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85)화 (185/207)

47화.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

“이야, 루비. 토마를 좋아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인지는 몰랐네.”

레이안이 말했고.

“대체, 왜 그런 생각을… 루비가 아까워요.”

렌이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만큼이나 붉어진 얼굴의 토마를 확인하는 순간.

루비아의 얼굴은 터질 듯이 붉어졌다.

아, 아. 미친!

이건 다 주연 때문이었다.

뭐가 됐든 전부 다 주연 때문이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서 자신이 이런 꼴을 보이게 만드냔 말이다.

이건 다 오해였다.

이 오해를 어떻게든 풀어야 하는데,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루비아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그, 그러니까 이건 다.”

변명을 위해 입을 열려던 루비아는 그 순간 생각했다.

억울하다고 말이다.

자신이 왜 변명해야 하느냔 말이다.

잘못하거나 죄를 지은 것도 아닌 자신이 왜.

아니, 뭐 위할 수도 있지 않아?

감정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꼭 고백이나, 관심 있다거나, 좋아한다는 것처럼 들리기는 하는데.

난 억울하다고!

방금까지 토마에게 관심 없다고 소리치다 주연보다 먼저 고백해버린 꼴이 된 자신이 우습기도 하면서 억울했다.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그 순간, 루비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시원하게 내가 차여 버릴까?

토마라면 당연히 지난번처럼 자신을 거절할 것이니까.

루비아는 토마가 당연히 자신을 거절할 거라 예상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지난번 차면서 말했듯 토마는 아직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까.

이번에는 연애에는 관심이 없어서 라거나, 학업에 집중하고 싶다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사귈 이유가 없다, 이런 말로 거절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주연도 토마가 연애에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고 포기할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니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어차피 한 번 차인 거, 두 번은 못 차이나.

나랑 토마랑 좀 어색해 질 수도 있긴 한데 그건 내가 잘하면 될 문제고!

이왕 쪽팔린 거 한 번만 더 쪽팔리지 뭐!

주연을 정신 차리게 하려면 자신의 고백을 현실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았다.

결론을 내린 루비아는 빠르게 표정을 바꾸려 했으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부끄럽기도 했고 애초에 그녀가 포커페이스에 능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루비아는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어색한 자세이긴 하나, 얼굴 보이기 부끄러워서 그렇다고 생각하겠지, 뭐.

그 상태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루비아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요. 토마 오빠, 좋아하고 있어요.”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하려던 말은 아니었으나 그를 좋아하긴 했다. 친구로서.

루비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거짓말 하나 들어있지 않았지만 이건 엄연한 고백이었다.

그녀의 말에 레이안은 예상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순식간에 몰린 학생들은 그들의 주위를 둘러싼 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주연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다, 학생들에게 휩쓸려 구석으로 밀쳐졌고.

렌은 이마를 짚었다.

자신의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굴 데려와도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루비아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왜인지 짜증 났다.

아무리 봐도 루비아가 더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처음 토마에게 고백했을 때부터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뒤로 별말 없어서 포기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고백해 올 줄이야.

렌의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하나는 루비아가 아깝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빠 따위가 감히 루비아를 거절하냐는 것이었다.

렌은 토마가 누굴 데려와도 그가 아깝다는 말과 함께 응원해 줄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그게 루비아면 말이 다르지.

내 친구가 내 오빠랑? 난 용납 못 해.

아니, 다른 남자랑 사귈 바에는 차라리 우리 오빠랑 잘 되는 걸 응원해줘야 하는 건가?

심각한 자아 분열을 느낀 렌은 슬슬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뭐가 맞는 판단이고 결론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렌의 머릿속에 방금 전 루비아가 토마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자신은 누구보다 그의 감정을 우선시한다고.

그 말을 떠올린 순간 렌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루비아의 감정이라고 말이다.

거절하기만 해.

우리 루비아 눈에서 눈물 나오게만 해.

하지만 정작 고백받은 당사자는 그런 시선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을 받았는데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겠는가.

루비아가?

나를?

꿈인가.

꿈이 아니라면 환상이 분명했다.

지난번 자신이 루비아의 고백을 거절한 뒤 마음을 자각하고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가.

이건 분명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러온 환상이었다.

만약 루비아가 다시 한번 자신에게 기회를 준다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수 없이 상상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속으로는 몇 번이고 꺼내 본 말이었기에 분명 덤덤하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기쁘다는 감정은 토마의 생각만큼 쉽게 주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운 토마는 입을 열었다.

“나도 좋아하고 있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미소를 띄우며 토마가 루비아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여기 있던 그 누구도 토마의 입에서 저런 대답이 나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루비아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갑작스럽게 고백받은 토마도, 그와 이어져 잠든 엘리아네를 깨우려 했던 주연도, 당연히 토마가 거절할 거라 생각하고 구경하던 학생들도 아닌 루비아였을 것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루비아가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던 그 순간 교실 문이 벌컥 열리고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업 시작했는데, 뭣들 하시는 겁니까!!!”

학생들이 교실에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언제까지 하나 보겠다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루비아와 렌의 담임 선생님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치신 것이었다.

하지만 루비아는 그가 정말로 고마웠다.

담임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자리에 계속 얼어붙어 있었을 것이었으니까.

그 덕에 모여 있던 학생은 대부분 빠르게 교실로 돌아갔고.

멍하니 서 있던 루비아 또한 렌의 손에 잡혀 교실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렌의 옆자리에 앉아 교과서도 펴지 않은 채 루비아는 그저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새기기 시작했다.

루비아의 머릿속에서 토마의 입이 열리고 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 말이 수없이 재생되었다.

아니, 진짜로?

나를?

나를 왜?

몇십 번의 반복 끝에 루비아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토마가 자신이 민망해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됐다.

루비아는 토마의 착한 마음씨였을 거라 멋대로 짐작하며 수업이 끝난 다음에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 루비아는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고 수업이 끝났을 때의 루비아는 언제나처럼 완벽한 필기를 마친 상태였다.

“영애는 언제나 수업 태도가 바르군.”

아까 있었던 소란의 원인이 루비아라는 것을 모르는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뒤 루비아에게 칭찬을 건넸다.

수업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아까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은 루비아 또한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까 있었던 소란을 생각하면, 쯧. 영애 같은 학생이 있어서 내가 힘을 내.”

아까 있었던 소란……?

그제서야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린 루비아는 눈을 크게 뜨고 토마를 찾아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교실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자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토마의 모습이 보였다.

답지 않게 즐거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왜인지 짜증이 난 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비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동생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성큼성큼 루비아에게 다가온 토마는 입을 열었고.

“아까 하던 얘기 이어서 해야 할 것 같은데. 시간 좀 내줄래?”

“나도 같이 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렌이 입을 열었다.

토마를 감시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었지만 허락은 루비아에게 받을 생각인 듯 시선은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토마 또한 루비아에게 결정하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말이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아니 교실 안의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루비아는 망설이다 두 사람의 손을 동시에 잡아챘다.

“다 같이 가요.”

루비아는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으나.

토마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와 손이 맞닿은 이후로 그의 손의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쉽게 눈치챌 정도로 뜨거워진 토마의 손을 느끼는 순간.

루비아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토마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