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빙의에 관하여.
유아가 급하게 황궁까지 찾아오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루비아에게 편지를 받아서였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당연하게도 주연의 이야기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냐는 말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이었다.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진실을 처음 알게 된 것과 더불어 주연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목적을 알게 된 유아는 자신의 실수에 자책하며 해결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는 엘리아네와 주연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해결법을 찾게 되었다.
해결책이 쉽게 나오지 않아 몇 날 며칠이나 날을 샌 덕에 현재 유아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성녀가 아무리 강한 신성력과 정신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밤새도록 자료를 찾으려 분주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유아는 슬슬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처음부터 돌아갈 생각이라고 방법이 있다고 전부 다 말하지 왜, 날 못 믿고 X랄이야, X랄은.
그녀를 모시는 신관들이 만약 그녀의 생각을 알았다면 온 힘을 다해 부정하거나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것이었지만.
유아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법도 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주연의 적응을 도와주려 했고 그녀가 허상을 쫓는다 생각해서 저런 방법을 택한 것이지.
만약 돌아갈 방법이 진짜로 있었다는 걸 알았거나 주연이 돌아가기 위해 토마를 유혹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대 아카데미 입학을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주연은 아직 어린아이였고 그릇된 판단은 유아가 한 것이었으니.
그렇게 책임을 떠안게 된 유아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주연을 아카데미로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미래라고 알려준 신들 잘못이라고 말이다.
아니, 애초에 원작이네. 뭐네, 이런 소리 안 나오게 책도 안 썼으면 되는 거잖아.
누가 그런 걸로 책을 쓰냐고 대체.
유아는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신성 모독이라 하며 붙잡혀 갔을 정도의 욕을 속으로 외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를 누가 신성 모독이라 잡아갈 수 있겠냐마는.
한참 속으로 신을 욕하던 유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린 보고 싶다.
유아가 예린을 찾아온 것은 주연과 토마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으나, 개인적인 이유 또한 있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친구로서 예린에게 조언을 받기 위해서.
사실 그것보다 아무나한테나 모든 걸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만약 그녀가 공작가에 있었더라면 편지라도 썼겠지만.
하필 이 타이밍에 예린이 황궁에 방문해 있었다.
황궁에 통하는 모든 편지나 영상구와 같은 것들은 모두 감시관을 거친 뒤에야 윗선에 전달되기에 유아는 빙의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득한 편지를 차마 예린에게 보낼 수 없었다.
권력을 사용하면 물론 가능이야 하나, 개인적인 이유로 굳이 황실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상 황궁을 찾은 유아는 지극히 후회하고 있었다.
그냥 편지 쓸걸.
권력 남용할걸.
지금의 유아는 피로가 누적되어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유아는 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이며 테이블 위에 엎어지려다가 자신이 있다는 곳이 황궁임을 자각하고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유아가 짜증을 가득 담아 머리를 쓸어 넘긴 그 순간.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예린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유아?”
자신을 향한 걱정스러운 표정과 따뜻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유아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린에게 안기고 싶은 것을 참았다.
“공작부인과 둘이 있고 싶으니, 다들 물러나 있게.”
유아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황궁의 시녀와 유아를 따라온 신관들은 머뭇거렸으나.
유아의 태도에 심상치 않은 이야기임을 느낀 예린 역시 거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 다들 물러나 주게.”
그제서야 그들은 자리를 비켜 주었고.
드디어 유아는 눈치를 보지 않고 예린의 품에 뛰어들 수 있었다.
“잘 지냈나요, 예린? 보고 싶었어요.”
유아는 누구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빙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사람이 예린 말고 누가 있냐는 말인가.
빙의를 아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자신이 돌보는 다른 빙의자들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봤자 논란이 생길 여지를 주게 될 터였고.
인간성 상실한 신들은 이런 이야기에는 공감을 해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유아는 정말로 예린이 보고 싶었다.
정말로.
* * *
나는 처음으로 보는 유아의 약한 모습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애초에 저런 편지를 보낸 것부터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유아의 상태가 이 정도로 안 좋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성녀의 성력으로도 커버가 안 될 정도로 심한 다크서클과 축 늘어진 어깨, 그보다 안 좋아 보이는 퀭한 눈까지.
내가 수능 며칠 전날 밤새며 공부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유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무슨 일이에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유아의 상태가 이렇게까지 나빠진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신전에서 그녀의 몸이 이렇게 상할 때까지 방치할 리 없었으니, 일을 무리해야 할 정도로 많이 주면서 야근 강요를 한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유아가 뒤늦은 학구열이 찾아와 밤이 새도록 공부한 것은 더더욱 아닐 터였다.
그런 이유들로 유아의 상태가 왜 이토록 안 좋은 것인지 예상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유아를 돕겠다 생각하며 유아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설명하자면 너무 긴데, 조금만 쉬고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아니, 이 상태를 보고 누가 쉬지 말라고 해? 오히려 제발 쉬어달라고 부탁해야 할 판국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하죠.”
내 말에 유아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진짜, 방금까지 너무 힘들었는데… 예린을 보니까 긴장이 풀려서. 진짜 조금만, 조금만 쉬고 이야기할게요.”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은 유아가 쉬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 같아요.”
내 말에 유아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진짜, 조금만 쉬고 일어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유아는 의자에 정 자세로 앉은 채 눈을 감았고.
저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 하는 그녀의 정신력에 작게 감탄한 나는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을 불러 그녀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방을 준비해 달라 말했다.
그녀의 상태를 본 신관들이 혹시나 나를 의심할까 걱정 또한 되었으나.
그들도 당연히 유아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를 의심하기보다는 드디어 유아가 잠들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잠깐 쉬겠다는 말과 달리 유아는 오랜 시간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잘 잤어요?”
나는 유아의 상태가 걱정되어 자리를 비우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켰다.
다행히도 눈을 뜬 그녀의 상태는 아까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미안해요, 이렇게 오래 잘 생각은 없었는데.”
본인은 좋아진 자신의 상태보다 이렇게 늦게까지 잤다는 사실에 더 마음 쓰는 듯했지만 말이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유아의 상태가 더 중요하죠.”
내 말에 유아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고.
그러기를 잠시, 유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예린, 저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유아는 울음과 함께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나에게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빙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뭐가 있었는지.
자신이 왜 여기에 찾아왔는지.
나에게 왜 편지를 쓰지 못했는지.
내 품에 안겨 슬프게 울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었다.
유아는 주연이 이해되면서도 짜증 난다고 내게 설명하였고.
나도 한때 잠시간 원작에 집착했던 사람이었던지라 주연을 이해하면서도 유아의 말에 동의해주었다.
“토마 공자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유아는 자신 때문에 토마가 주연에게 놀아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토마가 들으면 조금 서운할 것 같긴 했으나.
검밖에 모르는 그와 연애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주연이라는 그 소녀에게 토마는 절대 안 넘어갔을 것 같았다.
“유아의 잘못이 아닌걸요. 저는 그보다, 며칠간 고생한 유아가 더 걱정되는걸요.”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판단을 잘못했는걸요.”
내 말에 고개를 저은 유아의 말에 나는 팔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가 저 책임감을 조금 덜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조금 늦게 출발할 걸 그랬어.
황궁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쩜 이리 타이밍이 안 맞을 수 있는지.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지 그랬어요.”
내 말에 유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게 제 일인걸요. 예린과 루비아. 그리고 다른 분들한테도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중요한 일이긴 한데, 나한테는 왜?
내 반응에 유아는 아차 싶었는지 잠시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조사 결과 알아낸 사실인데. 빙의의 조건은 혼과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육체 두 가지에요. 그리고 육체가 비기 위해서는 원래 그 육신의 혼이 사라져야 하죠.”
그 정도야 나도 예상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유아가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한다는 건 설마.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유아를 바라봤고.
내 예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유아는 조금 슬프면서도 기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만약 피오라가 죽지 않았고 그녀를 깨울 수 있다면 예린도 돌아갈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