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86)화 (186/207)

48화.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

알아채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뜨거워진 토마의 손을 잡고 운동장 구석으로 향하는 루비아의 머릿속은 새하얘져만 갔다.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만약 토마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해서 고백을 받아 준 거라면… 그렇다면 자신은 그에게 정말로 못 할 짓을 한 셈이었다.

거짓말로 고백을 한 것이니 말이다.

만약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 이거 어떡해…?

아무리 생각해도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아니, 잘 생각해 보자.

왜 손에 열이 오른 정도로 날 좋아해서 그렇다고 판단했지?

열이 올랐다고 해서 꼭 그렇다는 건 아니잖아.

나 때문에 화가 났을 수도 있는 거잖아.

차라리 그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토마는 상처받지 않을 터였고 자신이 용서받을 때까지 사과한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잘 생각해 보니, 아까 얘기하자고 했을 때의 토마 표정이 조금 안 좋았었던 것 같기도 하고.

루비아는 기억까지 왜곡하며 여전히 뜨거운 토마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침 토마도 루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교차하는 순간 토마는 그녀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눈을 반달로 접으며 예쁜 눈웃음을 지어 보였고.

루비아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얘는 무조건 날 좋아하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그건 자신이 쓰레기가 되었으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 마디로 망했다.

나 이거 어떡해…?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머리 박고 빌자.

토마가 내 고백을 완전히 수락하기 전에 주연을 너에게서 때놓기 위해서 고백을 한 척했다고 하자.

아니 근데 이것도 고백 같은데?

내가 질투해서 이런 짓을 벌인 것 같잖아.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주연이 빙의자라는 사실까지 말해야 하는데.

그건 좀 그렇잖아.

성녀님도 그건 말하지 말라고 했었고.

그렇게 루비아가 고민하고 있던 그때, 토마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토마와 루비아.

그리고 렌이 서 있을 뿐.

토마가 입을 열기 직전 루비아는 생각했다.

먼저 말해야 한다.

일단 우기고 보자.

그게 모두를 살리기 위한 길이다.

“잠시만, 저부터 말할게요!”

양손을 들어 토마의 입을 막고 끼어든 루비아는 그렇게 소리쳤다.

루비아의 행동에 적잖아 놀란 토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렌은 팔짱을 끼고 그들을 지켜봤다.

“일단 제 갑작스러운 고백에도 저를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비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토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의 입은 루비아의 손에 의해 막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제가 고백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엘리아네가 먼저 고백하려고 하기에 막기 위해서 그런 거구요.”

하지만 당황한 것은 루비아도 마찬가지였다.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어 나가던 루비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 토마는 루비아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응,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

토마의 감은 루비아의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그는 지금 루비아가 자신에게 진심을 똑바로 전하지 못하고 망설인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토마는 눈치가 아예 없다는 점이었다.

루비아의 생각을 관철하지 못한 토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니 침착하고 계속 말을 해보라는 의미를 담아.

루비아가 고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유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괜찮다고 하는 토마의 말은 이미 루비아에게 다른 의미로 전달된 뒤였다.

“당연히 차일 거라 생각해 한 말이었어요. 진심도 아니었고 상황에 휩쓸려 그냥 했던 말이니까 억지로 저를 받아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루비아는 소리치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토마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굳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자신만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건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이 되는 말이었다.

일단 엘리아네의 고백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말.

자신을 좋아하니까, 먼저 고백하려고 그런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진심이 아니었으며 억지로 받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왜 당연히 거부할 것이라 생각했냐는 것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사실이었다.

루비아가 또 자신에게서 도망치려고 한다.

그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토마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원하던 사냥감이 자기 잡아달라는 듯 다가오는데 거부할 맹수가 어디 있을까.

어떤 이유를 덧붙이든 루비아는 지금 토마에게 여지를 주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며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었다.

“억지가 아니었다면?”

이어진 토마의 말에 루비아는 생각했다.

정말로 망했다고.

어디서 배운 것인지 토마는 잡고 있던 루비아의 손을 아래로 내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분명 루비아를 유혹하는 듯한 다정한 미소였음에도 그 순간 루비아에게 그것보다 무서운 미소는 없을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어떡하죠…?”

토마는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는 듯한 말을 하는 루비아를 보며 더욱 짙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답은 하나뿐일 텐데 말이다.

토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루비아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좋다고 먼저 말한 건 루비였잖아, 그치?”

“그렇죠…?”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발을 빼지?”

맞지.

틀린 말 하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분명 토마가 나쁘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이었으나.

이건 자신의 잘못이 맞았다.

과장 조금 더하자면 내가 어장 친 거잖아 이거!

나 진짜 되게 나쁜데?

루비아의 가슴 한구석에 계속 자리 잡고 있던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루비아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건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할 게 아니라.

토마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잖아.

그 사실을 자신은 너무 늦게 눈치채 버렸다.

“미안해요.”

루비아의 사과에 토마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런 말을 들으려고 한 고백도 아니었고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나도 루비를 좋아하고 루비아도 나를 좋아하니까.

잘 풀릴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루비,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널 좋아하고 있어.”

그럼 뭐 어떤가.

토마는 알고 있었다.

루비아가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래서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관심을 보이면서 루비아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계기를 만들어 주면 거절하지는 않지.

“그래서 루비, 나는 이기적이라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한 번으로 족하거든.

그 말은 토마의 입 밖으로 빠져나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루비아의 머릿속은 온통 미안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기적인 건 토마가 아니었다. 화를 내도 부족한 상황에 침착하고 다정하게 말하는 토마를 보면서 망했다고 도망이나 칠 궁리를 하는 자신이 가장 이기적이었다.

“이기적인 건 저 같은데요.”

루비아의 말에 토마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다음 말을 들으면 그렇게 생각 못 할 텐데.

“그러니까, 이기적인 사람들끼리. 딱 한 달만 만나볼래? 그러고 결정하는 거야.”

“네가 나랑 더 만나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거고, 아니면 내가 다음 기회를 노려볼게.”

정말 저걸로 괜찮나 싶을 정도로 루비아에게 괜찮은 조건이었다.

“너도 나한테, 그 정도 책임은 져줘야 하는 거 아닌가?”

화를 안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긴 한데요.

그의 말 하나하나에 틀린 것이 없기는 했다.

그건 가만히 둘의 대회를 지켜보고 있던 렌 또한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루비아의 친구로 무조건 편들어주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건 루비아의 잘못이 맞았다.

아무리 토마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어도 그렇지 차일 거란 생각으로 마음에도 없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

물론 이미 한 번 차이긴 했지만.

그리고 렌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바뀌기도 했다.

토마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루비아를 좋아하고 있었다.

저렇게 누구 좋아하는 건 처음 보네.

루비아가 그와 잘되지 않길 원하던 자신까지도 그를 응원하게 만들 정도로.

그렇게 생각한 렌이 루비아에게 시선을 옮긴 순간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정말,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하기에, 이번엔 토마가 차였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루비아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건 제 잘못이 맞으니까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근데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요?”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토마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나야, 오히려 고마운걸.”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는데.

오히려 토마는 루비아의 고백이 고마웠다. 정말로.

어떻게 루비아에게 다가가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회를 만들어 주다니.

토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루비아는 절대로 모를 것이었다.

토마는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웃고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한 달간 잘 부탁해, 루비.”

놓았던 손은 정중히 루비아에게 내밀어졌다.

그녀는 제 앞에 보이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그 손을 잡았다.

“저도 잘 부탁해요.”

한 달간의 연애 시작이었다.

루비아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준 뒤, 렌은 방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은 채 토마를 불러세웠다.

“나는 이번 일, 루비아의 잘못보다는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해.”

그녀의 말에 토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아는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한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이 눈치채기에는 충분했다.

“엘리아네와 루비아에게 말이지?”

“어,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게 아닐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토마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렌이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당분간 루비아한테 엘리아네가 접근 못하게 할 거야. 협조해.”

그녀의 말에 동의한 토마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답을 들은 렌은 장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된 토마는 루비아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자신은 엘리아네에게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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