는 뒤 목을 잡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지금까지 그냥 들어준 것도 있었다.
그냥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말싸움하는 게 몇 배는 더 화가 나니까.
“너도 알고 있지? 지금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거.”
“내가 네 얘기를 들어 주는 건, 그냥 안쓰러워서야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네가 안쓰러워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사납게 말을 하는 것이 얼마 만이더라.
하지만 루비아도 이 이상으로 참기에는 지금까지 받아온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그런데 이제 안 할 거야, 다시 한번 말해줘? 못 돌아가.”
“여기도 현실이고 이제 네 이름은 주연이 아니라 엘리아네야.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거 이해해. 힘들 수 있지, 근데 왜 나까지 그래야 해?”
루비아의 말에 주연은 이를 갈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루비아와 유아는 엔딩을 봤을 때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 진짜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들은 지금 자신이 허상에 잡혀 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주연은 똑똑히 들었다.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을.
“돌아갈 수 있다면 어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