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예린과 바리다스의 2세 계획.
“여…”
바리다스의 입술이 달싹이며 첫 마디가 내뱉어졌다.
답지 않게 부끄러워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서일까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잘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도 저런 호칭 들어 보고 싶다고.
여보나, 자기. 이런 말들 말이야!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랜 나는 이어 나올 말을 기대하며 바라봤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
“…기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맞는 말이긴 했다.
근데 왜 아쉬운 기분이 들까.
그런 생각은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미 바리다스를 놀리는데 재미를 붙인 것인지 자스민을 제외한 모두가 나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안 돼, 오빠야 잡혀가!!”
자스민 혼자 진지한 표정으로 바리다스에게 매달렸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자스민의 모습에 그는 그녀를 안아 들고 아킬레스를 노려봤다.
당장, 장난이었다고 말하라는 듯이.
아킬레스 또한 바리다스와 자스민을 놀리려는 생각이었지 울릴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너그러운 황제니 특별히 두 사람을 용서해 주겠다.”
상당히 뻔뻔한 말이었으나, 다행히도 자스민에게는 먹힌 듯했다.
바로 밝아진 표정의 그녀가 바리다스의 품에서 뛰어내려 아킬레스에게 달려갔으니 말이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한 자스민은 아킬레스의 품에 안겨 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에 바리다스의 두 눈에서 불이 튀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뒤였고 아킬레스는 멍하니 자신의 뺨에서 떨어지는 자스민을 바라봤다.
“어떻게, 저놈한테 이렇게 귀여운 딸. 아니, 동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린 그는 자스민과 바리다스를 번갈아 바라봤고 나는 금방이라도 아킬레스를 한 대 치러갈 것 같은 바리다스의 손을 잡아주는 것으로 그를 저지했다.
“저는 폐하가 황제이신 것을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말은 분명 칭찬이었겠지만 현재 바리다스의 표정으로 보아.
황제만 아니었으면 한 대 쳤다는 뜻으로 한 말인 듯했다.
“칭찬 고맙네.”
이어진 그의 대답에 나는 생각했다.
황제는 황제라고.
어떻게 저런 표정과 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저런 농담을 할 수 있을까.
이어진 그의 대답에 바리다스의 표정이 더더욱 구겨졌고.
“오빠야, 이리 와서 먹어.”
자스민이 바리다스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바리다스는 정말로 아킬레스를 한 대쯤 쳤을 것이었다.
자스민은 웃으며 그에게 스테이크를 찍어 한 조각 내밀었고.
그녀 덕에 기분이 풀린 듯 웃으며 그것을 받아먹은 바리다스는 그녀를 무릎에 앉힌 채 식사를 시작하려 했다.
“영애, 나는 안 주나?”
하지만 아킬레스는 바리다스를 놀리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고 바리다스가 그를 노려보던 그 순간.
자스민은 아킬레스를 바라보다 환하게 웃었다.
“웅!”
실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자스민의 대답에 바리다스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이 한 방 먹여 줬네.
그런 생각을 하며 작게 웃음을 터트린 순간 자스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는 리리안 언니한테 해 달라고 해.”
그녀의 말에 아킬레스는 기대를 담아 리리안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리리안의 성격상 그런 일을 해줄 리 만무했고 정색한 리리안은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난 저런 거 해 줄 나이는 지났어.”
자스민보다 더 단호한 대답이었다.
하긴 리리안도 사춘기가 올 때긴 하지.
그런 리리안의 대답에 바리다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아킬레스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노네.
처음으로 바리다스가 유치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묘한 기 싸움을 관찰하던 그때.
익숙한 듯 체념한 표정으로 아킬레스를 보고 있는 아필레와 눈이 마주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응원을 건넸다.
그렇게 식사가 끝이 났고 연이어 디저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 중 하나인 딸기 케이크를 한 조각 모두 먹은 순간, 바리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면 안 돼, 오빠야. 더 먹어야지.”
자스민의 말에 그녀의 앞을 바라보자, 크림이 묻은 접시가 세 개 씩이나 놓여 있었다. 자스민의 입 주변에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모두 바리다스가 먹은 것이 분명했다.
아니, 거기서 뭘 더 먹여!
귀여운 자스민의 애교에 작게 미소 지은 바리다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입을 열었다.
“일이 밀려서, 다음에 더 놀자꾸나.”
그렇게 바리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시무룩한 표정이 된 자스민은 바리다스가 식당에서 나가기 무섭게 아킬레스에게 다가갔다.
안아달라는 듯 팔을 벌리는 자스민을 아킬레스는 홀린 듯 안아 무릎에 앉혔고.
“폐하, 케이크 먹을래?”
당연히 아킬레스는 거절하지 않았고.
자스민은 다시 한번 케이크를 가져와 그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아킬레스에게 케이크를 모두 먹인 뒤 남은 딸기를 자스민 본인이 먹는 걸 보고서야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민 너, 케이크 위에 딸기만 먹으려고 그러는 거구나.
아니 그냥 딸기를 달라하지, 왜 굳이 그 딸기를 먹겠다고 그러는 거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딸기만 먹겠다고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케이크를 먹이면 어떻게 해.
나는 꾸역꾸역 케이크를 세 조각 째 먹어주고 있는 아킬레스를 보며 생각했다.
“어때, 맛있어?”
“영애가 주니 더욱 맛있는 것 같네.”
그렇게 말하는 아킬레스는 행복함과 힘듦이 공존하는 얼굴이었다.
아킬레스에게 케이크를 네 조각이나 먹인 뒤에야 자스민은 만족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형수님도 먹을래?”
아쉽게도 민, 어른인 나에게 너의 그 속셈은 다 들켰단다.
“고마워.”
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 민이 먹여 준다는데 먹어야지.
내 대답에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온 자스민은 케이크를 한 조각 가져와 내 무릎에 앉았다.
“자, 형수님 아.”
자스민이 건넨 건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딸기였다.
이제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민은 세상에서 나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스민의 다음 말이 들리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형수님은 내 동생을 낳아줘야 하니까, 골고루 먹어야 해.”
그, 민아. 내 의사는 없는 거니?
너무 예상치 못한 말에 쿨럭거리며 케이크를 겨우 삼킨 나는 자스민을 바라봤다.
“나랑 리리안, 레몬 언니도 다 남자아이가 좋아!”
아니, 내 의사는 없냐고!!
하지만 나는 사레가 들려 대답을 할 수가 없었고.
자스민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황후님만 여자아이가 좋다고 했는데, 쪽수는 아직 우리가 더 유리해.”
아필레까지 왜 거기에 끼어 있는데!!
왜 말리지 않았냐는 듯 원망을 담아 아필레를 바라보자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우유를 가져다주었다.
“괜찮나?”
안 괜찮아요.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이 정도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어느새 나와 바리다스가 아기를 가지는 것은 이들에게 기정사실이 된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천천히 준비할 생각이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기대해 버리면 부담스럽다고.
“너무 부담가지지는 말게, 공작부인. 나는 그저 여자아이가 태어난다면 작은 궁궐과 어린 망아지 그리고 아이를 돌볼 시종 다섯 명 정도만 보내주려 했으니 말이야.”
엄청 부담스러운데요?
그런 내 생각이 표정에서 드러난 모양이었다.
당황스러운 표정이 된 아필레가 빠르게 덧붙였으니 말이다.
“남자아이라면 시종을 세 명으로 줄이려고 했네.”
정말 덜 부담스러워지는 말이었다.
아필레가 준 우유 덕분에 조금 진정이 된 내가 괜찮다고 말하려는 그 순간 아킬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그렇군, 황후.”
처음으로 아킬레스가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맞지, 누가 신생아한테 저런 과한 선물을 해 줘?
그렇게 생각한 내가 아킬레스에게 시선을 옮긴 그 순간, 존재 자체로 화려하게 빛나는 그의 백금발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깨달았다.
더하면 더할 사람이지, 아필레를 말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여자아이라면 친히 티아라를 내려 줄 것이며, 남자아이라면 드워프가 만들었다 전해지는 검을 보내주겠네.”
더욱더 부담스러워지는 그들의 선물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절대로 이 사람들에게 아이를 가지려 계획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겠다고.
저 두 사람은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만 알아도 건강에 좋은 음식들과 내 수발을 들 시종, 원한다면 신전의 사제들까지 붙여 줄 기세였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선물이 더 늘어나기 전에 나는 입을 열었다.
“아뇨, 저는 두 사람의 마음이면 충분해요.”
하지만 두 사람은 내 생각만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은 비싸다네.”
“저희의 마음이 저런 선물들 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모양이네요.”
아니, 무슨.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어떻게든 내게 선물을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저걸 사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 순간.
“어마마마, 아바마마 그만두세요. 공작부인이 부담스러워하잖아요.”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내가 감동하려던 그때, 리리안은 왜인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지금은 비밀로 하고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그때 한 번에 선물하죠.”
아니, 누가 그걸 앞에서 당당하게 말해!!
하지만 리리안의 말에 아킬레와 아필레는 납득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역시 내 딸이야.”
“맞춤으로 제작한다면 거절할 수도 없으니 말이야.”
나는 그제서야 여기 있는 모두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을 살짝 노려보자, 그들은 날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잠깐의 웃음 끝에 천천히 내게 다가온 아필레는 부드럽게 내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놀린 것은 미안하지만, 공작부인. 나는 늘 그대에게 진심이었네.”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도, 주려고 한 선물도, 그대가 아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한 말까지 모두. 엄마가 된다는 건 그대의 생각보다 훨씬 더 축하받아야 하고 행복한 일이니까. 부담은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렇게 말하는 아필레는 방금까지 내게 장난을 쳤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그녀는 분명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음에도, 그녀의 말에서는 왜인지 전생의 엄마가 떠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그런 내 대답에 아필레는 아름답게 웃으며 내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니 절대로, 부담가지지 말아주게.”
왜인지 불안한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