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예린과 바리다스의 2세 계획.
다음 날, 밤새 바리다스에게 시달린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어떻게 지치질 않아.
허리의 통증 때문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잠시 모습을 정돈한 뒤에야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식당에는 먼저 도착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잘 주무셨어요?”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인사하려고 하기에 손을 드는 것으로 저지한 후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많아 보이는지.
어젯밤 때문인가 오늘따라 식욕이 돌았다.
입맛을 다시며 스테이크를 집어 든 순간 아필레와 아킬레스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딱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던 순간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나는 빠르게 입을 닫았다.
하필 이 타이밍에 들어올 건 뭐람.
그보다 아킬레스가 왜 여기서 식사해.
물론 여긴 황궁이었고 황궁은 그의 집이니 그가 어디서 식사하든 자유이긴 했지만 황제잖아.
원래 황제가 이렇게 막 아무 사람이나 같이 식사해도 돼?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웃음을 터트린 아킬레스가 내게로 다가왔다.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군, 공작부인.”
황제고 나발이고 한 대 쥐어박고 싶네.
황제와 식사한다는 건 누군가에겐 평생 한 번 있기도 어려웠고 황제와 마주하는 것도 극히 드문 기회라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해선 안 되겠지만 내게 아킬레스는 이미 남편 친구 겸 친구의 남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간단하게 말해 내게도 친구로 느껴진다는 뜻이었다.
황제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니 예의를 차리고 있을 뿐이지.
“감사합니다.”
이를 악물고 감사 인사를 하자 아킬레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표정이군.”
눈치는 빠르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런 내 행동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그는 아필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편하게 대해도 되네. 그대는 내 하나뿐인 친구의 아내이자, 황후의 친구이니.”
진짜 편하게 대할 수는 있거든요?
근데 그러면 내가 반역죄로 잡혀갈 것 같아.
아킬레스는 정말로 내게 너무 친구 같은 이미지였다.
이곳이 신분제가 아니었다면 이미 한 대 쥐어박았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부담가질 필요 없다네.”
제가 당신의 애칭을 부르며 등짝을 때리거나 장난을 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정말로 아킬레스와 친해진다면 그렇게 될 것만 같아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폐하.”
그 순간 내게 부담을 주지 말라는 듯 아필레가 그를 불렀고.
아킬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만할게. 여보.”
그 순간 아킬레스에게서 들려온 호칭에 나는 귀를 의심했고 아필레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 부부끼리 그렇게 부를 수 있지. 그럴 수 있지만.
애초에 이 세계에서는 저런 호칭을 잘 사용하지도 않는 데다가. 그 말을 황제가 하니, 어색하게만 들렸다.
내 또래 친구가 저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오글거리기도 했고 말이다.
“꼭 대신들 있는 곳에서도 그렇게 부르세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필레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퉁명스러운 그녀의 말에 아킬레스는 그제서야 실수를 눈치챈 듯했다.
“우리랑 공작부인밖에 없는데, 뭐. 저기도 그렇게 부를걸?”
하지만 그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저 답을 보아하니 실수가 아닌 모양이었다.
당당한 그의 대답에 아필레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안 그래요.”
“그런가, 공작부인?”
이러는데 어떻게 황제 취급을 해.
아킬레스가 뛰어난 정치와 외교로 성군이라 평가받고 있기는 한데.
나한테는 그냥 친구 남편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그렇죠.”
다른 사람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런 호칭을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보통 다른 사람이 있을 때까지 저러진 않으니까.
내 대답에 잠시 고민하던 아킬레스는 아필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겠네, 조심하도록 하지.”
물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필레에게 입맞춤을 하려 해 그녀의 제지를 받았지만 말이다.
그들의 행동에 슬쩍 아이들의 눈치를 보자.
리리안은 익숙한 듯 밥을 먹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 또한 식사하느라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포크로 스테이크를 집은 순간.
“근데, 형수님이랑 오빠는 왜 여보라고 안 불러?”
자스민의 질문이 들려왔다.
예상치도 못한 공격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나는 내 포크에서 스테이크가 떨어졌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엄마랑 아빠도, 황제 폐하랑 황후 마마도 그렇게 불렀는데. 두 사람은 여보가 아니야?”
“여보는 맞는데, 우린 이름이 더 편해서 그래.”
어색하게 말하며 나는 포크를 입 안으로 가져갔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아킬레스가 입을 열었다.
“스테이크가 떨어졌다네, 공작부인.”
나는 그제서야 스테이크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얼굴을 붉혔다.
그런 내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아킬레스는 시종을 불러 떨어진 스테이크를 치우라 명했다.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로.”
이거 되게 쪽팔린다.
차라리 아이들만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쪽팔리진 않았을 것 같았다.
시종에게 들려 나가는 스테이크를 괜히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근데, 원래 부부는 여보라고 하는 거잖아. 법으로 그렇게 정해진 거 아니었어?”
자스민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런 법이 대체 어디 있는데.
하지만 자스민은 나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아킬레스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근데 잠시만 지금 아킬레스한테 물어보면 무조건 답이 정해져 있잖아.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웃음을 터트린 아킬레스의 입이 열렸다.
“그렇지, 차일드 영애는 똑똑하군. 맞지, 법으로 정해져 있어.”
누구 맘대로?
네가 뭐라도, 돼?
되긴 하는구나.
아킬레스의 지위를 떠올리며 납득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자스민을 돌아봤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녀가 심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킬레스를 바라봤으니 말이다.
“아냐, 사실 형수님이랑 오빠는 여보야라고 불러. 잡아가면 안 돼.”
심각한 그녀의 표정에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웃음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귀엽긴 한데 자스민 그거 다 거짓말이야. 속지 마.
그리고 너보다 나한테 타격이 더 크니까 제발 속지 마.
“영애 덕분에 법을 어긴 사람들을 잡았으니, 영애의 공을 높게 사지. 어떻게 용이라도 선물해 줄까?”
하지만 아킬레스는 자스민에게 장난치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어진 그의 말에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자스민의 두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두 사람은 여보라고 불러.”
“그래?”
자스민의 말에도 아킬레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런 그의 행동에 자스민은 그린과 레몬을 바라보며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두 사람은 웃음을 참느라 그녀의 눈빛을 읽지 못한 듯했다.
레몬, 그린. 저건 자스민을 놀리는 게 아니라 나를 놀리는 거라니까? 빨리 맞다고 말해.
나 또한 속으로 소리쳤으나 여전히 그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 순간 마지막 남은 희망인 리리안과 자스민의 눈이 마주쳤고.
살았다는 듯 환하게 웃은 자스민은 입을 열었다.
“진짜야, 리리안 언니도 들었을걸?”
하지만 리리안 또한 고분고분히 넘어가 줄 사람이 아니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인 리리안은 나를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리리안은 자스민보다 나를 놀리는 것이 더 재밌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결국 자스민은 울먹거리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자스민을 너무 심하게 놀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 아킬레스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영애, 사실 장….”
그렇게 아킬레스의 해명으로 상황이 정리되나 하는 그 순간.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바리다스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스민이 울먹이며 그에게 달려갔고 나는 처음으로 그의 타이밍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민, 무슨 일이니.”
자기에게 붙어 울먹이는 자스민의 등을 토닥여주며 바리다스는 식당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 순간 아킬레스와 바리다스의 눈이 마주쳤고 찔리는 게 있는 아킬레스는 빠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표정을 굳힌 바리다스가 천천히 아킬레스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자스민이 그의 목을 강하게 안는 것으로 행동을 저지했다.
“오빠야, 오빠야는 형수님한테 여보라고 부르지? 그렇지?”
“자스민 다 장난이니까, 이리 오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가 소리쳤으나.
바리다스의 얼굴은 이미 붉어진 상태였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던 겁니까.”
그리고 그런 그의 분노는 모두 아킬레스를 향했다.
붉어진 얼굴로 바리다스는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갔고 나는 말려달라는 표정으로 아필레를 바라봤으나.
그녀는 재밌다는 듯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들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 것 같았다.
바리다스에게 한 대 맞을 상황에서도 실실 웃고 있는 아킬레스만 봐도 그런 상황이지 않은가.
지금 여기서 진지한 사람은 단 세 명뿐이었다.
나, 바리다스, 그리고 자스민.
“아냐, 오빠야는 형수님한테 여보라고 부르니까. 안 잡혀가. 그니까 싸우지 마.”
그리고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도 한 사람뿐이었다.
자스민 말이다.
그제서야 무슨 상황이었는지 모두 눈치를 챈 듯 바리다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킬레스를 바라봤다.
“적당히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나는 모양이었다.
“다른 건 괜찮은데, 식당에서는 안 싸웠으면 좋겠어.”
“그게 맞지.”
그 순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레몬과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레몬, 리리안. 너희가 드디어 말려 주는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을 바라본 순간 레몬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렇지, 그냥 오빠가 형수님한테 여보라고 부르면 잡혀갈 일도 없는 거잖아.”
결론이 왜 그렇게 나는 건데?
“맞는 말이야, 레몬. 해결됐으니까. 그만 울렴 자스민.”
그렇게 말하며 리리안은 자스민에게 윙크했고.
자스민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저 말을 납득하는 건데?
어이가 없어진 내가 바리다스를 바라보자 그 또한 당황한 듯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오빠, 빨리 해. 항상 하는 거잖아.”
“그렇지, 집에서 매일 하는 거니까.”
“빨리 말하지 않으면 아무리 나라도 아바마마에게 잡아가라고 할 수밖에 없어.”
너네 진짜 바람 잘 잡는다.
“공작. 어서 하지 않으면 잡아가 버릴 수밖에 없네.”
기어이 지금 상황에 이르게 한 주범, 아킬레스까지 거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바리다스에게 집중된 순간.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