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빙의에 관하여.
돌아갈 수 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아의 말대로 정말로 돌아갈 수 있는 거라면.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가족과 친구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남은 바리다스와 아이들은?
아직 확실하게 결정된 일이 아니었음에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 세계에서의 나의 삶과 원래의 나의 삶 모두, 내게는 너무 소중한 것들이어서.
그런 나의 갈등을 유아 또한 눈치챈 것인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았다.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예린에게 만큼은 선택권을 주고 싶었어요.”
유아의 말에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그러니 잠시 혼자 있고 싶네요.”
유아의 성격상, 아무런 증거 없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할 리 없었다.
그녀는 지금 확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안에 피오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유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본 유아는 어딘가 슬퍼 보이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는 누구보다 예린이 행복하길 바라요.”
그 말을 끝으로 방의 문이 닫혔다.
혼란스럽긴 했으나, 유아에게는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믿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내게 선택권을 준 것이니 말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오랜 고민 끝에도 확실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이곳의 가족들과 원래의 가족.
모두가 내게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 늦은 밤이 되었다.
유아가 머물렀던 방에 있던 나는 어느새 잠들고 말았다.
그런 나를 깨운 것은 당연하게도 바리다스였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나를 안고 있는 바리다스의 모습이었다.
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 깼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잠든 척을 할 뿐.
추운 날이었음에도 그가 덮어준 겉옷 때문인지 그의 품 때문인지 왜인지 춥지 않았다.
멍하니 유아가 한 말을 떠올리며 바리다스를 보고 있던 그때.
그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늦은 밤 은은하게 들어오는 정원의 불빛 아래,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고.
바리다스가 내 이마에 작게 키스하며 입을 열었다.
“피곤할 텐데, 더 자요.”
녹아내릴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에, 작게 미소 지은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따뜻한 그의 체온이 느껴짐과 동시에 환하게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잠들기 전까지도 하던 고민이 떠올랐다.
그를 두고 그런 고민을 한다는 사실이 미안해져서.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아뇨, 괜찮아요.”
그런 내 행동에 바리다스는 당연하게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성녀님에게 무슨 얘길 들었습니까?”
차마 그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랬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나는 그와의 대화를 피하려 했다.
“라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요. 꼭 전부 다 말해줄 테니까.”
그렇게 말은 했으나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바리다스는 내게 더 이상 묻지 않았으나 눈치 빠른 그였으니 분명 느꼈을 것이다.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유아와 나눈 이야기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는 것도 짐작했겠지.
“예린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당연하게도 표정은 좋지 않았으나, 그는 나를 배려해 주었고.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에 대한 죄책감은 당연하게도 나의 것이었다.
침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바리다스는 나를 침대에 내려놓은 뒤, 잘 자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바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행동에 서운하다는 생각 또한 들었으나.
지금과 이전의 삶을 저울질하는 내가 가지기엔 이기적인 감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애써 내려놓으려 노력했다.
부디 내가 지금의 고민에 답을 내렸을 때 후회하지 않을 최선의 선택이길.
나는 그렇게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다.
* * *
그 시각.
밖으로 나온 바리다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성녀님?”
그가 예린을 혼자 두고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는 바로 누군가 그들을 쫓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인기척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없는 어설픈 솜씨로 말이다.
아니, 차라리 그편이 나았을 터였다.
기척을 숨기는 데에 능숙해봤자,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을 터였고 상황이 나빴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역시, 공작이시군요.”
그리고 그의 말에 바로 옆 건물에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유아였다.
그녀로서는 인기척을 잘 감췄다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바리다스는 그녀의 주변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는 신관들을 한 번씩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런 걸 줄줄이 달고 다니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바리다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자 유아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공작도 알다시피, 저는 예린을 아끼고 있어요.”
모를 수 없긴 했다.
바리다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어느새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유아가 소곤거렸다.
“그래서 전 누구보다 예린의 행복을 바라고 있죠. 공작도 저와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해요.”
성녀는 성녀인가.
어느 순간,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신관들의 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아마 유아가 잠재운 것이겠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위를 살핀 뒤, 이어진 바리다스의 대답에 유아는 작게 미소 지었다.
왜인지 슬퍼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저는 예린이 전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심상치 않은 일이라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정말로 상상치도 못한 것들이어서.
바리다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확실합니까?”
“당연하죠, 제가 누구인데.”
그렇지.
예린의 친구이자, 성녀.
그래서 더 큰 문제였다.
유아가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로 예린을 희망 고문할 리 없으니 말이다.
“예린의 안에 피오라가 살아 있어요. 그녀를 깨운다면 예린은 지구, 아니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이걸 유아가 자신에게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일 것이었다.
예린의 행복을 위해,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달라고 유아는 지금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딱히 말해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유아가 한 말은 틀렸다.
그녀가 누구보다 예린의 행복을 바라며 바리다스도 마찬가지일 거라 했지만.
그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더, 유아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예린이 행복하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그러니, 바리다스는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예린이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해주었어도 비슷한 반응으로 말해줄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딱 한 가지.
바로 말해주지 않고 예린이 속으로만 안고 있는 게 서운하게 느껴졌다.
“공작님에게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이어진 유아의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유아 또한, 예린을 진심으로 아끼기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니 말이다.
“아닙니다, 예린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리다스의 말에 유아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선택할 기회를 준 것은 예린뿐이었으니까.
그녀가 바리다스에게도 이 사실을 말해준 것은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고, 그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지금 성녀가 아닌, 예린의 친구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 순간, 풀숲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유아가 잠재운 신관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마지막 인사를 한 뒤 바리다스는 돌아갔다.
예린의 옆자리로.
방 안으로 들어가자, 어린아이처럼 곤히 잠들어 있는 예린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그녀에게 손을 뻗은 바리다스는 부드럽게 예린의 뺨을 쓸었다.
당신이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라.
당신이 행복할 때 곁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욕심이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 소원은 괜찮지 않을까.
언젠가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면 그건 언제든 내 옆에 있던 순간이기를.
가능하다면 나를 사랑하고 위하는 것만 아니라 내 곁에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하기에
그런 이유로 내 곁에 남아주기를.
부디.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예린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떼고 바리다스는 작게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자요, 예린.”
당신이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이 마음은 알아주길 바랍니다.
나는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그렇기에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길 바랄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이런 말들로 당신의 결정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밖에 전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주길.
“…사랑합니다, 예린.”
당분간 닿지 못할 진심이었다.
예린의 이마에 입 맞추는 것을 마지막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바리다스는.
문을 닫기 전 마지막인 것처럼 예린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니 부디,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탁.
쓸쓸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